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철학의 주요 인물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물론 이 세명도 사상이 약간씩은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국가와 사회와 세계를 다뤘던 인물들인 건 분명하다. 이들이 정의하는 정의는 ‘개인과 국가의 조화와 질서 유지’였는데, 이들은 개인이 자신의 본분에 충실할 때 비로소 사회 전체의 질서와 조화가 유지된다는 주장이었다. 플라톤은 국가라는 책을 통해 정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탐구한 인물이고, 정의로운 사회는 지배자, 수호자, 생산자 등의 각 계층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정의가 성립된다고 했으며,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각 개인은 자신이 수행한 일에 대해 공평하게 보상을 분배받아야 한다고 말했듯이, 어쨌든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핵심은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자였다.
그리고 인류사 전반적으로 다양한 전쟁과 역사적 변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철학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바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등장이다.
이것에 대한 내용은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긴 한데,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다른 말로 하자면 국가는 모든 순간에 최소한의 개입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즉, 나는 오토바이를 탈 때 헬멧을 착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국가가 개입해서 범칙금을 매겨선 안된다는 것이고, 내가 내 신체 일부를 타인에게 매매할 때, 그것에 윤리적인 잣대를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국가가 개입하는 순간 그것은 나의 소유에 대한 약탈이며, 나의 권리에 대한 침해로 간주하는 거다. 나는 내 의지에 따라 성을 매매할 수도 있고, 나의 의지에 따라 대리 출산을 할 수도 있으며, 역시 내 개인 의지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지 않을 권한이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게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이것을 곧 자유라고 정의한다. 물론 근대 철학의 큰 영향을 끼친 칸트의 경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며 오히려 욕망에 지배를 당해 내가 끌려가는 것이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차별 금지법의 성격이 바로 이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주장과 아주 비슷하게 닮아 있다는 점'이다.
차별 금지법에는 개별적 차별 금지법과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있는데, 우선 개별적 차별 금지법은 특정 영역이나 분야에서만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다. 고용주와 직원의 관계, 교육적 혜택에 의한 차별, 주거 환경 등에 대해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인데 이런 차별은 사실 사회적으로 명백히 문제가 되고, 역사는 이런 차별에 저항하며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포괄적 차별 금지법은 그보다 더 넓은 영역의 차별에 금지 조항을 적용하려는 법안이다. 예를 들어 성별,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성 정체성 등 다양한 범위에서 차별에 저항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오토바이를 탈 때 헬멧을 쓰지 않음으로 인해 경찰이 이를 저지한다면 이 들은 이것을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여긴다. 내 신체는 내 것이기 때문에 사고가 나서 훼손이 된다 하더라도 결국 내 몫인 거지 당신 또는 기관 또는 국가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면 비슷한 상황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헬멧을 쓰지 않는 건 내 개인의 의지인데, 지금 제 의중을 무시하는 건가요? 제 의지를 차별하시는 건가요?"라고 말이다. 물론, 자유지상주의와 포괄적 차별 금지법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놓고 보면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전자든 후자든 주장의 결론은 같다.
당신은 (국가는) 나를 판단할 (처벌할) 권리가 없다. 는 거다. 그야말로 법이 필요가 없어지는 세상이 돼버리는 거다.
인류 최초의 헌법은 프랑스혁명 때 제정이 되었다. 그동안 왕이라는 강력한 통치자 한 명이 백성을 다스리는 구조였는데 거기서 불만을 갖고 있던 평민 세력이 봉기를 일으켜서 귀족들과 심지어 프랑스 국왕,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왕비까지 처형시키는 대담한 사건이 바로 프랑스혁명이다. 이때 평민 세력이 헌법을 제정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들이 차별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법의 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써놓을 정도다. 그런데, 물론 내가 프랑스혁명을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평민은 정말 누가 보더라도 객관적인 입장으로 그들의 처지를 보더라도 그들은 평등하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국가의 재정이 펑크가 나 있는 상황인데 세금은 평민한테만 걷고, 귀족은 그러거나 말거나 잘 먹고 잘 살고 있고, 또한 프랑스의 주식은 빵이었고 평민들은 그 빵 하나 사 먹을 돈이 없어서 굶고 있으며 심지어 정말 가난한 평민들의 자녀들은 길에서 객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데, 프랑스의 귀족이라는 사람들은 가발을 더 하얗게 만들기 위해 그 가발 위에 밀가루를 뿌렸으니. 평민들 입장에선 눈이 돌아갈 만했을 것이다. 저 들이 저렇게 낭비하는 밀가루를 조금이라도 우리가 가져올 수 있으면 이렇게 굶어 죽는 일은 없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을 단행한다. 우리가 최소한으로 먹고살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도 부여하라. 고 말이다.
