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ewNewyorker May 11. 2020

2020년 20대 남성에게 전하는 꼰대의 전언

평등의 역설과 패배자 인식의 전환 

Divide and rule

코로나 사태가 세계적인 이슈가 된 지 3달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한국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마스크와 방역, 그리고 검사로 남은 지금의 한국 사회는 전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미래의 모습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뉴욕은 오늘 (5월 10일)을 기점으로 처음 도시 봉쇄를 명령했던 3월 10일과 유사한 하루 확진자 570여 명과 하루 사망자 200여 명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전체 사망자가 300여 명이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면 지금 나는 매일 한국의 3개월을 하루로 압축해 살고 있다. 

모두가 방역과 공동체 파괴를 위해 서로에게 눈치보기를 거듭하고 있던 지금의 시점에서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이태원 클럽 코로나 확진자 발생'은 우리 사회가 지난 50일 동안 잠시 잊었던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사건이었다. 

한국이 코로나에서 거둔 승리와 성취감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미국에 10년 넘게 살면서 나 역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자랑스러웠던 적은 많지 않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정확히 50일 전 헬조선의 시대를 걱정했다. 시대를 잘못 앞서 본 '사냥의 시간은' 세계 1등이라는 성취감이 작열하는 대한민국에게는 보고 싶지 않은 과거의 모습일 뿐이었다. 상상력을 발휘해 앞으로 20년 후, 후진국을 면치 못한다는 설정은 더 이상 한국인들이라면 고려하지 않는 미래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헬조선이 우리를 뒤덮었던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자살 세계 1위 국가, OECD 국가 가운데 성평등 하위국, 경제 불평등 심화 국가 등, 거의 대부분의 나쁜 지표에 상위권을 차지하던 국가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패배감과 무력감에 살아가거나, 인플루언서라는 또 다른 계급 분화가 나타나면서 일반인들에게는 가지지 못한 부에 대한 강한 적대감이 더욱 커져갔던 시기이다. 

그래서 이들을 위로하겠다던 지배 세력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저기에 들이밀기 시작했다. 성평등, 경제 평등, 그리고 지역 평등. 이러한 평등이 만들어낸 자리는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가지지 못했지만 많이 가진 이들에게 세금을 물리는 것이 정당하다 생각했고, 지역적인 차별을 받는 자들에게 일종의 혜택을 주는 것은 보상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성평등은? 

우리는 성평등을 이렇게 생각한다. 남성과 여성의 균등한 동일체. 이를 위해서 여성은 억눌렸던 인권을 부활하고 자신의 평등한 가치권을 주장해야 했다. 남성은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에 대한 배려를 통해 평등의 가치를 드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평등을 주창하면서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남성은 깨어있는 지식인이 되었다면 "라테"를 남발하는 개인은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남성, 특히 아버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나라는 세대가 세계사적으로 경험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시기에 존재했다는 점이다. 2000년 초반, 아버지라는 소설은  IMF 이후 무너진 아버지에 대한 권위가 눈물로 확진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 소설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희생, 그리고 남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은 엿보는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나의 아버지는 20대 초반에 어머니를 만나 결혼해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가정을 지키고 계신다. 학업에 대한 열망도 있으셨지만, 가정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신 아버지는 그저 일꾼이길 자청하셨다. 비록 지난 40여 년의 시간 동안 일탈도, 그리고 쉼도 있었지만, 그는 가정을 지키는 한 축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달성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처음으로 친구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어 나를 깨어있는 아버지가 될 수 있게 도와준 분이기도 하다. 

반면 나의 세대에 걸쳐 있는 아버지는 여러 가지 가정 내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집안의 경제적인 도움은 당연한 것이고, 주말이면 아이들을 위해 나들이쯤은 거뜬히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캠핑이 대세인 순간에는 모든 캠핑의 마스터가 되어야 하며, 자전거가 대세인 순간에는 자전거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 그들은 어느 순간 슈퍼맨으로 불리었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서버 맨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충실한 집사로서의 역할을 다 할 때 즈음이면, 이들은 친구와의 술 한잔이 간절해지지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행위가 사회적인 비난의 도구가 되어버린 시점에서는 이마저도 불가능하다. 몰려오는 스트레스를 풀어내기 위해 게임을 하거나 친구들과 스크린 골프장이라도 가려하면, 가족을 소홀하게 하는 아버지라는 낙인이 어딘가에서 날아오게 된다. 동시에, 늙어가는 부모님들에게 자식으로서의 본분을 다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나의 삶 정도는 이미 사라져 있다. 

