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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필 Sep 30. 2018

도시이야기 - 부산

빵필의 도시이야기 (부산)

특정 지역으로 여행을 갈 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그 지역의 먹거리와 놀거리다.

여행을 계획하거나 경험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누구와 함께, 누구를 만나서 어떠한 추억을 쌓게될 것인가.'지 역사나 문화에 신경을 집중시켜 여행과 배움을 병행하는 젊은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와 문화가 지역방문을 위해 알아두어야 할 필수정보였다면, 학창시절 사회과목에 골머리를 앓았던 이들에게 여행은 달콤하지만 시원하지는 않은 미지근한 사이다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한 달에 한 두번꼴로 영화나 독서를 즐긴다.

그리고 자기만의 해석을 가지고 작품을 이해하며, 가끔은 카페에 앉아 친구들 혹은 인터넷에서 작품 분석의 글을 보며 우리는 점심에 보았던 영상의 마디마디를 곱씹으며 새로운 해석에 눈을 뜬다.

글이나 영상에 담긴 의미, 그 것은 작품을 보기 전에 아는 것보다 보고 난 후에 알게 되는 것이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도시의 역사와 문화도 마찬가지다.

여행을 가기 전, 모든 것을 알아두면 물론 좋겠지만 머리와 마음속에 여유공간을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을 너무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여행 전보다는 가끔은 여행을 감상한 뒤에 추억을 되감아보며 정리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예컨데 수학여행에 지나쳤던 석빙고가 대류를 이해해야 만들 수 있는 과학적인 얼음 창고라던지,

포석정에서는 시를 늦게 읇으면 술은 마시는 벌칙을 당해야했다던지 하는 정보는 다녀온 뒤에 습득해도 그 이해력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시절의 풍경과 온도를 추억하는데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나는 보통 사람들이 영화라는 하나의 작품을 감상한 뒤 리뷰를 검색해보듯, 여행을 즐긴 뒤 나의 글을 읽음으로써 새로운 해석에 눈을 뜨길 바란다.

여행 전보다는 여행 후 읽기 쉬운 글을 접하며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 영화감상 전보다는 감상 후에 리뷰는 보는 것처럼 더 개인에게 가치있게 와닿길 바라며 꾸준하게 포스팅할 것을 다짐해본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 매거진이 영화의 리뷰와 같은 글처럼 독자분들에게 기억되길 바란다.


부산의 야경


부산의 과거



부산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1481년 동국여지승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부산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근처)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입니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이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는 부산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 후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부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빨간 점선 안에 있는 산이 부산의 유래로 추정되는 가마꼴 산인 증산과 자성대.



삼한시대 부산은 거칠삼국이라는 소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후 신라와 가야 사이의 영토분쟁지역이 되었다가 가야가 고구려에 의해 패망한 뒤,

신라의 국토에 편입된다.

이후 여러 차례 지명이 변화하고 지역이 나뉘었던 부산.

역사 속에서 부산의 본격적인 등장은 바다 건너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남긴 가슴아픈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



조선시대 부산은 동래군의 일부였다.

동래군은 이후 동래현, 동래도호부로 불리웠는데 일제 강점기사 시작되는 1910년까지 현재의 부산지역은 동래군에 속했다.

동래군, 즉 부산은 임진왜란과 함께 역사교과서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순신이 등장하기 전의 시기이기에 그 사건의 전말은 참혹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부산에는 전쟁이 시작될 것 같은 이상 징후가 느껴졌다.

왜관의 일본인들이 황급히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떠나자 부산을 지키는 병력들은 성 주변에 나무를 심고 성벽 근처에는 마름쇠(적의 침입을 지연시키는 함정계통의 쇠조각)를 깔아 놓았다.

당시 동래성은 송상현이라는 동래부사가 용감하게 3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2만여명의 일본의 선봉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병력의 대부분은 현재의 한국군처럼 최전방 전선구축에 전력을 쏟아붓고 있었으며,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총을 막을 대안을 전혀 마련하지 못했다.


병력의 열세를 잘 알고 있던 송상현에게 일본 선봉대 장수 고시니는 아래와 같은 나무판을 보여주지만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 이에 송상현은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라는 답을 하며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일본군이 조선의 병력을 압도한 이유는 하나가 더 있는데 그 것은 바로 경험의 차이다.

수 많은 내전을 겪고 단련된 일본군은 섬나라 호랑이와도 같았다.

20일도 되지 않아 일본군은 부산을 상주, 한강 방어진을 연이어 무너뜨리며 한양을 함락시켰다.

