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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Mar 26. 2019

산티아고 일지 10 폭우

¿Dónde estoy en este mapa?

16/04/sábado

4월 16일 토요일

desde Nájera hasta Santo Domingo de la Calzada

나헤라에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까지

여행한 지 13일, 걸은 지 10일



   7시 반 경 선두로 길을 나섰다. 이제는 주위에 사람이 없다고 놀라지 않는다. 이것도 익숙해졌다. 걷다 보면, 때가 되면, 뭐든 보일 것이었다. 기다림 끝에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내가 본길이 아닌 우회로를 걸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사람이 너무 없다 했다. 나와는 다른 갈림길에서 순례자 무리가 보였다. 추적추적 비 오는 길 홀로 걷는데 뜻밖의 선물이었다. 정말 아름답죠? 무지개예요!

   언덕에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발을 떼야한다. 하나의 고비마다 확실한 끝맺음이 있기까지 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러면 다시 올라가기도, 그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가파른 경사에 배낭은 내 어깨를 더 짓눌렀다. 어깨 끈을 조이고 풀고 가방을 내렸다 매기를 반복하니, 옆에 있던 송 씨 아저씨는 파스 한 봉을 꺼내 주었다. 그렇게 몇 번의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정상. 꿀 같은 휴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순례길에 난데없이 나타난 골프클럽은 갑작스레 우리의 차림새를 초라하게 했다. 탁. 탁. 주물로 찍어놓은 듯, 똑같은 모양의 새하얀 건물들을 호졸근한 옷가지를 걸친 순례자가 지나간다. 탁. 탁. 그러나 표정과 걸음걸이는 매우 당차다. 조개껍데기를 매단 이의 자부심은 실로 엄청나다. 감출 수가 없다.

   새로운 마을에 들어섰다. 송 씨 아저씨는 외국인 친구 몇 명과 알베르게보다 좀 더 사생활이 보호되는 썩 괜찮은 숙소를 잡아 묵곤 했는데, 그 여정을 함께하는 친구 중 한 명을 이곳에서 만났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사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막역해 보이는 친구들의 담소를 끊을 용기가 없다. 전 점심 먹으러 더 들어가 볼게요. 작별인사를 하고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스포츠 중계 영상이 틀어진 가게에 할아버지들이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나는 또르띠야와 빵을 양 손에 들고 배어 물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끼익. 가게 문이 열리더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 자, 세요는 여기에 있습니다.


   단체 행동은 착착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 한 명씩 차례대로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이내 그들의 가벼운 행동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순례길에 패키지 여행이 가능한 것인가!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왔다. 길은 시원하게 뻗어있었다. 좌우로 대칭이면서도 약간의 흐트러짐이 있는 길은 과연 인간의 감각은 아니었다. 초록빛과 노란빛, 붉은빛이 각자의 영역에서 강렬함을 뽐냈다. 나는 바닥에 냅다 배낭을 깔고 앉았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먼 곳에 지어진 오두막을 바라봤다. 홀로 취한 멋에 뜬금없이 길 중앙에 앉아 있다 보니, 사람들이 내게 힘내라고 한 마디씩 건넸다. 잠깐 쉬는 것뿐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다들 좋은 여행 하세요!

   잠시 후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엉덩이에 먼지를 털어내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차! 하는 순간, 누가 양동이 물을 뒤엎기라도 하는 듯 하늘에서 물이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정말 한 순간이었다. 억수 같은 비는 시야를 가렸다. 비를 피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길가 버려진 창고에 모여들었다. 번-쩍!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조바심이 났다. 금세 멈추는 비가 아니라면, 계속해서 거세지기만 한다면, 빨리 출발하는 게 나을까? 한두 명씩 다시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이 상태론 길을 못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설임 끝에 떠나는 이들의 뒤를 따랐다.

   폭우는 꾸준하고 강력했다. 판초를 뚫고 온 몸을 내리쳤다. 흙 알갱이들은 바람에 날려 살을 휘갈겼고, 신발 안으로 들어가선 질퍽한 물웅덩이의 뾰족한 송곳이 되었다. 단단히 잠근 단추도, 손에 쥔 모자도 힘없이 펄럭였다.


