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비를 맨몸으로 맞았다. 쏟아지는 비를 피할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고 보니 온몸을 적신 것은 비가 아니라 식은땀이었다. 현실에 비가 상상, 꿈속에서 쏟아지는 비로 식은땀이 되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몇 해 전이다. 2015년 1학기로 학교의 적(的), 소속을 떠나야 했다. 전강으로서 자신이 정한 데드라인이었다. 평생을 있던 곳, 내 삶의 모든 시간을 지났던 곳, 마지막 강의를 하고 강의실을 나섰다. 갑자기 앞이 흐려지고,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고, 다리가 풀려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학교 캡틴이 오시고, 동료 선생님들이 오고, 선배가 오고, 후배가 오고, 제자들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그렇게 그대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하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날부터였다. 무기력으로 무 식욕의 상태로...
수액을 맞고 하루가 지나고, 멀리 공부하러 간 큰아이가 달려오고, 작은 아이는 수액 지키느라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한산중에서 명퇴한 학창 시절 절친이 큰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한 아름의 책을 사들고 왔다. 선명하게 가격표가 있는 그대로 책들을 머리맡에 말없이 놓았다.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가 내린 처방이었다.
손을 뻗어 책 한 권을 잡았다. 책을 읽었다. 한 권, 또 한 권, 그리고 다시 또, 또 한 권. 읽은 책의 수가 70권째 되는 날이었다. 무기력, 무 식욕, 허공 응시로 대변되었던 공황장애에서 조금씩, 조금씩 소생하기 시작했다.
책이었다. 책은 "내 삶의 중심"이었다. 나를 다시 서게 한 것은 책, 책 읽기였다. 평생 책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아티클 쓰고 그 외에 별로 한 게 없었다. 내 전 생애에...
나는 지금 ‘분신’, ‘중심’인 ‘책’을 놓지 않는 길에 다시 서 있다. 강동 혁신교육지구 소속 강동마을교사로서 6년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인재를 놓치지 않는, 인재의 귀함을 아는 강동구는 교육혁신지구로 2015년부터 엄중하며 체계적인 검증을 거쳐 강동마을교사를 배출했다. 현재 실력을 갖춘 100여 명의 강동마을교사가 민관학과 연계되어 독서, 생태, 마을 탐방, 진로 인성, 놀이, 공예, 요리 등 동아리로 구성되어 강동구 내 중학교 자유학기를 성심으로 담당한다.
나는 사 년째 강동마을교사로 독서수업을 담당하고 있으며, 2021년 성덕중학교, 성내중학교 자유학기를 맡고 있다. 벌써 6년의 시간이 지났다. 강일중학교를 위시한 많은 학교에서 독서수업을 했다. 언제나 강동마을교사로서, 자유학기 수업을 진행하는 나의 독서수업의 화두는 ‘책을 통해 형성되는 인성’이다. 2021년 이번 학기는 여러 면에서 더욱 ‘마음을 키워가는 인성’에 기초한 영화와 문학의 조우로 문학수업을 진행하고자 했다. 10대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고 도전하게 하는 항로’ 그리고 생애, 단 한 번만이라도 우리가 천착해야 할 ‘심연을 울리는 명문장’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수업을 구성했다. 그 생각을 중심에 두고 선정한 작가는 ‘셰익스피어’와 ‘로알드 달, 서머셋 모옴’이다.
성덕중 첫 수업, 교실에는 온통 여학생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먼저, 8회에 걸친 수업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아이들의 눈에 호기심이 어린다.
‘누구지?’, ‘어떤 선생님이지?’
그들의 눈길에서 숱한 질문이 읽힌다. 간단히 내 소개를 마친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수업 시작이다.
첫 수업으로 선정한 영화와 문학은 서머셋 모옴의 ‘페인티드 베일’이다. 아이들의 눈이 빛난다. 그들의 눈빛에서 마음을 읽는다. 그들의 눈빛이 이미 ‘안다’, ‘알고 있다’고 말한다. ‘책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바로 그들의 눈을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페인티드 베일’ 읽어 본 사람 있어요?”
몇몇 아이들이 손을 든다. 전체 학생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전 세계를 매료시키고 당대뿐이 아니라 현재에도 세계를 아우르는 유명한 작가에 책을 읽은 학생의 수가 생각보다 적다. 마음에 훅 찬바람이 인다. 아이들을 책, 문학에 익숙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교육부는 ‘고심에 고심을 해야 한다’는 난제에 마음이 머무른다.
칠판에 책(冊)을 한자로 적었다. 선생님이 왜 굳이 책을 한자로 적었는지 물었다. 아이들의 생각을 불러내려는 첫 시도였다. 몇몇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다. 모든 답이 다 옳을 수 있다. 답을 정리하며 ‘책은 역사이며 철학이며, 사고며. 행동’이라는 나 자신의 철학을 아이들에게 깊이 전한다. 몇몇 아이가 고개를 끄떡인다. 아이들에게 책에 대해 깊이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잠잠히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직면하는 게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내면에 흐르는 안타까운 마음을 잡고, 나는 Idia Box를 꺼냈다. 아이들에게 마음에 드는 그림을 한 장씩 선택하게 했다.
“선택한 그림을 가지고 ‘페인티드 베일’의 제목과 연결해서 자신에게 떠오르는 생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 봐요.”