그런데 포괄적 차별 금지법을 한번 보면, 앞서 내가 예시를 든 프랑스혁명과 비슷하면서도 또 상당히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들이 평등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좀 더 쉬운 예로, 나는 남성이지만 남성과 길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싶다고 느꼈을 때, 그 당사자는 충분히 그런 욕구를 느낄 수 있지만 그 길을 지나가며 그 광경을 바라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괄적 차별 금지법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지금 나의 성 정체성을 차별하는 건가요?" 물론, 이런 부연 설명을 곁들여 말이다. "지금 소수라고 무시하는 건가요? 소수라고 정당한 대우를 못 받는 건가요?"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주장에 감정이 개입되면 그건 호소에 불과하다. 소수라서 무시하는 거냐라는 발언 이면엔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요소도 포함되어 있고, 약자는 언제나 정의롭다는 편견 또한 포함되어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객관적으로 상황을 따져 보면 스스로 차별받는다고 느끼는 본인의 감정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는 다수의 감정 역시 고려 대상에 포함시켜야 비로소 평등해지지 않을까? 왜 소수의 입장은 법이 새로 제정되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줘야 하고, 그 법으로 인한 다수의 불편함은 고려되지 못하는가? 이런 딜레마적 사안에 대해, 과연 어떤 것이 정의로운 판단인지 사법부는 정의 내릴 수 있겠는가?
이렇게까지만 얘기하면, 이거 완전 공리주의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는데, 공리주의란 제러미 벤담 주장한 사회 정의론으로서, 절대다수 최대 행복이다. 예를 들어, 소수가 희생돼도 다수가 행복하다고 계산이 된다면 다수의 행복적 이익을 위해 소수는 희생하는 게 맞다는 논리인 거다. 이후 존 밀이 양적으로만 행복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질 적인 행복의 척도 또한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긴 했지만, 어쨌든 공리주의는 큰 맥락에서 보자면 소수의 희생이다. 다시 길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동성 커플로 예로 들어보자. 공리주의 사상에 빗대어 보면, 길에서 대놓고 벌이는 동성 커플의 애정행각으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이 불쾌감을 겪었다면 그건 공리주의 사상에 어긋나는 것이다. 공리주의 기준에 의해서 그 동성 커플은 제지를 당하고 어떤 행위에 의한 처벌이 이뤄져야 맞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동성 커플은 차별 금지를 주장하며 오히려 사법권한에 반기를 든다. 왜 우리 소수를 무시하고 차별하냐며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소수를 향해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있다. 공리주의는 다수를 위해 소수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예를 들어 길에 노숙자가 많으면 사람들이 불쾌해하니까 그 노숙자들은 강제로 이주를 당하거나 구빈원이란 시설에 강제 수용돼야 하는 점 등) 주의이지만, 대한민국 사회는 소수에게 어떤 희생을 강요하진 않는다. 지금 눈앞에 동성애 커플이 있다 해서 헌법으로 그들을 강제 이주시키거나, 그들에게 강제로 길에 나오지 말라고 명령을 하거나, 강제로 어떤 조치를 취하는 법 제도가 단 하나도 없다는 거다. 그러니 이건 엄연히 공리주의 적 사상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본인들이 마치 다수에 의한 사회적 제물이 된 것처럼, 어떠한 희생양이 된 것처럼 주장을 하고 있다. 바로 그런 점으로 인해 차별 금지에 대한 법이 발의까지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유튜브에서 한때 정말 큰 인기를 끌었던 영상. 가짜 사나이라고 다들 알 것이다. 이때 이근 대위가 한 명대사가 있는데 "4번은 개인주의야. 4번은 자기 자신밖에 몰라"라는 대사다. 물론 이근 대위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 왔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대사를 했을 것인데, 엄연히 따지자면 영상 속 4번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에 해당한다. 만약 여럿이 힘을 모아 보트를 들어 올려야 하는 군사적 훈련을 받고 있을 때, 단순히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팔을 놓아 버리면 그 보트를 받치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더 힘든 상황이 된다. 누군가 손을 놓아 버린 만큼 거기 비례해서 나에게 가중되는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질 테니 말이다. 이근 대위는 이런 모습을 보고 4번은 개인주의야라고 했던 거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런 상황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야라고 해아 올바른 표현이다. 왜? 나로 인해 다수가 피해를 봤으니까
개인주의는 나 자신밖에 모르긴 하지만 철저히 개인적 관점에서 세상과 접촉하기 때문에 타인과 상호작용 자체를 거부하며, 역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걸 극도로 혐오하는 주의이다. 나 좋자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진 않는 단 거다. 반대로 이기주의는 오직 나 밖에 모르는 거다. 즉 나에게 유익이 되면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든 말든 나는 상관 안 한다 이거다. 이것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포괄적 차별 금지를 옹호하는 입장은 철저히 이기주의적 사상을 가진 이들이다. 이들은 나의 어떤 주장.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그 권리)로 인해, 절대다수가 피해를 보든 말든 그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이들은 오직 그 순간에 느끼는 나의 권리만 따진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느낄 감정이 나에게 유익하냐 아니면 불편하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지금 상황에서 여성들이 있는 목욕탕에 남성이 버젓이 들어가는 행위는 범법 행위이고 처벌 대상이다. 그런데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면, 나는 이 순간 나라는 존재를 여성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차별이다.
