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여행기 #베트남 #푸꾸옥 #Vietnam #PhuQuoc
처음 동남아에 대한 강한 인상이 만들어진 것은 공항 밖에서 들이키는 첫 번째 들숨 때문이었다.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폐 속으로 울컥하고 들어 왔을 때 느껴지는 이색감은 덥고 불쾌한 것이 아니라 신선한 경험이었다.
간만의 여행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당연히 신선함을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 전혀 신선하지 않았다. '뭐지 이 익숙한 느낌은?' 여행 전날 한국에서 느꼈던 더위에 비하면 5일 동안 느꼈던 베트남 남부 푸꾸옥의 더위는 그냥 평범했다. 한국이 너무 더운 것인가? 베트남이 생각보다 안 더운 것인가?
베트남 남부 지역은 북위 10도 정도에 위치해 있다. 서울은 북위 37.6도에 위치해 있으니 서울에 비하면 적도에 가까워 매우 더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실제 체감은 한국보다 더 덥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 날씨가 더 덥고 불편하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여행 중에 아침마다 러닝을 했는데 같은 기온의 한국에서의 러닝과 큰 차이가 있었다. 한국에서 28~29도에서 뛰는 일은 정말 고역이다. 이게 운동이 맞나 싶을 정도다.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은 증발하지 않아서 온몸이 땀에 절여진다. 그런데 베트남에서의 러닝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뭐지? 이 은근한 쾌적함은? 간만의 여행 때문에 기분이 업 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기분 문제가 아니었다.
베트남은 5월부터 11월까지가 우기다. 우기에는 스콜성 소나기가 종종 내린다. 7시경에 아침 러닝을 할 때는 구름이 아름다운 쾌청한 날씨다. 그런데 아침 식사를 하는 9시경엔 꼭 스콜이 내렸다. 그리고는 또 멀쩡해지고 오후에 한 번 뿌리고 또 멀쩡해지는 것을 반복했다. 비 때문에 일정에 차질을 겪거나 습함 때문에 크게 불편한 일은 없었다. 오히려 구름이 강한 햇볕을 막아주어 시원한(?) 느낌도 있었다. (9~10월에는 비가 더 많이 내린다고 하니 참고하자)
푸꾸옥의 아침 7시 경의 기온은 27~28도다. 한낮의 기온은 31~32도다. 습도는 비가 오나 안 오나 항상 높다. 일교차가 3~5도 차이가 난다. 매일 거의 일정하다.
반면 6월 기준 한국의 아침 기온은 17~18도다. 한낮의 기온은 29~30도다. 습도는 그때그때 차이가 크다. 일교차가 11~13도 차이가 난다. 심지어 매일매일 다르다. 최저 기온도, 최고 기온도, 습도도, 일교차도 고무줄이다. 그것도 월별로 다르다.
그렇다! 적도에 가까운 베트남 남부의 고온다습한 기온이 한국보다 더 좋게 느껴진 이유는 바로 '기온 변화의 안정성(stability)' 때문이다. 평균 기온이 일정하다 보니 기온의 편차가 크지 않고, 일별/월별 기온의 표준편차도 크지 않다. 기온 변화가 크지 않고 일정한 덕분에 우리 몸이 쉽게 적응할 수 있으며, 체온 조절의 부담도 적어진다.
반대로 한국은 아침에는 선선하고, 낮에는 기온이 급상승했다가, 저녁에 다시 선선해지는 기온 변화가 크다. 즉, 평균 기온과의 기온 편차가 크고, 일별/월별 기온의 표준편차도 크다. 우리 몸이 계속 온도 변화에 적응해야 하므로 피로감과 불쾌감이 커진다.
다시 말하자면, '열쾌적성(thermal comfort)'이 한국보다 베트남이 더 좋다. 그 이유는 습도, 바람, 햇빛 등의 다양한 요소의 안정성 때문이다. 이 안정성은 신체의 적응력을 높여주고, 피로도나 불쾌감을 줄여준다.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추론이 아니다. 내 추론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찾아냈다.
스리랑카의 한 연구에서는 일교차가 1.5°C 증가할 때마다 열쾌적성이 1단계 악화되며, 2.5°C 차이에서는 2단계 악화가 발생한다는 보고가 있다. 일본의 한 연구에서는 실외에서 실내로 이동할 때 공기 온도가 10°C 이상 변하면 집중력과 경쾌함(alertness, freshness)이 유의미하게 감소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네덜란드의 한 연구에서는 체온 조절 시스템이 최소한으로 작동할 때 열쾌적성이 극대화된다고 했다. 이탈리아의 한 연구에서는 저녁이 되면 체온이 자연스럽게 하락하는데, 이때 주변 온도 변화가 불안정하면 체감 불쾌도가 증가한다며, 인간의 열쾌적성이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이들 연구는 모두 기온의 불안정함이 열쾌적성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 연구 결과로만 보면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있고, 일중 기온 변화가 심한 곳에서 산다는 것은 매우 피곤하고 힘든 일임을 알 수 있다.
일정함과 안정성은 우리를 심리적, 육체적으로 편안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예측 가능하게 한다. 예측 가능하면 미리 마음과 몸을 준비할 수 있다. 준비가 되어 있으면 맞닥뜨렸을 때 어려움이 줄어든다.
여행지의 기온뿐만 아니라 인생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최대한 많은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그것도 불안해서 실현시켜 곁에 두려고 한다. 재산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예측이 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측이 돼도 힘든 건 힘들다. 오히려 일정하고 안정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측 가능한 상황은 미실현 상태이고, 일정하고 안정적인 상황은 실현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가까운 것을 천시하고, 멀리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우를 범한다. 인간 본성이 그런 것이라 달리 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뻔한 것에도 감사하라고 하는가 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 주위의 일정하고 안정적인 모든 것이 매우 큰 성과고 자산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작지만 안정적인 것을 감사하며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기온이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이슈는 아니지만, 안 그래도 큰 기온 편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더위가 너무 맵다. 내 나이 탓도 일부 있겠지만, 춥다 덥다를 반복하는 날씨가 힘에 부친다.
더위를 각오했던 베트남 여행이었는데 생각보다 좋았고, 반면 우리 날씨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체감했다. 왠지 날씨 회피용 여행을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서 앞으로는 여행지를 고를 때 기온도 한 번 챙겨봐야겠다. 현실적인 다른 요소들로 목적지가 결정되면 나중에 '더워? 추워?'로 확인 정도만 했는데, 나름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번 베트남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한 가지 온도와 관련된 나만의 여행 팁을 드리자면, 잘 때는 에어컨을 매우 약하게 틀거나 끄고 자는 것을 추천한다. 에어컨을 세게 틀고 포근한 호텔 침구를 돌돌 말고 자는 것이 행복 중 하나인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컨디션을 좋게 유지하는 데는 쾌적한 수준에서 켜거나 아예 끄고 자는 것이 훨씬 좋았다. 참고하여 좋은 여행 하시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