조선 최고의 장군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적에게 밀리자 남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하지만 수군을 달랐다.

당시 일본인들은 바다에 둘러싸인 육지인으로 살아왔다.

그들은 해전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으며 수군과 육군으로 병력이 나뉘어져있긴 하였으나 그 역할은 거의 비슷했다.

일본인 학자는 덕부저일랑은 당시 일본 수군을 이렇게 표현했다.

'당시의 일본인들은 섬나라 사람이란 것뿐 바다를 거의 모르고 있었고, 해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었으므로 임란 해전에서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들은 거의 완전한 육상동물이었다. 그들은 호랑이를 물속에 던져놓은 것과 같은 모양이 되어 해전에서는 능력의 십분의 일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조선통신사 기록물


임진왜란이 끝나고 부산은 통신사가 출항하는 전진기지와 무역항의 역할을 하였다.

거리상으로는 일본과 가까웠으나 청나라와도 많은 거래를 하는 해상무역의 중심지의 면모를 과시하였으며

조선 후기부터 국제항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일본의 사신은 청나라의 사신과는 달리 서울을 방문할 수 없었으며 오직 부산에만 머무를 수 있었는데 이는 임진왜란이 남긴 앙금때문이 분명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거쳐간 부산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으며 강제로 개방된다.

이사벨라 버드 - 조산과 그의 이웃나라들

19세기 말에는 일본과 청나라인뿐만 아니라 서구열강도 조선에 대한 관심을 쏟기 시작하는데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 1894년과 1895년에 중국, 일본, 한국을 답사했던 이사벨라 버드(Isabella Bird)는 부산과 낙동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가사키 항에서 한국의 부산항까지는 증기선으로 15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 부산에서 1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입구가 있는 낙동강은 수심 1.5미터의 물을 거슬러 밀양에서 80킬로미터를 증기선으로 항해할 수 있고, 수심 1.2미터의 물을 거슬러 정크선으로 사문까지 160킬로미터를 더 갈 수 있으며, 거기서는 짐을 가벼운 견인 포트에 옮겨 싣고 연안에서 274킬로미터 떨어진 상진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 이용 가능한 수로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서울-부산 간 철도가 곧 이루어지리라는 어렴풋한 전망과 더불어 부산은 상업의 중요한 중심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부산을 포함하고 있는 경상도 지방은 8개의 지방(현재는 13개)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다. 또 경상도 지방은 전라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현재 한국에서 가장 번창하고 있는, 비옥한 지방임이 확실하다.
······ 나는 증기선 갑판의 먼 거리에서 한국인들을 처음 보았다. ······ 한국인들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 평균 신장은 163.4센티미터지만, 부피가 큰 흰옷 때문에 키는 더욱 커 보인다. 또 벗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없는 높다란 관 모양의 모자 때문에도 키는 더 커 보인다

1910년 식민지 지배의 시작과 함께 동래부가 부산부로 개칭되고,본격적으로 '부산'이란 이름으로 성장하게 되며 동래라는 지역은 부산부의 한 구역명으로 불리우게 된다,

이는 도시 행정구역 자체를 완전히 뒤짚어 놓은 셈인데 서울로 따지면 강남구가 강남특별시로, 서울특별시가 서울구로 변화한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일본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식민지 항구 도시 부산이 개항되었을 때의 인구는 3,300여 명 남짓이었다고 한다. 현재 부산의 중심 지구인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 대교동 일대가 당시에는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부산 동구의  움막,피난처

부산의 굵직한 역사에는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두 개의 흉터뿐만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상처가 지난간 흔적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6.25 전쟁이다.

북한이 남침을 시도할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당시 브라질은 멕시코를 4대 0의 스코어로 압도하였는데, 남한도 북한에게 압도당하여 순식간에 수도를 내어주게 된다.

6.25 전쟁은 민족간의 전쟁이지만 임진왜란과 상당히 비슷하다.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갔으며 이승만은 국민을 버리고 부산으로 도망갔다.

두 전쟁 모두 천조국이 참가하여 한국을 도왔다.

하지만 각 시대를 대표하는 천조국으로 그 의미와 국적은 달랐다.

임진왜란때는 하늘이 내린 왕조 명나라가 조선을 도왔으며, 6.25때는 국방비 '1000조'의 미국이 대한민국을 도왔다.

6.25 전쟁동안 부산은 모든 분야의 중심지로 서울을 대신했다.

