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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Mar 29. 2019

산티아고 일지 13 같이 가는 게 좋아

¿Dónde estoy en este mapa?

19/04/martes

4월 19일 화요일

desde Agés hasta Burgos

아헤스에서 부르고스까지

여행한 지 16일, 걸은 지 13일



   혹시 천천히 걷다 보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미리 씻어 놓은 과일들을 입에 밀어 넣었다. 아침 6시, 벌써부터 식당에 이야기 꽃이 폈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같은 방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저 먼저 출발할게요. 그리고 부엌을 슬쩍, 헨리는 다른 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헨리를 불러 인사를 해야 할 텐데 어쩐지 나는 그냥 길을 나서기로 했다. 헨리는 이날 브루고스로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오늘 걷는 동안이 아니면 언제 또 만날지 기약이 없다. 우연을 기다릴 밖에 없었다. 헨리와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한동안 뒤를 보며 길을 걸었다. 그리고 순례길에서 친구가 된 이들과 한 번씩은 더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작은 돌들은 순례자의 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고, 큰 바위들은 순례자의 움직임을 크게 만들었다. 과연 가벼운 움직임이 필요한 곳이리라. 잠시 고개를 들었다. 양 떼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양몰이 개 한 마리가 곧게 앉아 있었다. 그 순한 얼굴로 양들을 어찌 지키는지. 그러나 수십 마리의 양들은 그 양몰이 개에 의지하여 무척 평온해 보였다. 곧 그들의 평온한 얼굴을 닮은 평야가 나타났다. 습기를 머금은 잔디들이 듬성듬성 깔린 것과 안개가 낮게 드리워진 것이 무릉도원의 정취를 자아냈다. 그 절경에 취해 길이라도 잃을까 수많은 순례자들이 한 데 모은 조약돌들은 방향을 지시하는 화살표가 되어 있었다. 경험에 의하면 이 화살표는 어느 이정표보다 확실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조약돌이 알리는 방향을 따라 평야를 가로질렀다. 다만 저 멀리 보이는 순례자 하나는 아래로 보이는 경치를 벗 삼아 외곽을 둘러 산을 내려갔다.

   내리막으로 접어들 무렵, 백발의 외국인이 지나가며 가볍게 인사했다. 내 시선은 적당히 빠른 걸음을 지닌 그를 따라갔고, 곧 두 갈래로 나뉜 길에 멈추었다. 그동안 백발의 외국인은 방향을 틀지 않고 계속 걸음을 유지했다. 저기요! 여기에요, 여기! 화살표는 왼쪽이에요! 속도를 조금 더 내보았지만 시큰거리는 무릎에 뜀박질은 불가능했다. 그는 빠르게 사라졌고, 갈림길에서 나는 홀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여태껏 흘렸던 땀의 흔적까지 걷어갈 강한 바람이 불었다. 오전과 달리 잘 정돈된 길이 서서히 펼쳐졌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웠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 앞을 앞질렀다.


   산 아래 조그만 마트. 한 할머니 순례자는 오렌지주스를 마시며 태블릿에 열중이고, 마트 입구에 마련된 화장실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추위와 허기짐,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한 미안함에 쪼그라들었던 마음을 달랬다. 자주 먹던 오렌지주스가 아닌 핫초코, 바나나 대신 딸기 한 접시. 걷는 동안 자주 보지 못한 과일이라 그렇게 선택했다. 한국 아줌마 넷이 뒤이어 들어오더니, 삼십 분은 족히 먼저 출발했는데 아직 여기냐며 채근했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벽화 하나가 이목을 끌었다. 우산, 비상약, 카메라, 다리미, 칫솔, 컵, 라디오, 삽까지 없는 게 없는 큰 배낭을 멘 순례객이 나체의 몸으로 집 안 소파에 앉아있는 자신을 떠올리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딱 지금의 내 모습이었다.


   신발에 들어간 돌멩이를 빼내고 걷는 길은 초조했다. 다음 마을은 언제쯤 보일는지, 변기 위에서 휴식을 원하는 몸, 그 몸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러나 순례길은 마을을 통과하지 않았다. 대신 또 한 번의 갈림길을 제시했다. 왼쪽으로 가는 1번 길은 강을 끼고 있으며 도중 카페가 있고, 오른쪽으로 난 2번 길은 험한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부르고스까지 직통하는 길이었다. 카페가 더 가깝겠지? 나는 1번 길을 선택하여 걸었다. 같은 길을 택한 할머니, 아줌마, 아저씨 모두 제치고 빠르게!