그럼 나는 여성 목욕탕을 들어가도 된다. 나는 그곳에서 옷 벗고 샤워하고 비누칠하고 다 할 수 있다. 심지어 졸리다는 이유로 사우나실에서 잠깐 누워서 잠도 잘 수 있다. 왜? 나는 방금 나 자신을 여성으로 규정했으니까... 이거에 대해 기존처럼 누군가 신고를 하려 하면, 그건 차별에 해당한다. 내가 나를 여성으로 규정했는데 네가 나의 의중을 무시해? 바로 이거다. "너 나 무시해?" 다시 말하지만 무시 아니다. 한 사람의 이기적 행동으로 인해 다수가 피해를 보고 있는 거뿐이다.
문제는 이런 차별 금지법이 악용될 수 있다는 거다. 의도했던 그러지 않았든, 악의적인 목적으로 이 법을 요리조리 주무르며 평소 내가 싫어하던 대상 또는 단체에게 이 법을 휘두를 수 있다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오늘 심심해서 교회를 갔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설교를 유심히 듣는다. 이때 내가 찾는 부분은 딱 1가지이다. '세상에서 유일한 신은 하나님뿐입니다.'라는 문구가 나올 때까지 설교를 유심히 듣는 거다. 그러다 설교 중간 즈음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번쩍 손을 들고 말한다. "나는 내가 믿는 별도의 신이 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나에게 유일한 신은 하나님이라고 했다. 이건 내가 믿는 신에 대한 모독이며 차별이다."라고 말이다. 물론 교회에서 설교를 듣던 대 다수의 사람들은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불쾌해한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주장하는 건 내 의중이 무시당하고 차별 대우받았다. 그거 하나뿐이기니까.. 그렇게 목회자에 대한 신고가 들어간다. 여기서 재미를 느낀 나는 이제 전국의 모든 교회를 찾아다니며 교회를 파괴하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물론 아주 극단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고 그렇다는 건 안 일어난다 보장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특히 교회 같은 공동체는 베타성이 짙다. 유일한 신을 믿는 공동체이고, 타 종교의 신에 대해선 이단으로 규정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차별 금지법에 대해 교회에서 더 크게 반응을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회는 타 종교의 인정이 두려워서 차별 금지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지금 잘 믿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악의적인 고소 고발이 남발하게 될까 봐 그게 염려가 되는 것이다.
차별 금지법은 2020년 6월 29일. 장혜영 의원 외 10인으로 구성된 인원으로부터 발의가 되었다. 법 제안 사유는 아래와 같다.
여기서 주장하는 게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건 또 다른 문제다. 예를 들어 신체에 불편함이 있어 대중교통을 제때 이용하지 못하는 건 다수가 인정하는 사회적 약자가 맞다. 하지만 나는 제7의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왜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거야?라고 혼자 울부짖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 역시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적 약자는 절대다수가 인정하는, 누가 봐도 그럴싸한 약자의 위치에서 생활하는 사람.라고 하면, 이렇게 또 다른 성 정체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다수로부터 약자로서 인정받지 않을 가능성도 있을 텐데. 그럼 이런 사람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지 않을까? 쉽게 말해서, 개인의 요구사항 안 들어준다 고소 고발할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그것이 정말 모두에게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냐는 거다. 이 법은 잘 살펴보면, 소수의 사회적 약자를 돕겠다는 법안보다는, 소수의 사회적 약자라고 호소하는 이들만을 위해 다수가 피해를 봐야 하는 법안에 가깝다. 자칫 잘못하다간 네가 나 고소했으니 그럼 나도 차별받은 거다. 나도 너 고소한다. 서로가 서로 고소하며 고발해 버리는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한 개인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부여해 주려고 애쓰기보단, 국가 차원에서 강하게 규제할 수 있는 부분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면 그것이 자유롭고 평등한 거 같지만 오히려 질서만 파괴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투닥거리며 싸워온 형제가 있다. 이 둘은 서로 장성하게 커서 성인이 된 다음 이들은 지난날 오지게 싸워왔던 과거를 반성하고 참회의 의미로 둘은 결혼을 하기로 한다. 더 이상 형제가 아니라 부부로 불러 달라고 말한다. 자녀들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길 바랐던 부모는 이 말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인 줄 알고 장난치지 말라 했더니, 뒤이어 형제 중 한 명이 이렇게 말을 한다. 지금 우리의 의중을 차별하는 겁니까?라고 말이다. 끔찍한 일 같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 없는 없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말싸움에 이기기 위해 헌법 소환을 툭하면 하는 법치국가에서 말이다.
물론 본 글에서 든 예시는 아주 극단적인 예시이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확률은 아주 낮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적은 확률 속에서 피어난 작은 움직임이 한 국가를 뒤흔들 정도로 큰 태풍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