수도는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겨졌고 많은 피난민이 부산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부산의 인구는 전쟁 전 47만명정도 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1953년에는 82만명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인구는 많이 늘어났지만 수용인구가 초과되어 급하게 실시한 도시개발로 부산은 여전히 복잡한 도로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 허리를 깍아내 만든 빼곡한 도시와 판자촌의 낙후로 신음하고 있다.

전쟁을 겪으며 부산에는 밀면이라는 음식이 등장하게 된다.

6.25전쟁의 발발과1.4후퇴 때 밀려온 북부 지방의 사람들이 평양냉면을 만들어 먹으려 했으나, 감자를 구하기가 어려워 냉면을 해먹지 못했다.

그래서 구호물자로 온 밀을 이용하여 부산의 밀면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의 소주는 몽고군이 중앙아시아에서 가져온 술에서 유래되었다라는 설이 있다.

1270년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병참기지를 안동지역에 구축하였는데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안동소주라고하며, 후에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하여 진도로 군을 이동하기도 했는데 그 때 만들어진 술이 진도 홍주라는 이야기가 있다.






부산의 현재


2016년 부산관광공사가 진행했던 '부산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이라는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1위는 영화(19%)가 차지하였으며 먹거리, 축제, 야구가 뒤를 이었다.

불과 2년전에 진행했던 설문조사지만, 지금의 부산이라는 도시 이미지는 점점 더 현대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마린시티와 광안대교, 부산타워에서 보는 야경은 부산이 얼마나 커다랗고 모던한 분위기의 도시로 자리잡았는지 잘 보여준다.

낙동강과 바다를 끼고 있어 찬란한 불빛이 고층 어딘가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그 빛은 곧장 물결에 비추어져 아름다움과 느껴지는 고혹스런 분위기는 두 배가 된다.


대한민국 제 2의 도시 부산,

이 거대한 광역시의 현재 모습은 어떨까?


자갈치 시장의 수산시장 이미지에서 해운대 마린시티의 도시적 분위기로 변모하고 있는 부산의 인구는 약 354만명을 기록했다.(2017년 기준)

한 인간이 타인의 얼굴과 특징을 제대로 인지하며 구축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한계는 140~150여명이라는 연구결과를 떠올려보면 그 숫자는 더더욱 많아 보인다.

이 거대 도시는 대한민국 제 2의 도시, 제 1의 항구라고 불려왔던 것처럼 특별시와 광역시를 통틀어 인구 순위 2위를 기록하였다.

1960년대에도 부산은 남부지방 제 1의 도시였고, 좀 더 시간을 앞당겨 50년대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임시수도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낙동강과 남해안을 끼고 있는 부산.

이 인구 350만의 도시는 참으로 매력적이고 거대한 도시임에 분명하지만, 사실 오래 전부터 인구감소의 문제에 직면해있다.

부산의 인구감소의 원인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청년인구의 실업문제 해결 실패에 있다.

JTBC는 '지역별 인구감소 위험도' 뉴스에서 부산의 인구감소 원인을 청년들의 취업을 위한 상경과 저출산 문제로 꼽았다.

실제로 부산을 소재로한 기업 중 대한민국 1000대 기업순위권에 있는 기업은 38곳으로 2008년 55곳 이후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1위 르노삼성자동차마저도 전국 117위 수준이며, 1000대 기업 內 부산 기업 평균매출은 7300억원으로,

울산(2조 4000억원)과 인천(1조 5000억원)에 비해 월등히 낮은 수준으로 확인되었다.

 

부산소재기업의 부진은 석유와 반도체, 전자 등 고부가 가치산업의 비중이 낮은 이유도 있으며,

조선과 철강 등의 주요산업의 경기침체가 장기화된 것 때문으로 보여진다.

참고로 1000대 기업 中 707개 기업이 수도권 소재회사이며, 100대 기업의 88%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북쪽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실히 드러난다.


두번째는 부산 아파트가격의 급상승, 불균형 때문이다.

부산 아파트 평당 매매가

2016년 부산 아파트 평당 매매가가 800만원을 돌파하였다.

부산시 평당 매매가가 약 2년사이에 약 11% 오른 것뿐만 아니라 도시개발과 집값 상승이 동쪽으로 불균형하게 치우진 모습을 볼 수 있다.

30평 아파트가 3억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부산 아파트는 '억'소리하며 몇 십억 단위로 거래되진 않겠지만,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매매가가 2배정도 상승한 것을 보면 '헉'소리정도는 들을 수 있을 듯 하다.

물론 해운대구 같은 금싸라기땅은 논외로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취업을 위해 상경한 청년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산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정답은 아래 표에 있다.

