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올려다본 하늘 모양이 달라지다

비 온 뒤 낮 하늘 풍경

by 하이민

봄비


하루 종일 하늘이 궂었다. 시원하게 빗줄기를 뿌리며 봄 마중을 하게 해 줘도 좋을 텐데 희뿌옇게 흐린 하늘은 얄궂게도 봄비 흉내만 어설프게 내고선 그치고 말았다. 아직은 하얀 계절을 보낼 준비를 하지 못했나 보다. 그럼에도 물기를 머금은 공기에 온기 한 점이 담겨 스쳐간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생기가 한 겹 두 겹 더해지며 조심스레 색을 틔운다.


드디어 땅이 기지개를 켠다. 물 한 모금을 겨우 축이고서 벌컥벌컥 봄을 들이켤 준비를 한다. 찬바람에 혹여 봄이 닿기도 전에 움츠러들세라 곱디곱게 젖은 빗길을 낸다. 어느새 바람이 다가와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맞춰 세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돌림노래를 부른다.




우산


비가 온다.


어둡고 칙칙한 공간에 물감이 점점이 떨어져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에 번져간다. 하늘보다 더 무심한 낯을 펼쳐낸 무채색들이 빛을 반사시키듯 빗방울을 튕겨낸다. 그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 면면은 물을 머금고선 울긋불긋한 색을 피워낸다. 그 모양은 꽃처럼 화사하다가 들풀처럼 다채로워진다. 어느 날엔가 보았던 뜻 모를 미술작품처럼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혀있기도 하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면 크고 작고, 투명하고 불투명한 비닐은 비늘이 되어 잔뜩 물빛을 흘린다. 그 이음새를 느슨하게 연결한 거대한 몸통을 꿈틀대며 움직인다. 하늘이 마르기 전까지 축축이 젖은 둥그런 비늘 조각들은 촘촘히 또는 듬성하게 모여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길목을 헤맬 터다.




햇볕


이제는 제법 햇빛이 아닌 햇볕이라는 말을 쓸 만한 날이 되었다. 바람은 서늘할지언정 차갑지 않고, 땅은 부스러지기보단 바스락거리며 빗장을 푼다.


예전보다 한층 높아진 채도를 뽐내는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온다. 청아한 기운을 머금은 햇볕은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단 내일 더욱 다정해질 것이다. 하릴없이 붙잡을 수밖에 없는 따스한 다정함에 하염없는 기다림이 이어진다.


햇볕이 무르익어 타오르는 열감에 데어버리기 전에 이 순간의 다정다감한 온기를 한 숨이라도 더 많이 들이마실 수 있기를.




하늘 구름


투명하리만치 맑은 하늘에 티 한 점 없는 새하얀 구름이 한 데 모여 떠다닌다. 모난 곳 없이 동글동글한 흰 뭉치들이 여유로운 몸짓으로 옅은 하늘색 공터를 느릿느릿 거닐다 슬쩍 뒹굴어도 본다.


커다랗고 자그마한 구름은 파란 공기에 녹아내릴 가벼운 솜사탕이라기 보단 쨍한 하늘을 풍성하고 화려하게 장식하려 짜 놓은 꾸덕한 크림 같다. 소다맛 음료에 생크림 한 움큼을 큼지막하게 떠 조심스레 올려놓으면 저런 몽글몽글한 형태가 되지 않을까.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은 흰색과 어우러져 조금 더 탁한 푸른색으로 물이 든다. 그럼에도 특유의 밝은 색감은 줄어들지 않고 더욱 부드러운 빛을 띠고 두 눈에 박혀 들어온다.




낮잠


한낮에 잠시 드는 쪽잠을 참 좋아한다.


남은 하루를 버텨낼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그냥 하루 중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아볼 수 있는 그 잠깐의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눈 안쪽의 검은 망망대해에 잠겨있다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샛노랗게 달궈진 대낮이 펼쳐진다. 보통 일상의 지루함을 무채색 같은 날이라고 묘사하는데 낮잠을 자고 일어나는 순간의 반전을 겪어보면 그런 지루함이 한층 옅어지곤 한다. 눈을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도 찾아오는 세상의 변화는 다채롭게 느껴질 정도다.


낮이 저물어가는 시간대에 잠에서 깨어나면 또 다른 풍경을 접할 수 있다. 환하게 사위를 밝히던 노랑과 흰 빛은 사그라지고 하늘은 햇살에 덴 자국을 들추며 주홍빛 경계선을 긋는다. 달밤이 가까워오면 주홍빛은 타다 남은 재가 되어 보라색이 뒤섞인 어두운 쪽빛을 두른다.


낮잠에 들면 이런 아름다운 풍광이 나를 기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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