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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Mar 28. 2019

산티아고 일지 12 친구와의 식사

¿Dónde estoy en este mapa?

18/04/lunes

4월 18일 월요일

desde Belorado hasta Agés

벨로라도에서 아헤스까지

여행한 지 15일, 걸은 지 12일



   크루아상과 바게트, 시리얼, 삶은 달걀, 오렌지 주스 등 음식은 푸짐히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 중 몇 가지를 담아 빈자리를 찾았다. 식당은 평화로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어? 이 노래……. 호주에서는 시험이 끝나면 학생들에게 꼭 들려주는 음악이 있다고 했다. 그 음악이 바로 지금 틀어진 이 음악이야! 호주 청년 팀은 어렸을 적 추억이 떠올랐는지 휴대전화로 영상을 찍더니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키득키득 어릴 적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나는 숙소를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배낭의 무게를 좀 더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도저히 뺄 것이 없었다.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스티로폼 깔개를 배낭 옆구리에서 빼내었다.


   은숙 아줌마는 오늘 평소보다 걸음이 빨랐다. 따라가기 벅찰 정도였다. 아침부터 그 걸음을 쫓다 보니 어느새 두 번째 마을. 언덕배기 슈퍼에는 흰색 플라스틱 의자가 있고, 사람들은 거기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나 역시 가방을 내려놓고 빵을 골랐다. 눅눅한 빵은 많이 달지 않았고 목마름이 덜해 좋았다.

   다음 마을에서 만난 가게들은 내부가 좀 어두웠다. 은숙 아줌마는 더 올라가면 카페가 많을 것이다, 그럼 사람도 많을 테고, 분위기가 밝아서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곳을 찾아보자고 했다. 하지만 올라간 곳에는 마을의 끝을 알리는 표지판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은숙 아줌마는 지금 걸어온 거리가 짧다한들 힘들게 올라왔으니 다시 내려가지는 않겠다고 했다.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쉬었다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래서 방금 오른 길을 혼자서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지나쳤던 바르로 들어갔다. 안에는 오전에 헤어졌던 팀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 어디까지 가기로 했어? 난 오늘 좀 더 걸어볼 생각이야. 근데 앞에 길 봤어?

- 응. 올라갔다 내려온 건데, 앞으로 온통 오르막길이야.


- 우리 바르에서 뭐 먹고 오지 않았나? 방금 먹은 샌드위치는 어디로 간 거야?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경사. 그 언덕 중턱에서 은숙 아줌마가 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팀과 나는 말없이 은숙 아줌마의 뒤를 따랐다.

   어제 온 비 때문에 곳곳에 웅덩이가 생겼다. 잘파닥잘파닥 소리를 내며 길을 걸었다. 신발은 진흙이 엉겨 붙어 잔뜩 무거워졌고 바지는 흙탕물에 점박이였다. 이런 와중에 바닥에 돌로 만들어진 글귀가 보였다. 부엔 까미노. (Buen camino. 직역하면 좋은 길로 순례길에서는 좋은 여행을 하라는 격려와 응원의 인사로 사용된다.) 돌멩이를 하나하나 주워다 모았을 모습이 훤히 보였다. 당신도 좋은 여행되길 바라요! 응원에 힘입어 다시 힘차게 걸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준비로 한창인 하얀 봉고차였다. 봉고차에 신나는 음악이 틀어져 있었다. 주인은 걸걸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휴식을 청했다. 해먹과 바닥에 늘어놓은 나무옹이들로 앉을자리는 충분했다. 흔쾌히 제안에 응한 우리는 봉고차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인 여자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고 춤도 춰가며 먹을 것을 준비했다. 메뉴는 직접 압착기로 짜서 만든 오렌지주스와 하몽을 얹은 타파스. 차 트렁크에서 펄쩍 뛰어내린 개 한 마리는 흥겨운 분위기에 활기를 더했다. 팀은 개 여러 마리를 키우는 견주로서 개를 매우 잘 다루었다. 팀이 공터에 나무 막대를 던지면 덩치 큰 개는 꼬리를 크게 흔들며 이를 물어왔다. 개의 재롱이 한창일 때, 뒤로 헨리가 오는 것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굽은 팔꿈치를 펴고 어깨너머 크게 손을 흔들었다. 헨리는 웃으며 우리를 잠시 바라보더니 걷기를 계속했다.

   얼마 후 나도 은숙 아줌마, 팀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들 부부가 운영하는 기부 카페는 ‘산티아고의 오아시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말 그러했다. 흐리던 하늘은 개더니 구름이 둥실 떠다니는 높은 하늘로 변해갔다. 배낭에 메달아 놓은 젖은 양말은 그 덕에 바싹 말라갔다.


