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는 2014년 발매된 이승환 님의 11집 앨범 'Fall to Fly'의 4번 트랙이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멜로디와 음색, 가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노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의 어우러짐은 마음속 깊은 곳에 위치한 모종의 감정을 피어오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을 필자는 '울림'이라고 정의해왔다. 그래서 요즘에는 울림의 폭이 큰 노래들을 찾아 듣는 것을 즐긴다.
본래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홍콩 영화의 제목인데, 이는 BTS의 앨범 소재로 차용된 적도 있으며(화양연화 pt.2 앨범의 '고엽'이라는 노래를 정말 좋아한다), 지난주 종영된 드라마 제목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이들 역시 어디선가 한 번씩은 들어봤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필자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다가온 것은 이승환 님의 화양연화다.
기억 속에 멀어지는
가슴속에 타오르다만 이름을
불러보고 불러보려 한다
바람결에 흩어지는 가느다란 너의 어깨와
세월 따라 두둥실 떠가는 흐린 새털구름처럼
하얗게 흩어져간다
네가 너무나 많아서 missing you
네가 너무나 흔해서
한 조각 닿지 않고
붉게 물든 하늘
다 타 들어간다
네가 너무 그리워서 missing you
네가 너무 보고파서
오늘도 산 너머 누운 태양에 널 묻기로 했다
너로 인해 시작되고
너를 통해 어지럽히던 내 맘을
정리하고 정리하려 한다
숨 턱까지 차오르는 같이 울고 웃고 뒹굴던 기억
세월 위로 두둥실 떠가는 구겨진 종이배처럼
화양연화
하얗게 멀어져 간다
네가 너무나 멀어서 missing you
네가 너무나 작아서
한 조각 닿지 않고
붉게 물든 바다
다 타 들어간다
네가 너무 그리워서 missing you
네가 너무 보고파서
오늘도 달빛 아래 눈부신 너와 나 (손을 잡던)
반짝이던 너와 나 (입 맞추던) 잊지 못할 너와 나
모두 묻기로 했다
다 묻기로 했다
Lyrics from '이승환 - 화양연화'
화양연화의 가사는 그리운 옛 연인을 향한다.
그렇기에 첫 구절부터 청자의 감정을 깊은 폭으로 노래에 빠져들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가슴속에 그리운 이름이 하나씩은 존재할 것이며, 기억 속에서 타오르다만 이름을 불러보려 했던 순간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평생을 오롯이 간직하리라 마음먹었던 아름다운 기억이 흩어져 가는 자신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묻어두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노래는 마무리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묻어둔다는 행위는 가사의 주체로 하여금 언젠가 꺼내볼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산 너머 누운 태양에 너를 묻기로 했다'는 노래 속 다짐은 해가 떠오르는 어느 순간과 함께 자신이 묻어두었던 기억을 꺼낼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흩어질지언정, 사라지거나 소멸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작품 속 화양연화의 은유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화자의 세월은 하늘과 바다를 통해 묘사되고 있다. 흐린 새털구름과 구겨진 종이배의 형상으로 하늘과 바다 위를 흘러가던 너의 모습은 어느새 멀어져 가고, 작아져간다. 지금 붙잡지 않으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화자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화양연화를 묻어두려 했던 것이 아닐까. 기약 없는 기약일지라도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말이다.
꽃과도 같은 아름다운 시절의 그대를 그리는 이승환 님의 화양연화는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며 다시금 서로를 마주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잔잔한 위로를 전한다.
하지만 더욱더 흥미로웠던 것은 화양연화의 뮤직비디오가 가사와는 상이한 방식으로 곡을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향하는 가사와 달리, 뮤직비디오는 과거의 찬란했던 순간, 즉 나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리본을 묶는 그녀와 리본을 푸는 과거의 나. ⓒ화양연화 MV
기타에 묶인 하늘색 리본은 '젊은 나'와 '과거의 그녀'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한다. 노래 시작과 함께 현재의 나는 무대의 커튼 너머 관객석에 앉아있는 과거의 그녀가 리본을 묶는 모습을 목격한다. 하지만 (1절 후렴구의 '너를 묻기로 했다'라는 가사와 함께 등장하는) 너를 묻기로 다짐한젊은 나는 기타에 묶여있던 리본을 풀어버린다.
2절이 시작되면서 리본을 풀어버린 채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젊은 나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연이어 등장하는 현재의 나의 기타에는 리본이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묶여있다. 젊었던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만 보던 그들이 노래의 끝에서는 무대 위에서 뜨거운 박수를 받게 된다. 비로소 찬란했던 자신의 순간과 하나 된 것이다.
과거와 만난 현재의 나는 더 이상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 화양연화 MV
뮤직비디오의 연출자는 하늘색 리본이라는 심볼과 무대 위 교차 연출을 통해, 지금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의 그녀가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았던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평생을 자신의 화양연화가 자신이 그리워하고 있는 그녀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자신이었지만, 진실된 화양연화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 했던 자신의 찬란했던 시절임을 말이다.