   한참을 걷는가 싶던 앞의 무리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야단법석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가지런한 줄은 온 데 간데없고 혼선이 일고 있었다. 오스피탈레로는 더욱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에게 바로 방을 배정받게끔 자리를 안내했다. 그러나 뭔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판초부터 벗어 정리하라고 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접수대로 나를 끌고 가더니 곧이어 다시 판초를 지적했다. 어떡하라는 거야?


- 피식.


   입 밖으로 튀어나온 진심을 알아들은 한 외국인 아저씨는 내가 판초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어서 가봐.

   방에 들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은숙 아줌마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난리통에 아줌마는 비를 맞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 비를 피하게 한 것이었다. 거의 유일하게 보송한 상태를 유지한 아줌마는 주섬주섬 침대에 깔개를 펼쳤다. 아줌마의 깔개는 은박지처럼 번쩍였다. 베드 버그가 반짝이는 재질을 싫어한다고 하길래. 기웃대던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깔개를 들춰보며 탐색 모드에 들어섰다.


   나는 이것저것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큰 규모만큼 많은 사람이 욕실을 한꺼번에 쓰다 보니 김 서림이 대중목욕탕 저리 가라 일뿐더러, 깨끗이 씻고 나온 사람들은 난간마다 그들의 젖은 옷을 널었는데 한 사람당 옷이 한 가지던가. 판초, 바지, 양말, 배낭 커버 등. 난간은 이미 만석이었다. 그래서 난간을 가로질러 긴 줄을 연결한 이들이 생겨났고 그 줄도 이미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진귀한 풍경이었다. 간신히 옷을 넌 사람들도 이를 한 발치 물러서 재미난 구경거리 보듯 눈을 끔뻑, 입을 실룩거렸다.


- 어서 나와요, 어서!


   숙소 앞 세탁소에서 은숙 아줌마와 나는 빨래가 다되길 기다리는 동안 벽에 기대어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빨래를 하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나갈게요.


   아저씨는 다시 한번,


- 세탁기가 돌기를 멈추면 알려줄 테니, 어서 나와요. 다들 나와있어요.


   도대체 뭘 하길래? 옆에서 따로 세탁기를 돌리던 파란 점퍼를 입은 대머리 아저씨는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저희도 나가볼까요? 건너편 건물의 외부 복도에 탁자가 길게 깔려 있었다. 아까 우리를 초대하던 아저씨는 나를 보자마자 어서 와, 여기서 이거 받아! 라며 와인 한 잔과 따끈한 굴라쉬 한 접시를 대접했다. 그릇은 이미 누군가 사용했던 것이었고 식탁 위도 깨끗하지 않았다. 은숙 아줌마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 곳에서 모두는 친구였고 따뜻해 보였다. 맛있겠다!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질 않았다.


   저녁이 되어 전설의 닭이 존재한다는 이곳 대성당의 미사에 참석했다. 전설은 이러했다. 옛날에 한 여인이 흠모하는 청년에게 고백을 했으나, 수도사의 소명을 이유로 청년에게 거절을 당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여인은 그를 도둑으로 모함하고, 청년은 거룩한 것을 모독한 죄와 절도의 죄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아들의 소식을 접한 어미는 비통한 마음을 안고 순례길에 오른다. 그런데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 달이 넘도록 교수대에 매달린 채 살아 있는 자신의 아들을 목격한다. 청년의 어미는 당시 판사에게 아들이 살아 있으니 풀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판사는 당신 아들이 살아 있으면 내 앞에 있는 삶은 닭도 살아나라지! 라며 비웃기만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식탁에 놓여 있던 삶은 닭이 살아 날뛰었다. 그 이후 성당에서는 암수 한 쌍의 닭을 키우며 청년을 기린다고 했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성당 뒤 켠 높은 곳에 흰 닭이 푸드덕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새장 아래엔 두 번째 기적을 바라는지 철창 속 찬양대가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축복의 인사로 저녁 미사가 끝이 났다. 은숙 아줌마와 나는 와인 한 잔에 타파스를 곁들여 저녁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 이제 괜찮은 거야?


   은숙 아줌마와 오늘 찍은 사진들을 서로에게 보내며 감회를 나누는데, 오스피탈레로도 저녁을 먹으러 왔었는지 다가와 농담조의 말을 건넸다. 아깐 패닉이더니 지금은 너무 신나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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