경상남도는 지난 10년 인구가 가장 많이 늘어난 도(道) 지역이었다. (수도권, 세종시 제외)

이는 부산 인구 감소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경상남도 울산과 부산특별시 사이에 있는 양산이라는 도시는 2006년 인구가 22.6만여명에서 2016년 31.6만명으로 늘어났다.

도심의 노후화와 집값 상승으로 양산 신도시가 부산의 인구를 흡수한 것으로 해석된다.

서울의 인구가 1000만 이하로 떨어지고. 성남, 수원, 용인의 인구가 지난 몇 년사이에 급격하게 늘어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된다.


부산이 이전과 같은 부흥을 누리기 위해서는 기업의 수도권 집중화 현상을 약화시켜야 한다.

서울 집값을 낮추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갖은 수를 모두 던져놓았지만, 신도시 건설과 부동간 거래 규제는 거래가격을 낮추는데 큰 실효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울에 살고 싶어하는 이유, 많은 놀거리와 한강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장점도 매우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자리다.

기업의 서울 집중화, 이 것이 일주일에 5일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땀 흘려 모은 돈은 모아모아 한양에 집을 마련하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모든 지방 도시의 집값 정체, 빈 아파트의 증가의 원인도 위와 같은 문제들과 이어져 있다.

한 CF 문구가 생각난다.

"기업이 살아야 국가간 살아 납니다."

기업은 그만큼 중요하다.

특히 지방의 도시는 신도시 아파트보다 주민의 생계를 책임져줄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하다.


운전하기 힘든 도시?

구글에서 부산이라는 단어를 치면 연관검색어로 '부산 운전' 이라는 단어가 뜬다.

부산 운전이라는 단어를 이어 치면 '부산 운전 후기'라는 키워드도 이어 볼 수 있다.

인터넷을 많이 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넷상에는 부산운전후기와 관련한 재미있는 후기글이 많다.

부산에서 운전을 직접해보진 않았으나 경험상 운전매너가 양호하진 않았다.

차량뿐만 아니라 도로도 문제가 많아보였다.

해운대구 주변을 제외하면 장기적인 계획과 함께 구축된 도시가 아닌 탓에 대부분의 도로는 혼잡하고 상태도 좋지 않다.

통계로 따지면 부산은 자동차 등록대수 대비 사고나 사상자가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운전문화라는 것은 숫자로 기록하기 어려운 것임을 유념하고 안전운전할 것을 추천한다.



부산의 미래



부산은 대한민국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한다.

임진왜란과 6.25전쟁 같은 뼈아픈 역사에 새겨져 있으며, 가파른 성장세를 자랑하였으나 곳곳의 도시들은 영양가 있는 살들로 채워지지 못해 신음하고 있는 것도 현재의 대한민국과도 같다.


도시개발적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 양산으로의 인구유출 문제를 낳은 해안가 주변의 집중발전, 지역간 집값의 불균형화를 막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부산은 낙후된 북서쪽의 도시들을 재생해 나가야한다.

낙동강을끼고 있는 사하·사상·북·강서구등 4개로 이루어진 지역을 칭하는 서부산 지역은 부산전체의약39%.인구의 28%을차지한다.

면적은 넓지만 논·들판이 많고 공단과 공장들이 밀집해 있다.

반면 부산 전체 중 문화시설 16.9%, 종합병원 11.1%, 호텔 7.6%에 불과할 정도로 생활 인프라 수준은 낮다.

2030년까지 부산지역은 30조원을 투자하여 세계 30위권 도시, 주민소득 5만달러의 목표를 이루어내겠다고 선언하였으나, 기업 유치와 인구 감소문제를 해결할만한 계획를 구체적으로 세웠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필자 생각으로는 지금 부산에게 필요한 것은 발전이 아니라 재생이다.


도시를 알릴 수 있는 강력한 랜드마크역시 필요하다.

영화, 먹거리, 자갈치시장, 광안리, 해운대 등 부산하면 생각나는 키워드는 많지만 그 어떤 것 하나 세계적이라고 내새울만한 자랑거리가 되지는 못한다.

모든 것을 이루고 내세우고 싶은 욕심이야 알겠지만 마음만 앞서가는 성취욕을 보여주기 보다는 선택과 집중으로 부산을 알릴 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시원한 여름, 따듯한 겨울, 7개의 천연해수욕장과 대한민국 최장의 강의 하류에 위치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도시는 어디에도 없다.

해안가 주변의 높은 건물에 가려진 많은 문제들로 신음하고 있는 부산이 재도약하기를 바라며 첫 번째 도시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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