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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Mar 14. 2019

산티아고 일지 03 못생긴 기다림

¿Dónde estoy en este mapa?

09/04/sábado

4월 9일 토요일

desde Zubiri hasta Pamplona

수비리에서 팜플로나까지

여행한 지 6일, 걸은 지 3일



   팡! 팡! 팡! 펄-럭. 어둑한 새벽, 뒤뜰에서 침낭에 붙은 먼지를 털어냈다. 친해질 수 없던 사람들. 알아들을 수 있지만 공감할 수 없는 말을 하던 어제의 한국인 무리가 나는 불편했다.

   신발장이 있는 휴게실엔 신문지가 비치되어 있었다. 떠나기 직전 신발에 묻은 모래와 아직 남아있는 불편함도 열심히 털어냈다.


   8시 30분은 순례자에게 매우 늦은 시각이다. 그래서인지 길엔 아무도 없었고, 미령과 나는 화살표를 찾는데 한참이나 애를 먹었다. 오직 느낌이 가는 대로 걸었다. 그때 저 멀리 세 명의 순례자가 보였다. 우리는 다른 순례자의 존재로 산티아고를 향하는 중이라는 것도 확인했겠다, 몸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여, 그들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어제 봤던 셰프의 무리였다. 그들은 비가 와서 우회로인 도로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온전히 화살표를 따라갔다면 왼쪽에 있는 산 어느 오솔길에 있을 것이라고 셰프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안개 낀 오솔길은 나를 한순간에 끌어당겼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셰프의 무리를 따라가기로 했다. 당장 산길로 갈 방법도 없었다. 하여 그들을 노란 화살표 삼아 걷는데, 셰프는 거듭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무래도 목적지가 다른 듯했다. 잠시 후 우리는 반대편에 있는 다리를 건너 본 행렬에 합류했다.


   카페에서 핫초코와 바나나를 주문했다. 어제 옆 침대에서 내가 약을 뿌릴 때마다 기침을 해대던 할아버지도 카페에서 요기하는 중이었다. 그는 앉기만 하면 무언가 수첩에 적고 앞으로 남은 거리를 계산하곤 했다. 그때도 그랬다.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끄적였고, 대뜸 나에게 세요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 여기서 받아.


   나는 식사를 마치고 그가 알려준 대로 알베르게가 아닌 곳에서 처음으로 세요를 받았다. 다시 인적이 드문 길, 희고 큰 개 한 마리가 있었다. 동상처럼 가만히 앉아있던 개는 바닥에서 엉덩이를 사뿐 띄어 올리더니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손아귀에 스틱을 꼭 쥐었다. 개는 공격할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았지만, 손에 쥔 스틱으로 순간의 무서움을 달랬다. 그러고도 졸인 가슴에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데, 뒤로 덴마크 여자가 오더니 마치 본인이 키우는 개인 양, 데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이날 미령을 오래도록, 그것도 매우 자주 기다렸던 것 같다. 담벼락에 배낭을 기대어 놓고 미령을 기다리는데, 이틀 전 마트에서 보았던 한국인 커플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도착하려면 아직 갈 길이 먼데 꽤나 지쳐 보인다고 나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깐의 격려를 마치고 커플은 떠났고, 나는 곧 미령을 만났다. 하지만 뒤돌아 보면 또다시 혼자가 되어있었다. 때는 발을 내딛으면 신발의 앞 코로 찔러 넣은 만큼의 흙이 우수수 흘러내리는 가파른 경사의 언덕 위였다. 높은 곳에 서니 멀리 뒤처진 미령이 선명히 보였다. 미령은 화살표를 지나쳐 두리번거리더니 엉뚱한 곳으로 걸음을 이어가려고 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올라야 하겠구나. 나는 미령을 부르며 언덕을 뛰어 내려가 방향을 잡아주었다.

   터널 너머엔 조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제법 분위기가 으슥했다. 그리고 거기 깊은 산자락에 오렌지와 물을 파는 상인이 나타났다. 나는 의심이 많은 편인지라 이런 얼토당토않은 장소에 있는 상인을 무슨 못 먹을 것을 파는 사람인 마냥 그냥 지나쳤다. 여기서 못 먹을 것이라 한다면……. 약을 탄 물이라든지, 약을 탄 오렌지라든지, 아님 그냥 약이라든지……. (의심만큼이나 강한 청소 혹은 정리벽 같은 게 있는 나에게, 그의 오렌지와 물을 담은 박스가 위생상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하 굴처럼 파놓은 또 다른 터널을 통과했다. 이번엔 그늘 진 둔턱에 앉아 미령을 기다리는데, 한참 뒤 도착한 미령은 얼토당토않은 장소에서 오렌지와 물을 팔던 상인에게서 오렌지를 샀고, 같이 먹으려고 계속 나를 부르며 걸어왔다고 했다. 그러나 걸어오면서 몽땅 먹어 버렸단다.

