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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여행

마음도 몸도 느리게

by 커피중독자의하루

말이 일주일이지 비행기에서 오가는 시간을 빼면 4박 5일이었다. 내 평생 이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고, 갑자기 해외에서 통증이 심해질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온 여행이니 무언가는 건져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느린 여행을 하기로 했다. 느린 여행이란 몸으로는 파리근교만 천천히 여행하고, 마음으로는 짧은 기간 동안 사람들과 급속도로 친해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미 아픈 몸을 고려해서 파리근교만 천천히 둘러보는 패키지를 선택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위한 느린 여행이었다. 과거의 나는 누가 뭘 하자고 하면 하기 싫어도 ‘그래 그러자.’ 라거나 할 일이 많아도 ‘부탁한다.’라는 말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래, 내가 좀 더 힘내보자’하며 순응하며 살아오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되짚어보니 이번 여행은 다르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세 미술관 그림들 모네, 르누아르.
좌 오르세 미술관, 우 베르사유
좌 오르세 미술관 우 베르사유
베르사유
오르세 미술관
베르사유

낯선 곳에 가면 같은 일행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쉽게 정이 들기 마련이다. 아침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하루 종일, 처음 보는 아름답고 감탄스러운 풍경과 경험들을 함께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생기기 때문이다.


나의 패키지여행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때마다 나는 누가 내 사적인 정보를 물으면 묻는 대로 다 대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사적인 정보 공유가 시작되면 여행은 더 이상 나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몇 살의 무슨 일 하는 어디 사는 누구가 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자유로운 여행자가 아닌 또 다른 사회인이 되어야 했다. 여러 번의 패키지여행 중 가장 즐거웠을 때는 일행 모두가 서로 국적이 달라서 언어 장벽으로 인해 순수하게 여행 일정만 함께 했을 때였다. ‘나’라는 사람은 누구누구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 함께할 때 가장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서로 이메일과 전화번호교환을 하였다. 그렇게 교환한 정보로 여행이 끝난 후, 두어 번 연락을 하긴 했지만, 바쁘게 살다 보니 잊혔고, 실질적인 교류 없이 추억으로만 남았다. 그때는 건강하고, 활기에 찬 젊은 시절이었는데도 꾸준한 연락을 못 했는데 몸도 아픈 지금, 연락처를 교환한들 꾸준한 연락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의 기분에 취해 개인정보를 교환하고 연락처를 주고받는 것은, 마치 야시장에서 필요는 없지만 예쁜 장식품을 사서 하루 이틀 즐거워하다가 자리만 차지하게 되어 결국 버리게 되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만큼은 '사적인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세웠다. 상대방의 상황보다 나의 마음과 몸을 먼저 고려해 보기로 한 것이다.


나의 이 결심은 잘 지켜질 수 있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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