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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Mar 20. 2019

산티아고 일지 08 스틱이 필요해

¿Dónde estoy en este mapa?

14/04/jueves

4월 14일 목요일

desde Logroño hasta Navarrete

로그로뇨에서 나바레떼까지

여행한 지 11일, 걸은 지 8일



   사람 몇 없는 숙소에서 너무 마음을 놓았나 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기도 했거니와 방엔 작은 소리, 인기척 하나 없었다. 가까스로 눈은 떴는데 천근만근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워서 그렇게 되지도 않는 늦장을 부렸다. 대도시의 번화가를 지나면서 미령은 과일가게를 들러 작은 오렌지를 샀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과즙을 뚝뚝 흘리며 그 오렌지 하나를 나눠 먹었다. 중앙에 박힌 씨는 거침없이 흙바닥에 내던지면서.


   끝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스페인의 널찍한 공원엔 그래피티로 가득한 터널이 있었다. 미령은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그 김에 골반을 좀 쉬게 할까. 마침 배낭에 달린 허리 벨트에 골반이 쓸려 아프던 참이었다. 허리 벨트를 바짝 조여, 저린 어깨에 힘을 보태왔기 때문이다.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미령은 뭐 하러 가방까지 내려놓느냐고 물었다. 아픈 건 그만 신경 쓰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충고했다. 나는 사진을 찍은 후 미령의 휴대전화를 돌려주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아마 미령의 말에 당장은 화가 나서였을 테고, 다음은 화가 난 티가 너무 나서 민망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내가 뭐라고 했나? 너도 아팠던 거 아니었어? 여태 널 기다리며 걸어온 날 대체 뭘로 본거야?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 오늘은 날씨도 좋고 사람들이 친절해서 매우 좋네요.


   성이 나서 재빨리 자리를 벗어난 나에게 통통한 살집의 여자가 말했다. 쉬이 그녀의 말에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과자를 꺼내어 우적우적 씹어댔다. 공원과 외부를 구분하는 철창인가 본데, 나뭇가지 두 개를 엮어 만든 십자가가 잔뜩 걸려있는 게 보였다. 여기에서조차! 이렇게 헤어지는 건 싫은데, 그렇담 화는 삼켜야겠지?


   이전에 만났던 라틴계 중년 부부와 다시 마주쳤다. 밝은 표정이었다. 부인의 다리는 전보다 호전되어 있었다. 이 마을에서 머무를 거야? 나와 내 부인은 여기에서 숙소를 알아보는 중이야. 우리는 각자의 최신 소식을 나누었다. 그 사이 그때까지도 아무렇지 않은 듯 나와 함께 걸어오던 미령은 카페로 들어갔다. 나도 대화를 마치고 곧 따라 들어갔고 오렌지주스와 샌드위치를 시켜 미령의 앞에 앉았다. 그런데 미령은 말없이 빠르게 식사를 정리하는 눈치였다.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마치고 마을 구경을 하고 있겠다고 했다.


- 그런데 너 그 스틱 계속 쓸 거야?


   사실은 론세스바예스를 가던 첫날부터 내 스틱은 고장이 나있었다. 한참을 걷다 보면 스틱은 튀김용 젓가락 길이로 변해 있었고, 고된 몸을 전혀 지탱해주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수시로 그 길이를 조정해야 했다. 미령은 함께 걸었기에, 내가 하루 종일 비척걸음으로 숲 길을 통과한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숙소에 도착한 뒤 자신의 스틱을 빌려줄 테니 망가진 네 것은 버리는 게 좋겠다고 말했었다. 나의 스틱은 그때 미령의 것으로 대체되어 버려졌다. 당황스러웠다. 하루 전에만 말해줬어도 대도시인 로그로뇨에서 새 것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 아, 지금요? ……. 가져가요.


   많은 말들을 속으로 삭혔다. (대신 분에 못 이겨 이번에도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미령이 떠난 후 남은 음식을 깨작거렸다. 오늘은 어디서 머무를까?


   무니치팔 알베르게. 오늘은 거기가 좋을 것 같았다. 지체 없이 알베르게를 찾았다. 그때 오전에 공원에서 만난 친구들이 숙소 아래 구멍가게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다리를 다쳐서 버스를 탈까 고민하던 뽀글이 파마머리의 남자와 노란 단발을 한 여자는 하몽을 안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하몽 한 점을 권했다. 그냥 걸어왔어요? 아뇨, 저흰 거기서부터 버스를 타고……. 이야기를 하는데 문득 내가 숙소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문은 열려있는지, 접수는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알베르게로 올라갔다. 미령이 있었다. 매몰차게 떠난 사람을 이렇게 금방 만날 줄은 몰랐다.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구태여 피할 이유도 없겠지. 여기 있을래! 나는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미령은 우물쭈물하더니 휴대전화를 얼굴에 붙이고 시선을 피하더니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1시 반 숙소의 문이 열렸다. 라틴계 중년 부부와도 같은 방에 배정되었다. 나는 땀내 나는 몸뚱이를 씻어내고 다시 멀쩡해진 얼굴로 한국에 있을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통화 종료. 나는 휴대전화를 식당 콘센트에 꽂았다. 그리곤 곁에 쪼그려 않아 마지막 종착지까진 얼마나 남았나, 내일은 어디까지 가는 게 좋을까 지도를 이리저리 넘겨보며 시에스타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4시 58분, 59분……. 5시가 되자마자 충분히 충전된 휴대전화를 가지고 슈퍼로 향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일과였다. 오늘 저녁에 먹을 것과 내일의 아침식사 그리고 약간의 간식. 돌연 이 작은 마을을 나의 구역 마냥 휘적대며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만 걸었다. 고개가 줏대 없이 흔들리면 외지인임이 들통날 것 같았다. 그래서 더 혼자임이 강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먼 길 떠나기 전에 성당이 보였다. 세요나 찍을까. 무심코 들어간 성당에서, 또 울음이 터졌다. 안은 어두웠지만 미미한 촛불로 앞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찬양곡이 잔잔히 흘러나왔다. 이 곳의 모든 것들이 꾸준했다. 위안이 됐다.


   숙소로 돌아오니 1층에서 오스피탈레로가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맛있게 저녁을 차려 먹겠노라 다짐했다. 식당 테이블 위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겉에 비닐을 뜯어내고 3분 정도 익히면 되겠다 싶었다. 그럼 뭘 눌러야 하나 전자레인지 곁을 훑었다.


- 그건 전자레인지에 넣으면 안 돼.

- 아……, 그렇군요. 고마워요.


   따로 끓인 물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닭고기 수프 맛이네. 후루룩. 컵라면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그리고 다른 순례자들이 본격적으로 식사를 준비할 즈음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맛있었어. 그래도 컵라면은 너무 적지. 허기가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당장 앞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 크루아상 하나요!


   나는 다음 여행을 상상했다. 포르투갈. 여행 책자의 끝자락에 자리한 포르투갈에 대해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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