이들의 자녀로 자라난 지금의 20대는 사실 많은 측면에서 평등의 결과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맞벌이에서 시작된 평등의 구조는 아버지와 주말을, 평일에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경제적인 주도권과 가족의 외부 대표자로서의 막중한 책무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들의 위상은 이들과 유대를 공고히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을 양산해 냈다. 그리고 이들이 바라본 아버지는 어쩌면 가족 식사를 마치고 식당 한편에서 쪼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는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한국 20대 남성들의 보수화를 설명하는 대다수의 사회학자들의 연구에서 우리는 반드시 등장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보수 정권의 그늘이다. 우리가 처음 이해찬 세대라고 놀렸던 그들은 이미 30대에 접어들고 있고, 보수 정권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사회적인 분열을 내면화했다고 분석하는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그들은 완전히 기울어진 평등의 구조를 내면화하면서 패배의식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성의 인권을 향상한다는 명목으로 지금의 20대에게 막중한 희생을 강요해 왔다. 역전된 남녀의 구조는 20대 남성에게는 태어남과 동시에 주홍글씨가 되어 있는 남성의 절대적인 양보 시대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이들이 자신의 권익을 외치는 순간마다 비정상적인 인간이라는 딱지는 그들의 내면에 충분한 반항 심리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나는 지금도, 어린 나의 아이들을 위해 친구 같은 아빠로서 설거지와 음식을 하고, 같이 게임을 하고 있지만, 내 친구와의 연락은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좋은 아빠를 확인받기 위해 끊임없이 109동에 사는 친구 아빠와의 비교를 받아들여야 한다. 왜 하필 그 아빠는 대기업에 다니고, 해외 출장도 자주 가며, 승진도 빠를까? 그리고 그들은 왜 그렇게 쉽게 대출금을 갚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남성으로서의 연대를 전혀 만들어 내지 못했다. 

21세기 초반, 전 세계 문예사조의 전환을 보이는 수다체 방식은 어쩌면 이러한 역전된 남녀평등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여성들의 수다에서 시작된 그들의 단일된 공동체 의식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견고해졌다. 그리고 그러한 견고성은 개방성과 만다면서 다양한 분화를 가지고 왔다. 

반면 한국의 남성들에게는 공동체를 위한 매개, 예를 들어 게임이나, 동호회 등 다양한 주제로서의 매개가 없다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이들은 철저하게 특정 주제에 매몰되는 공동체 이외에 그들의 사회적인 연대로서의 공동체 형성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놓친 20대들의 보수화가 나타난 것은 아닐까? 

N번방이 되었건, 노매드가 되었건, 어떤 방식의 극단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순간의 커뮤니티 형성 기능은 철저하게 20대 남성들을 배재해 왔다. 그들은 스스로 뭉칠 주제를 발견하기 어려웠고, 발견하더라도 존재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하기에는 어려운 그런 상태였다. 결국 우리는 그들에게 그 어떤 사회적 도구도 주지 않은 채 역전된 일상을 이겨 내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그들과 비록 한세대도 채 차이가 나지 않은 나이지만, 나 스스로가 먼저 미안함을 말하고 싶다. 나 역시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에 바빠 누군가와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20대 남성에게는 꼰대가 들려주는 또 다른 라테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로 글을 시작하고 싶다. 


"너희들은 잘못이 없어, 내가, 그리고 우리 전에 단순히 남성으로서의 권위를 누렸던 모든 이들이 너희에게 빚을 지고 있는 거야" 


동시에 우리 사회가 세계 일류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는 그들을 다시 안아 줄 수 있어야 한다. 아직은 어린 그들이 가진 생채기를 잘 안아주고, 어머니의 품처럼, 그리고 삼촌의 츤데레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그들의 성 정체성을 따지고 싶지 않다. 그저 그들이 느끼고 있을 지금의 공포와 인터넷에 떠도는 무수한 비난은 "Divide and rule"이라는 사회 침략 이론가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전해 주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사실 허구에 지나지 않다고 말이다. 그들을 낳은 어머니들은 혼신을 다해 그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또 다른 남성들과의 사랑을 통해 맺어진 결실이라고 말이다. 또한 지금 세계 어딘가에서는 그들의 운명의 단짝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인연이 될 것이라는 풋사랑의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문명을 유지해 왔다. 

우리 모두 한국을, 그리고 인류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유기체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진화의 데이터는 DNA를 통해 다음 세대에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달된 DNA가 다음 세상으로 전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사랑을 만들어 냈고, 지금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는 인정과 사랑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과거로의 회귀는 어쩌면 지금 이 시점에 더 중요한 해결책일 것이라고 믿어 본다. 

작가의 이전글 뉴욕 맛집 투어 (3) - 치즈케이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