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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Mar 30. 2019

산티아고 일지 14 계획에 없던 것

¿Dónde estoy en este mapa?

20/04/miércoles

4월 20일 수요일

desde Burgos hasta Hornillos del Camino

부르고스에서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까지

여행한 지 17일, 걸은 지 14일



- 오늘은 어디까지 갈 거야?

- 오르니요스 아님 산볼? 아마 둘 중 한 마을에서 머물게 될 것 같아.

- 그럼 같이 가자.


   건너편에 니콜라가 아침을 먹고 있었고, 팀과 나는 자판기에서 생수를 사는 것으로 출발 준비를 끝냈다. 아침이면 매번 맑은 날을 기대하지만, 오늘도 물이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문 밖으로 손을 내밀고 오늘을 가늠했다. 생각보다 빗발이 셌다. 선두는 입을 쌜룩이며 ‘뭐, 이 정도야!’ 자신감을 내비치며 금세 사라졌지만, 꽁무니에 있던 무리는 배낭을 내리고 판초를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잦은 바람에 모자도 더 꽉 조여 맸다. 7시 반, 발에 물집이 많이 생겼는지 샌들을 신고 절뚝이는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함께 도시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순례자 외엔 도보로 가는 사람은 찾을 수 없는 그런 길까지 걸었다. 그런 길 한 복판에 한 번은 터널이 있었다. 잠깐이지만 비를 피할 수 있겠다 여겼다. 그러나 터널은 물에 잠겨 접근이 불가였다. 저쪽으로 우회해서 가세요!


   팀의 회색 점퍼는 빗줄기를 막기엔 너무 얇았다. 팀이 점점 추워 보였다. 따뜻한 차라도 마시는 게 좋겠어. 우리는 빗물과 함께 빠져나가는 몸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막기 위해, 빠른 걸음을 유지했다. 맞아. 빵도 빵이었지만 뜨거운 음료부터! 끝내 마을에 입성, 미니 슈퍼마켓이라고 쓰인 비닐 천막으로 달려들어갔다. 


- 후-우. 살았다.


   그곳에서 송 씨 아저씨의 일행을 만났다. 아저씨는 온타나스까지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숙소를 나서기 전에도 잠깐 말했던, 어젯밤 본인들의 단잠을 방해했던 인물에 대해 다시 내씹기 시작했다. 하지만 범인 마이클 아저씨의 등장에 금방 조용해졌다. 나는 깨끗이 비운 잔과 접시 위 하나 남은 바나나를 팀과 나눠먹었다. 정확히 등분하려 했으나, 되레 팀에게 더 많은 쪽을 주고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다시 출발했다. 비도 그치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팀은 영화 ‘로키’ 주제곡을 부름으로써 주변에 용기를 전했다. 앞서 가던 할아버지는 팀을 향해 엄지를 한껏 치켜세웠다.


   비가 와서 으스스 추웠던 날씨는 갑작스레 제 모습을 달리 했다. 판초 혹은 바람막이 안은 땀으로 범벅이었고, 땀냄새를 맡은 수십 마리의 작은 벌레들이 눈앞에서 알짱거렸다. 더위에 약한 팀은 금세 지치고 말았다. 걸은 지 이제 14일 차. 영어가 미숙한 나는 팀에게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이미 아는 것들을 모조리 써버린 후였다. 가만있어보자……. 그때 송 씨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이쯤 되면 해결사라 부를 만했다). 다행히 송 씨 아저씨는 처음 만난 호주 청년에 대해 물어볼 것이 많았다. 호주인에게 영어 실력을 인정받은 송 씨 아저씨는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진행하더니, 나에게 이 속도로 쭉 걸은 거냐고 물어왔다. 그리곤 꽤 빠르다며 약간의 버거움을 표했다. 나는 일행의 뒤에서 사진을 찍고, 곧 따라잡아 그들이 잘 오고 있는지 확인할 만큼 힘이 남아있었다. 이 날 해가 나에게 주는 힘은 실로 굉장했다.

   오후 열두 시 반, 오르니요스에 도착했다. 송 씨 아저씨는 일행이 근처에 있는지 슬슬 찾아봐야겠다며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반면 팀은 예전 친구를 만났다. 드디어 영어로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그제야 처음 만났을 당시의 수다쟁이 모습을 보였다. 나는 통닭을 허겁지겁 뜯는 어느 프랑스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기름진 식사를 모두 마칠 즈음, 배낭을 내려놓고 좀 더 걸어보기로 했다. 어제 알아봤던 하얀 건물의 알베르게가 보였다. 나는 고개를 문으로 빼꼼 들이밀고는 지금 들어가도 되는지, 혹시 빨래는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뚱한 표정의 오스피탈레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다시 마을 초입, 팀은 아직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나는 슈퍼에 들어가 오렌지 주스를 사서 한 입에 몽땅 들이키며 생각했다. 산볼 알베르게가 좋다고는 하지만 수용인원이 적어 내가 들어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고, 온타나스도 저녁이 다 되어서 도착하겠다는 계산이 들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어. 팀에게 난 이제 알베르게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접수를 위해 오스피탈로 앞에 앉자 좀 전과는 사뭇 다른 상냥한 표정이었다.


- ATM기는 어디 있나요? 오, 너 여기 있었구나! 난 일행이 산볼에 호텔을 예약해뒀다고 해서 서둘러야겠어. 발을 담그면 산티아고까지 다치지 않은 깨끗한 발로 갈 수 있다는 전설의 온천엔 가봐야지.


   송 씨 아저씨는 작별을 고했다.


   돈을 좀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하루를 되짚어보았다.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더 걸을 수 있는데 움직이길 그만두었었다. 침대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에 끊임없이 꼼지락거렸다. 그런데 옆 침대의 아저씨도 뭐가 불편한지 자꾸만 숨을 내몰아 쉬었다. 어디 아픈가? 걱정의 눈길 한 번. 무슨 일이지? 의심의 눈초리 한 번. 그다음부턴 거북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방을 둘러보니 남자만 몇 명 있는 것이 괜히 찜찜했다. 그때 한국인 커플이 들어왔다. 순간 안심이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성당으로 향했다. 거슬렸던 소리를 가르고 정각을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당은 공사 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부서진 건물 사이 둥지를 튼 비둘기들과 녹슨 조형물이 보였다. 나는 발길을 돌렸다. 마을은 마치 빛바랜 사막 같았다. 마트에서 바나나와 초코바, 시리얼과 물에 타면 우유가 된다는 고체 우유 한 통을 샀다. 우유가 먹고 싶었지만 시원한 ‘진짜’ 우유는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나는 금세 다시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할 일 없이 남들의 분주한 분위기에 치이기 싫었다. 식당에선 큰 솥에 빠에야를 만들어 나누고 있었다. 아까 걸었던 길을 좀 더 걸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반쯤 열린 어두운 문 뒤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할머니 한 분이 멍하니 밖을 보고 서있는 것이었다.


- 중얼중얼중얼.


   초점을 잃은 눈은 꺼림칙했다. 여러 번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브래드와 열아홉 소녀가 외식 후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놓칠 새라 냅다 달렸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고체 우유를 물에 넣어 수저로 휘저었다. 그렇게 덩어리 진 묽은 우유가 탄생했다. 파스타를 만들어 먹던 한국인 커플도, 뒤이어 알베르게에 도착한 한국인 아줌마들도 그걸로 한 끼가 되겠냐고 물었다.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뭐 괜찮다. 내일 점심을 두둑이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먹은 것들을 치우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방 안에는 여전히 들리는 거친 숨소리가 나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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