   순례길에서 좋은 숙소를 고르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는 곳을 따라가는 것인데, 이것은 성공률은 높지만 비용이 좀 든다는 단점이 있다. 둘째는 한국인 아주머니가 있는 곳을 찾는 것인데, 다행히 이것은 시설 대비 비용도 합리적이다. 팀과 나는 조용한 마을 한국말로 북적이는 어느 숙소로 향했다. 오스피탈레로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단 두 마디로 많은 한국인들을 맞이했다. 자 그럼 오늘 저녁 메뉴를 골라볼까요? 앞서 앉아있던 한국인 아줌마들은 빳빳하게 코팅된 종이를 뒤적이며 신중히 저녁 메뉴를 탐독했다. 저녁 식사란 고된 일정 가운데 가장 즐거운 시간이니 그냥 넘길 순 없다. 어느 때보다 활기 띤 모습, 질문도 많았다. 뒤에서 접수를 기다리는 이들은 메뉴판 하나를 들고 옹기종기 모여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네 명의 한국인 아줌마들과 팀, 내가 한 방에 배정되었다. 단층 침대며 2층 침대며 형편이 될 때마다 하나씩 들여놓은 가구들이 다채롭게 다락방을 채웠다. 나는 이층 침대에 올라앉았다. 낮은 천장 때문에 허리를 있는 대로 수그렸다. 그리고 아줌마들의 성화로 팀에게 받은 알로에 젤을 햇볕에 타버린 콧등에 펴 발랐다.

   팀은 손빨래로 바쁘고, 주방엔 와이파이를 찾는 이들로 가득하고, 아줌마들은 어디 있지? 오, 헨리! 같은 숙소네요, 아, 짐 풀고 이따 저녁 식사 때 봐요. 하릴없이 비좁은 계단을 오르내렸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곳에서 앉아만 있자니 좀이 쑤셨기 때문이다. 그때 한국인 아줌마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안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햇빛이라도 쐬지 그래?


   알베르게 앞 벤치에 앉아 일기를 썼다. 햇볕이 뜨거우면 드리운 그림자에 숨기도 하고, 다시 따뜻함이 그리울 만하면 밝은 곳을 따라 발을 내밀었다. 은숙 아줌마가 숙소 밖으로 나왔다. 오스피탈레로가 숙소에서 나가면 오른쪽에 미니미니 슈퍼와 미니 슈퍼가 있다고 거기를 간다고 했다. 나는 아줌마를 따라 그나마 조금 규모가 있는 미니 슈퍼에서 아침거리들을 샀다.


   숙소로 돌아와 산 것들을 정리하다 보니 7시,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아래층에는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은숙 아줌마는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아 있었고 내게 오라고 손짓했다. 식탁에 내 이름이 적힌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그 옆 쪽지엔 은숙 아줌마 하고도 헨리와 팀이, 옆 테이블엔 네 명의 한국인 아줌마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헨리는 와인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식전주를 보고 진작에 흥에 취해선,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 우린 안 주나요?


   네 명의 한국인 아줌마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한 마디 하더니 자리에 일어나 멋진 포즈를 선보이며 본인들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헨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더 사람 좋은 얼굴을 해서는, 이곳저곳을 돌며 한 명도 빠짐없이 와인을 따르고 건배 제의를 했다. 한 병 정도는 괜찮아. 술을 못하는 팀도 이날은 조금 마셨던 것 같다.

   헨리는 나를 만나면 매번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는 수비리에서부터 만난 특별한 인연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히 나에게 덧붙여 말하기를, 미령도 다른 사람 만나며 잘 가고 있을 거야.

   오스피탈레로는 숙소에 처음 들어올 때 받아둔 메뉴대로 음식을 준비했다. 반드시 꼭 한 접시씩. 수차례를 왔다 갔다 했다. 접시가 뜨거워서 그러나 봐. 사람들이 넉살 좋게 장난을 걸었다.


- 한국에선 왜 특히 여자들이 순례길을 많이 오지?

- 한국 남자들은 돈을 벌어야 하거든요. 휴가도 짧고요.

- 그럼 은퇴한 후에라도 오면 되지 않나?

- 대신 저희를 보내더라고요.


   아줌마들은 헨리의 질문에 답하곤 드라마 이야기로 열을 냈다. 나는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와인을 홀짝거렸다. 맛있다고 하지만 술은 역시 쓴 것 같아. 입만 축인다는 게 얼굴은 벌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졸린 게로구나? 헨리가 웃었다. 한데 너는 종종 지금처럼 심각한 표정을 하곤 하지.

   코스로 저녁을 예약한 사람들은 그 후에도 메인 디쉬가 하나 더 나왔다. 빠에야 혹은 소고기였다. 헨리는 주문한 스테이크가 생각한 것과는 좀 달랐는지 소금과 후추를 요구했고, 그 위에 가미해 먹었다. 다시 나타난 오스피탈레로가 디저트는 무엇으로 하겠냐고 물었다. 다수는 젤라토. 익숙한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려던 찰나 스페인에서는 젤라토를 헬라또라고 부른다고 했던 한국 아줌마들과 오스피탈레로의 낮의 대화가 기억이 났다. 다메 운 헬라또! (Dame un gelato!)


   식사가 끝나고 계단 앞 의자에 쪼그려 앉았다. 미리 사두었던 유심을 배낭 깊숙한 곳에서 꺼내온 뒤였다. 일반 카드 크기의 것에서 테두리를 떼어내고 또 떼어내니 작은 유심만 남았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작은 핀으로 작은 유심을 조심스레 갈아 끼웠다. 뜯어낸 포장을 주섬주섬 챙기며 생소한 숫자 나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드디어 내게도 스페인 전화번호가 생겼다.


instagram.com/lupe.l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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