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법인 강남구 70+라운지. 집에서 5분도 안 걸린다. 영어회화 갤럭시드로잉 연필화 도자기 등 취미생활을 접하기 좋아 회원으로 등록했다. 가심비 그득한 북까페 공간에서는 음료도 반값이다. 동네분들과도 소통의 기회가 넓어졌다. 소중한 것이 가까이 있음을 실감한다. 무료인데도 수업내용이 진지하고 운영도 깔끔하다.
6개월 전 '사인펜 수채화'반에 신청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림에 대해 바라보는 데만 머물렀지 그려보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소싯적에 바람결처럼 듣던 '가난한 환쟁이'라는 비하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취직하고 아파트평수 늘리는 게 인생의 목표였던 지난 시절을 회상하면 아이러니하다. 늘 책상 위에 있던 사인펜으로도 수채화가 그려진다니 부담이 없다.
색을 입힌 곳에 물붓으로 눌러주면 물 번짐으로 수채화가 된다. 색들이 합쳐지면서 예상치 못한 색감에 신기했다. 여백으로도 그림의 일부가 되는 것을 알았을 때는 헬렌켈러가 보였다. 어린 헬렌이 펌프로 퍼올린 물을 만지게 하고 설리반선생이 손바닥에 써준 'Water'라는 의미에 느꼈을 환희였다.
"오늘 꽃다발은 순식간에 그려낼 수 있어 기쁘다. 지난주 커피잔 그릴 때 나머지 공부까지 해야 했던 스케치에서 과감할 수 있었던 게 비결이었을까. a piece of cake! ㅍㅎㅎ"
스스로 대견해 페이스북에 글과 그림을 올렸다. 솜씨랄 것도 없는데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 마음이 전해졌을까? 다른 친구가 어반 스케치를 습작이라고 올리고 나날이 발전하는 것을 보고 재능의 차이를 깨닫게도 되었다. 감수할 만한 인내심도 재능에 포함되는가. 강사는 엉덩이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는 노력의 차이라고 했다.
마카롱을 다시 그린다. 지난 시간에 놓친 강사의 주의사항이 뼈아프다. 테두리선은 유성펜으로 그려야 한다는 지침만 준수한다면 더 나은 그림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실패를 겪어보아야만 제대로 깨닫는 줄, 나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강사는 내가 시행착오를 하고 난 뒤에야 한 가지씩 가르쳐준다. 지난번 그린 마카롱이 조개 같다며 관장이 진지한 농을 걸어주는 게 감사하다. 두 번째 하는 연필 스케치는 자신이 붙었다. 곡선도 부드러워지고 구도를 나누는 데도 익숙해졌다. 물 번짐을 막을 테두리선을 그리려고 가느다란 유성펜도 하나 샀다. 지난 습작시간에 알게 되었던 반성들, 수성펜으로 색을 듬성듬성 채워 넣는 일과 물붓으로 문질러대는 과오를 하지 않는다면 먼저 보다 나을 것이다.
적당한 건조시간 간격을 생각하며 물감의 지저분한 혼합을 피해야 한다. 샘플과 똑같은 펜을 찾는 시간이 더디긴 했지만 두려운 마음은 없어 충분히 색을 채워 넣었다. 이번에는 너무 빽빽이 칠했다. 물붓을 대니 색은 더 진해졌다. 강사는 마카롱이 너무 진하면 맛없어 보인다고 했다. 나의 마카롱은 마치 색소만 잔뜩 넣은 불량식품 같았다. 초록색이 너무 진했던지 보다 못한 강사는 물붓으로 연하게 하며 휴지로 닦았다. 캔버스 위에서 마카롱이 맛깔나게 고와졌다. 그림이 이런 식으로 보수(補修)된다는 사실에 희망을 보았다. 스스로 깨치기에는 재능이 없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서 전진해 갈 수 있다는 희망, 캔버스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강남구와 봉은사가 모범적인 전형을 보여주고 있어 관장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관장의 머릿속에는 AI의 시중을 받는 노인의 모습이 선명해 보였다. 젊은이들도 음료를 테이크아웃하며 시니어 공간을 느낄 수 있는 넉넉함은 신노년 카페의 신지평을 여는 듯 흐뭇하다. 길 건너 할리스 커피숍에서와는 정반대인 느낌도 든다. '좋은 동네에 사니까 좋겠다'는 부러움을 표하는 분들의 말씀 속에서 여건이 다른 지자체별로 생각들도 다양하겠지만 모델을 제시하는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면 싶다.
한 번이라도 경험하는 일이야말로 무한한 상상을 꿈꾸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기회를 부여했더라면 싶었다. 진즉 그림을 그렸더라면 내 안의 나를 빨리 알아내고는 타협점을 찾았을 것만 같았다. 무료였기 때문에 우연히 시작한 펜 수채화가 아니었던가? '무료'가 건네주는 신기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공짜 좋아해서 놓친 기회는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었을지 알듯 말듯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