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내가 사랑한 화가들>

정우철 도슨트가 건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다독다독 린

살다 보면 한동안 마음이 흔들리는 시기가 있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현실의 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기도 하고,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잘 걷고 있다고 믿고 싶으면서도 자꾸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날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마음에 조용히 손을 내밀어 다독여 주는 책이 있다면, 정우철 도슨트의 《내가 사랑한 화가들》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은 그림을 해석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작품을 잘 감상하도록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화가들의 삶을 따라가며 지금의 나를 비춰보게 만드는 책이다.


무엇보다 특별한 점은 화가들을 대단한 사람으로 끌어올려 놓는 대신, 그들이 겪어낸 상처와 선택, 고민의 결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샤갈, 마티스, 클림트처럼 익숙한 이름부터 알폰스 무하, 에곤 실레처럼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작가들까지 등장하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핵심은 명성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내고 창작해 온 그들의 여정이다. 작품 뒤편의 고비와 선택을 함께 읽어내는 순간, 예술은 어려운 대상이 아니라 결국 우리 모두의 삶과 이어진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을 사로잡았던 화가는 베르나르 뷔페였다. 정우철 도슨트에게도 유난히 의미 있는 화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시대가 원하는 감각과 독창적인 표현 방식으로 데뷔하자마자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그는, 1960년대 들어 비평가들의 따돌림 속에서 명성이 급격히 추락했다. 그럼에도 뷔페는 붓을 놓지 않았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의 예술을 붙들며 살아냈던 사람. 그는 자신의 삶을 작은 배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한 척의 작은 배와 같다. 파도는 계속해서 덮쳐오고 또 밀려가기를 반복한다. 나는 그 파도에 휩쓸려 때로는 부딪치고 다시 일어나면서 간신히 조종간을 잡고 있다." p266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뷔페의 삶은 더 이상 한 예술가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파도가 밀려오고, 그 파도에 휩쓸렸다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끝없이 반복된다. 뷔페가 말한 ‘작은 배’는 결국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흔들려도 조종간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 다시 밀려도 다시 서보려는 마음. 그의 고백을 읽고 있으면 그가 지켜온 일상이, 열정이 조용히 전해져 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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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페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먼저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스며든다. 단단하게 그어진 검은 선, 숨을 꾹 눌러 담은 듯한 얼굴들. 그의 세계는 언제나 조금 황량했지만, 그 속에서 뜻밖의 따스함을 품고 있는 작품을 하나 만나게 된다. 바로 ‘유언장 정물화’다. 이 작품은 결혼 몇 해 뒤, 뷔페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내에게 남기겠다는 유언장을 그림 속에 적어 넣은 정물화다. 화면 아래쪽에는 유화 물감이 그대로 묻은 그의 지문이 찍혀 있는데 이는 마치 그림이라는 형식을 빌려 남긴 아주 개인적이고도 조용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2019년, 그의 사망 20주년을 기념해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르나르 뷔페전>에서도 이 작품은 특히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전시 엽서가 가장 먼저 매진될 만큼 많은 이들이 이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아마도 한 사람을 향해 남긴 그 진심이 관람객의 마음에 그대로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많은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고통과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듯 보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빚어내느냐에 있었다. 책 속 화가들은 흔들렸던 순간마다 자신을 다시 세우며 앞으로 걸어갔고, 그런 삶의 선택들이 오늘까지 마음을 울리는 작품으로 남았다.

정우철 도슨트가 화가들의 삶에서 발견한 공통점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거운 순간에도 붓을 놓지 않았고, 주저앉고 싶은 날에도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딘 사람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자연스레 이런 질문이 남는다. 내 삶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가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가.


《내가 사랑한 화가들》을 읽으며 그림을 해석하기보다는 인생을 마주하는 법을 조금씩 배웠다. 화가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림이 깊어지고, 그 깊어진 그림을 들여다보면 어느새 나의 삶도 더 또렷해진다. 예술은 결국 인간의 흔들림과 버팀을 담아내는 일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게 되면서, 다음으로 펼치게 될 정우철 작가의《화가가 사랑한 파리》가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