순간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소요로 이어진다. 단 한 번도 이런 방법의 수업을 접해보지 않았음이 확연히 드러나다. 그럼에도 끈기 있게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를 돌려가며 자신의 생각들을 불러내게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처음에 주저하고 머뭇거리던 마음을 버리고 서서히 조금씩 수업에 몰입해 갔다.
나는 매 수업, 프로그램 ‘문학작품 깊이 읽기, 영화와 문학으로 정체성 찾기’에 알맞은 ‘화두어’를 제시했다. 생각하는 방법을 키워주는 것이 그들이 살아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될 것을 안다. 생각하게 하는 수업, 생각을 요하는 수업을 진행하며 매 회기에 따라 수업내용을 조금씩 심화시켰다.
‘책 표지’ 보고 생각하기, ‘책 표지’의 역할 알기, 캐릭터 묘사하기 등 생각을 글로 표현하도록 유도했다. 수업의 회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에 단 한 줄도 피력하지 못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오셀로의 주인공이 되었고, 햄릿처럼 고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곤
“제가 해보겠습니다.”
손을 들며 말을 하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났다.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https://blog.naver.com/lyu0323/221354117223
처음에 한 줄 쓰기는 5줄 쓰기로, 다시 10줄 쓰기로, 그리고 마지막 수업을 마칠 때쯤에는 한 페이지 쓰기가 가능해졌다. 고전이라면 거부감을 갖던 모든 아이들이 고전에서 받은 메시지를 통해 반드시 고전은 읽어야만 하는 것임을 인지했고. 고전이 그저 고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그 당대의 모습이 현대에도 계속 공존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더해 나는 아이들에게 한글 독서, 영어독서 생활화 방법을 주의 깊게 알려 주었다. 몇몇은 진지하게 알아간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꼈다. 아이들은 Story-map을 통한 Note-taking 기술을 배움으로써 효과적인 독서, 책 읽기 능력 향상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갔다.
또한, 수업을 통해 경험한 윤독, 통독뿐만이 아니라 낭독과 역할극으로 맥베스가 되기도 하고 리어 왕이 되기도 했다. 창의적인 Syntopical(주제 읽기)는 그들에게 분명한 ‘책 읽기’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8회 수업이 끝났다. 놀라웠다. 아이들이 한 결과물을 보며...
아직 아이들에게 8회 수업으로 글, 문장, 책에 대한 ‘마음 열기’는 아주 미미한지 모른다. 허나 이런 수업이 계속되는 한 교사와 아이들은 분명 동반 성장할 것이다. 질과 양, 양면에서 책을 가까이하며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서울시가 주도하는 교육혁신지구에 교육을 중점에 둔 복지는 좋은 시도이며 앞으로 더욱 지속 발전할 거란 기대를 놓지 않는다.
On Time!!! 60의 나이!!! 내가 자신에게 약속한 데드라인이었다.
"학문을 하며 비루하거나 비굴하거나 초라하거나 당당하지 못한 짓은 마라" 평생 가르치다 생을 마감한 아버지 말씀이셨다. 그 유언을 늘 가슴에 두었고 지키며 올곧은 시간을 지나자고 늘 스스로를 독려했다.
그래, 나는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서 있다. 강동마을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서울시가 서울형 혁신교육지구로 민관학을 함께 연계하는 마음에 기초를 둔 복지는 민관학 모두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강동구의 강동 마을교 사는 잠재된 인재의 활용과 사람을 중시하는 마음이 연결된 ‘사람이 아름다운 강동’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는 어떤 다른 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변별력이 돋보인다. 자유학기를 통해 만난 아이들과 교사와 학교는 교육을 매개로 한 인프라를 구축했고 따라서 그 기초 위에 더욱 발전하리라 기대한다.
내 수업에 내내 멋진 일관된 모습으로 참여한 배재중학교의 오유민, 이동하, 주진하, 박민서, 김도윤, 김종연, 김조수아 이하 모든 학생들에게 수고했고 고마웠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앞으로 어디서 만나더라도, 분명 빛나는 모습으로, ‘나는 누구’라는 정체성의 모습으로, 일취월장해 있을 모두를 기대한다.
자신은 평생 아이들을 가르쳐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100세 시대가 주는 엄중함이 너무 무거웠다. 어떻게 내가 가장 익숙하고 잘하는 일로 "내길 찾기"를 할지 오래 함몰해 있었다.
100세 시대가 무서웠다. 아니 글, 책을 놓는다는 게 무서웠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미 강사료가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나 가장 익숙한, 가장 잘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마음의 간절함이 희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희망이 뜨거운 목마름으로 가슴을 채웠다. 공황장애에서 서서히, 조금씩, 찬찬히 소생해 가던 어느 날이었다. 강동구의 조세현 주무관이 강동마을교사 ‘같이 하자’며 손을 내밀어주었다. 망설였다. 길고 긴 망설임이 오래 숙고하게 했다. 따스한 그의 마음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그 마음이 나를 이 강동마을교사의 자리에 있게 했다. 마음이 있는, 마음을 가진 모두가 있는 교육혁신지구로서 무한 발전하는 강동을 기대한다.
끝으로 자유학기를 통해 어떤 상황과 여건에서도 늘 아이들과 마음과 가슴으로 소통하는 수업을 위해 노력하는 강동마을교사에게 큰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