   화장실에서 나와 주문했던 또르띠야를 찾아들고 자리를 잡았다. 철조망으로 구획이 나뉜 허허벌판을 다니다가 마을 어귀에서 극적으로 만난 카페의 안쪽 자리였다. 아직 멀었나 보군. 구글 지도 속 부르고스는 내 위치에서 한참이나 먼 곳에 있었다. 그나저나 다시 걷기 시작한 길은 사람의 길이 아니었다. 걷기에 절대 부적절하고 험난했는데, 이를테면 수직으로 깎아져 난간을 붙잡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야만 하는, 혹은 고속도로를 가로질러야만 하는 그런 길이었다. 나는 도로 끝 아스팔트로 메우지 못해 좁게 난 흙바닥에 스틱을 깊이 내리꽂았다. 그리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난간이라도 놓치지 않게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그 길을 통과한 후엔 4차선? 아니 그 이상의 도로를 아무런 신호도 없이 가로질렀다. 역시 길이 아니었나. 다음 화살표가……? 공원 안으로 들어온 나는 사람들을 붙들고 여러 번 길을 물었다. 똑같이 생긴 가로등과 그 옆에 듬성듬성 보이는 벤치, 강둑을 따라 난 이 길은 언제 끝나는지. 답은 한결같았다. 이 강을 오른편에 두고 쭉 걸으라는 것이었다. 이 지역엔 온통 거짓말쟁이뿐이군!

   이곳은 거짓말쟁이만 사는 마을이란 생각이 마음속에서 거의 확실시될 때쯤 길게 뻗었던 길은 드디어 끝을 보였다.


- 아, 되려 공원이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었나!


   자동차가 달리는 얽히고설킨 길에서 목표점을 더 좁혔다. 틀린 길은 고쳐가며 오늘의 알베르게로.


   GPS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데 나는 아직 목적지를 발견하지 못한, 다시 말해 거의 다 도착해서 건물의 방향만 잡으면 되는 시점이 되었을 때, 지나가는 여자에게 알베르게의 위치를 물었다. 저-기! 손으로 가리킨 곳엔 어두컴컴한 건물들 뿐이었다. 여기라는 건가? 여자는 여전히 두리번거리는 나를 들어 숙소 앞에 내려놓았다. 눈이 번쩍! 나도 모르게 팔을 들고 도착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자 막 자전거를 정리하고 숙소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례자가 함께 소리쳤다. 어서 와!

   꽤나 큰 알베르게였다. 송 씨 아저씨가 환영인사를 건넸다. 오후엔 이 마을 성당에 꼭 가봐. 나는 침대를 배정받고 개인 보관함에 짐을 풀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에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걸으면서 힘이 들 때면, 우스운 노래를 부르며 힘을 내던 팀이었다. 다리를 다쳐 버스를 타고 온다고 하더니! 주먹을 서로 맞부딪쳤다. 무사히 왔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순례길에서의 만남은 언제나 반갑다.


   성당에 도착한 나는 견학 온 아이들의 무리에 휩쓸려 안으로 들어갔다.


- 빨래를 밖에다 널어놨는데 많이 젖었겠는데?


성당 중앙에 있는 정원을 향해 열어둔 창문으로 얼핏 밖을 보는데 비가 오고 있었다. 이미 젖은 거,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전시의 막바지, 어느 할아버지 옆에 서서 산티아고의 지도가 껴진 액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거야. 할아버지는 지도 한복판을 가리켰다. 관람을 마치고 표를 샀던 곳에서 빈 의자를 찾아 앉았다. 아직 비가 내리는 탓이었다. 아까 지도를 설명하던 할아버지는 서두르지 말라는 듯 웃는 얼굴로 아는 체를 했다. 그러나 비는 30분 가량을 기다린 후에도 그칠 기미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머리를 감싸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재킷을 만지작만지작, 모자를 덮어썼다. 최대한 건물 끝자락 차양에 몸을 숨겨 비를 피해 걸었다. 그러다 송 씨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영국인 할머니와 함께였다. 마침 식당으로 가고 있으니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영국인 할머니는 샐러드, 송 씨 아저씨는 햄버거. 깔라마리를 먹고 싶지만 아무래도 배가 안 찰 듯하고 빠에야는 10유로나 했기에, 나도 버거를 먹기로 했다. 쌀쌀맞아 보이는 영국인 할머니는 첫인상과는 달리 선뜻 본인 샐러드에 곁들여진 치즈를 나누며 이야기를 리드했다. 반면 송 씨 아저씨는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들을 해나갔다. 벌써 여행의 끝을 준비해야 하는 때가 되었나. 아저씨는 종업원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기차 예매에 성공했다.


   서둘러 빨래부터 확인했다. 빨래는 건조대 채 무사히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는 성당을 보기 위해 숙소를 나가기 전,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선선하여 빨래를 테라스에 있는 바깥 건조대에 널었었다. 구김 없이 잘 마르라고 일부러 실내에 널어놨던 것들까지 모조리 끌어 가지고 나왔었다. 물기를 털어내고 기분이 좋아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도무지 문이 꼼짝을 안 했었다. 수차례 손잡이를 돌려도 봤으나 헛방이었었다. 안에서 나의 구조 요청은 어떻게 해도 소리 없는 아우성일 테지만 나는 긴 팔과 다리를 휘저었었다. 그 덕에 어느 대머리 아저씨가 나를 발견했고 다행히 안으로 들어온 일이 있었다.

   10시가 넘어 어두워진 침실에도 수신호를 주고받는 이가 있다. 니콜라와 팀이다. 이층 침대에 앉아있으면 칸막이 너머 건너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데, 칸막이를 방패 삼아 손으로 총을 만들어 쏘고 있다. 지금 그들은 끅끅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처절하게 침묵의 놀이 시간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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