환히 웃을 수 있도록 미래의 나에게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 싶다. ⓒ 화양연화 MV
홀연히 사라져 버린 나의 찬란했던 순간을 반추하며, 잠시나마 그때의 황홀함에 취하는 것만큼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을까.
초등학생 때 어머니의 핸드폰에 mp3 파일을 종종 넣어드리곤 했는데, '왁스 - 황혼의 문턱'이라는 노래를 넣어드린 적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짱구 극장판 '어른 제국의 역습'에 등장하는 짱구 아빠의 인생 회상 씬에 황혼의 문턱이 bgm으로 삽입된 영상을 보며 진한 여운에 젖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뒤에 어머니께서 그 노래를 보고 이런 노래를 왜 넣었냐고 질책 아닌 질책을 던지셨다. 나는 당시의 장면이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괜히 울컥해진다. 이 노래가 나올 때마다, 그리고 그때의 순간이 이따금씩 기억으로 되살아날 때마다.
어린이용 만화라기에는 너무도 깊은 감정선을 보였던 짱구 아빠의 회상 씬. ⓒ어른 제국의 역습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아버지로, 혹은 할아버지로 살아가며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게 된다면, 20대의 중반에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상황과 사람들, 그리고 나의 주변 환경마저도 그리워하는 때가 불현듯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기억은 미화된다는 너무나도 명백한 전제뿐만 아니라 현재의 내가 갖고 있는 고민과 걱정들은 먼 훗날 돌이켜보면 마치 밤하늘에 찍혀있는 별 하나와 같이 희미한 점의 모습으로 여겨질 것이리라. (그럼에도 현재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기에내일을 살아낼 우리에게 우리는 또다시스스로 위안을 건네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내 앞에 있는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 하는, 충실한 삶을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2020년의 나는 스스로를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겪어내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음에도, 2050년의 내가 만일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면 지금 이 순간을 화양연화로 기억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주변인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때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것도 다 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삶을 바라보는 지평을 넓히고 싶다는 생각이 최근 내 삶의 동인(動因)이었다.
처음 스타트업을 창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부와 명예, 권력 따위로 대표되는 물질적 가치를 좇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살아있는 경험, 그리고 그 속에서 나에게 귀감이 되어줄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결과는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든 실패임을 시인한다. 그럼에도 결과가 아닌 과정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며, 준비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삶을 대하는 진정성을 배웠다는 것만으로도 두 번 다시없을 값진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훈련소에서 첫 완전군장 행군을 했을 때 나를 스치고 갔던 생각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민가 앞을 지나가던 중 허리를 숙이고 집으로 들어가시던 백발의 할머니를 보며, '나도 언젠가 저분처럼 늙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나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이는 분명 몸과 마음의 정돈 상태가 정점에 달해있는 20대 초반의 청년들에게 찾아오는 흔한 생각은 아닐 것이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노화를 맞이하도록 설계된 동물이다.
그럼에도 한평생을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삶은 아름답다.
늙음의 기준은 그 누구도 정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사회적 제도를 통해 연로하신 분들을 우대하겠다'라고 공공연하게 선포되어 있는 '경로 우대'의 기준 연령은 만 65세이다. 아직은 멀게 느껴지는 40년 후의 미래지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까지의 내 모습을 4번 더 하면 만 65세가 된다는 사실은 젊음을 그리워하는 모든 어르신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인생을 체감하는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는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명언처럼, 아마도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에 입문하게 된다면 내 인생의 속도는 지금보다 훨씬 빠른 모습을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화살과도 같은 속도로 우리를 스쳐가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어떤 가치를 좇을 것인지, 삶의 끝에서 이뤄내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현듯 자신에게 찾아왔던 화양연화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갈 것인지, 앞으로 다가올 나의 미래를 화양연화로 만들어갈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운명론적 사고에 대한 비판도 아니며, 화양연화를 겪지 못한 이들을 위로하려는 말이 아니다. 전자와 후자의 삶의 태도 어느 것 하나도 잘못된 것은 없다. 현실적 제약 속에서 자신의 찬란했던 과거나 연인을 평생 그릴 수밖에 없는 이들도 존재할 것이고, 하루하루 한 치 앞을 모르는 현재의 불확실함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필자는 매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아침에 털어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매 순간에 자신의 존재 목적을 되뇌고, 미래의 자신이 나아갈 지향점을 막연하게나마 그리기 시작한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새로이 혹은 다시금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필자 역시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최근의 모습을 반성하고, 매 순간에 최선을 다 하고자 한다. 우리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꽃과 같은 아름다운 시절을 그리움의 대상으로 만들 것인지, 기다림의 대상으로 만들 것인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다. 과거와 미래의 경계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나는 과연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 던져볼 것을 당부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