   걸으면 걸을수록 미령은 빠르게 뒤에서 모습을 감췄다. 다시 만나면 나는 함께 힘내서 걷길 바랐지만 미령은 만난 지점에서 또 한 번의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그날 미령은 전혀 걸음을 재촉해주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는 급속도로 지쳐갔다. 사실 이만하면 혼자 가도 되건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사실은……. 혼자는 아직 좀 무서웠다. 절뚝이는 사람을 그냥 두고 먼저 갈 수는 없지. 그것을 핑계 삼아 미령과의 동행을 이어갔다. 그래도 아직 한참이나 남은 나의 순례 여정이 순탄하게 흐르기 위해, 바닥난 지갑에 돈을 채우고 유심도 사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한 덩치 하는 대머리 아저씨와 그의 가냘픈 딸(둘 다 뙤약볕 아래 검은색 옷으로 쫙 빼 입고 지친 기색 없이 걷고 있었다.)을 놓치지 말아야지. 이제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해야…….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을에 발을 들이자마자 눈에 보이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눈 앞에 지나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순례자 사무소에서 받았고, 받은 이후엔 애지중지 안주머니에 모셔 놓았던 종이에 초점이 맞춰졌다. 숙소는 몇 개나 있고 오늘 하루는 어디에서 머무는 것이 좋을지, 거기에 고민을 담았다. 그리고 미령이 보였다. 왜 기다리고 있어? 새삼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도로를 끼고 크게 마을을 돌았다. 높은 담장은 우리에게 등을 지고 마을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태양은 등 뒤에서 머리를 넘어 우리의 얼굴을 마주했고, 바람막이 속에 눅진한 땀을 선물로 주었다. 도로를 달리던 차 한 대가 옆에서 속도를 줄이는 게 보였다. 운전자는 고개를 빼내어 쭉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다행히도 우리가 선택한 길이 마을을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길이 맞았나 보다. 그러나 당장에 우리를 기다리는 건 바둑판식 여러 갈래 길이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는 무리를 발견했다. 그들에게 길을 물을 참이었다.


- 저기, 실례합니다.


   그런데 누굴 찾는 거지? 버스에서 내린 중년의 여성들 모두가 한결같이 한 사람을 찾았다. 아, 당신들의 여행을 안내하는 가이드이군요. 가이드는 자신들의 루트에 알베르게가 있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관광객 뒤를 따르는 순례자라. 그 모습을 떠올리니 우습고 정겹다. 여기야, 여기! 숙소 문 앞까지 극진한 안내를 받았다.

   들어간 알베르게 안은 매우 컸다. 한국인 커플이 바로 옆 칸에서 짐을 풀고 있었다. 이제 온 거야? 힘들겠다. 우린 순례를 마치고 자유 여행 때 필요한 짐들을 우체국에 맡기려고. 나는 빨리 씻고 싶었다. 배낭에서 세면도구만 달랑 꺼내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절대 "달랑"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게 되었다. 세면대 앞 남자의 모든 세면도구는 손바닥만 한 주머니 안에 다 들어가고도 남았다. 유비무환이라고들 하지만 사람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나는 잊고 있었다.


   근처에 중국인이 운영하는 슈퍼에서 ‘신라면’을 판다는 소식에 미령은 크게 기뻐했다. 한국에서 항상 먹던 그 맛. 확고한 목표를 설정하고 미령과 나는 길을 나섰다. 그런데 그날따라 축제가 있는 것인지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 것인지 거리는 혼잡스러웠다. 숙소에서 멀어지자 기준점을 놓친 미령은, 신라면에 대한 열의는 활활 타올랐으나 길을 잃고 말았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붙잡고 길을 물었고, 소문의 슈퍼는 아니었지만 다른 곳에서 한국의 맛을 낼만한 음식 재료를 찾아내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저녁식사 메뉴는 고기 육수가 든 얼큰한 라면과 ‘아툰’이라 불리는 생선(Atún, 스페인어로 참치) 통조림으로 결정되었다.

다시 알베르게. 3층 식당에서는 한 바탕 고기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빠에야를 만들어 파티를 열겠다던 바로 그 셰프가 파티의 중심에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령과 나는 빨간색 국물이 끓기를 바라며, 오늘의 메뉴를 만나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본인의 악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한참 길을 설명해준 음악가, 적립 카드에 그려진 로고를 보여주며 새로운 마트를 추천한 주민, 매장 진열대를 정리하느라 바빴지만 끝까지 우리가 찾는 상품의 위치와 재고를 확인해주던 점원 그리고 자기 장바구니는 제쳐두고 처음 들어보는 ‘튜나’라는 생선(Tuna, 영어로 참치)을 찾아 헤매 준 잘생긴 스페인 청년……. 이야기는 “잘생긴” 청년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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