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재나 Nov 12. 2019

82년생 김지영(1)

- [82년생 김지영]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2년 전쯤 읽었을 때 참 똑똑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고 다시 책을 읽었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 경험과 합치되는 지점이 여러 군데 있었다. 특히 며느리로서 시댁과의 관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1. 명절 장면 #1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고 오후에 아버지를 뵙기 위해 출발하고 나서 난 통곡하고 있었다.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명절날마다 혼자 계실 아빠가, 잠깐 들렸다가 다시 경기도로 가야 하기에 그 해는 추석 당일에 시댁을 나왔다. 차를 타는 나에게 당시 시어머니는 “다시 근처로 오면 명절날 친정 갈 생각은 하지 마라” 대구가 친정이니, 평소에 친정아버지를 뵐 수 있으니 명절에는 울산인 시댁에 계속 있으라는 말이었다. 나도 친정에 가기 싫었다. 친정이라고 해봐야 나에게 밥 한 끼 차려줄 사람 없는 친정이었다. 친정에 가서 나는 또 아버지의 밥을 챙겨야 했다. 그래도 시누들이 다 와서 웃고 떠드는 시댁엔 더 있고 싶지 않았다. 그마저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난 그저 명절 내내 붙박이처럼 시댁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땐, 왜 친정 갈 시간에 친구라도 만나겠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2. 명절 장면 #2          

 시어머니는 음식 욕심이 많은 분이었다. 가짓수도 많아야 했고 양도 많아야 했다. 여자지만 남성 가부장의 선두에 있는 분이었다. 명절과 제사 전날엔 하루 종일 음식을 다듬고 굽고 튀기고를 반복했다. 나중에 발바닥이 따가워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쪽잠이 들었다가 내가 맞춰 놓은 알람보다 더 이른 시간에 부엌에서 시어머니가 움직이는 소리에 잠을 깨워야 했다. 억지로 일어나서 늦게 일어난 것을 사과하고(늦지 않았다. 단지 시어머니보다 늦게 일어났을 뿐) 제사 지낼 준비를 해야 했다. 제사 장 보는 것도 음식 하는 것도 다 며느리의 일인데 자신이 하는 것처럼 시어머니는 행동하고 말했고 나 또한 내가 할 일을 하는 시어머니께 항상 고맙다 죄송하다고 해야 했다. 본 적도 없는 둘째 할머니를 그렇게 섬겼다.                     


3. 둘째를 가지고 다가온 명절     

  제사는 설 5일 전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유배생활이었다. 무조건 시댁에 일주일 있어야 했다. 감금생활이 따로 없었다. 제사가 다가오면 온몸이 알고 두통과 무기력, 짜증이 나를 지배했다. 하루 종일 밥하고 설거지했다. 일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나 스스로 나의 하루를, 내가 할 일을 계획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 틈틈이 읽었지만 그 일주일은 지옥이었다. 나에겐 자유가 없었다. 둘째를 가지고 하혈을 해서 안정화될 때까지 한 달 정도를 집에서 누워 있어야 했다. 그 해 설, 남편은 제사는 안 가도 되지만 명절엔 가야 된다고 했다. 밑으로 약간의 하혈을 하던 중이던 나는 시댁에 가서 일을 했다. 둘째는 무사히 태어났지만 그때 다시 아이를 잃었다면, 가지 않겠다고 말하지 못한 나를 두고두고 탓하고 원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를 낳고 한 달도 되기 전에 찾아온 추석. 난 또 음식 하러 시댁에 갔다. 누구 하나 가지 말라고 말려준 사람이 없었다. 아빠밖에 없는 가난한 친정을 가진 나는 시댁에서 오라면 가야 했다.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을까?                     


4. 아들에게 받아야 할 사과도 며느리 몫          

 첫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시댁에서 했다. 조리원에 갈 돈도 없었고 산후조리를 해 줄 사람도 없었다. 음식점을 하는 시댁도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첫아이를 낳았다. 아이 아빠는 아직 학생이라 주말에만 내려올 수 있었다. 아이를 낳고 첫째 주 주말, 그 날은 시어른 두 분이 심하게 싸운 날이었다. 자라면서 계속 가정불화를 겪어야 했던 아이 아빠는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두 분의 싸움을 눈치채고, 가게에 들리지 않고 딸만 보고 다시 대구로 갔다. 그걸 안 시어른은 화를 냈고 몸을 푼 지 일주일 정도 된 나는 무릎을 꿇고 빌어야 했다. 억울하고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그 상황에서. 그 집을 나갈 수도 없는 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일은 두고두고 가슴의 응어리로 남았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5.  딸을 낳았을 때, 자신처럼 아들 낳기까지 넷까지는 낳아야 된다고 당당히 요구하던 시어머니     

 아이들 아빠는 위로 누나만 셋이다. 아들 낳기 위해 네 명의 자식을 낳은 것이다.  그 집안은 아들 선호 사상은 유별났다. 만약 아들이 없었다면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았을 공부머리가 있는 세 명의 누나는, 공부 잘하는 남동생에게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일찍부터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첫째 딸을 낳고 둘째는 아들이길 간절히 바랬다. 스트레스가 많은 시댁과의 관계에서 아들 스트레스까지 더해진다면 내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고 부끄럽지만 절에 가서도 빌고 용하다는 돌할매한테 가서도 빌었다. 아들 낳게 해 달라고. 그런 과거의 나, 초라하고 불쌍하다.          

 

 시댁 어른들도 이상한 분들이 아니었다. 누구에겐 좋은 이웃이었고 동료였다. 합리적이라고 본인들을 생각하시리라. 그러나 며느리인 나를 대하는 태도는 불합리했다. 이런 불합리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잘못된 효문화와 남성 가부장제의 문제이고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여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까지 강자의 자리에 있었던 남성들, 특히 남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된다. 며느리가 혼자 내는 소리는 자기 역할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 장강명 씨와 부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소설을 읽지 않고도 그의 팬이 되었다. 모든 남성이 장강명 작가처럼 행동할 수 없겠지만 그런 생각이라도 가져야 되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나도 맘충이었을까?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