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여행기 #베트남 #푸꾸옥 #Vietnam #PhuQuoc
어릴 땐 -지금보다 나이가 덜 들었을 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운전을 하고 싶었다. 차를 좋아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운전을 꺼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최신의 운전 편의 장치를 모두 갖추고도 운전하는 것이 힘들고 귀찮다. 분명 전보다 좋은 시트와 기능을 가진 차를 운전하지만 운전하는 게 즐겁지는 않다.
운전이 즐겁지 않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길에 나섰을 때의 감정적인 스트레스가 크다. 우리나라의 운전자들은 운전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무리하게 들이밀고, 무례하게 끼어들며, 무도하게 운전한다. 운전을 하고 있으면 그런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최대한 대응하지 않으려고 '똥 마려운가 보다'로 대처하지만, 운전을 마치고 나면 피곤하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재미있는 베트남의 운전 문화를 체험했다. 한정된 5일짜리 경험으로만 보면 베트남은 교통강국이었다.
베트남 첫 방문을 대도시가 아닌 휴양/관광지로 한 탓에 베트남 도시의 일반적인 모습을 경험했다고는 할 수 없을 듯싶다. 전략적으로 개발 중인 푸꾸옥은 길이 잘 닦여 있었고, 차는 많지 않았다. 일부 거점 도시 근처만 차가 많았고 그 외 도로는 쾌적했다.
남북을 관통하는 메인 도로는 매우 깨끗하게 잘 포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느낌은 마치 옛날 '신작로'를 보는 기분이었다.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는 반면 길가에 있는 마을이나 주택은 아직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서 봤던 신작로가 그랬다. 흙바닥 길이 시멘트로 깨끗하게 포장되었다. 그런데 포장된 길 옆은 인도가 아니라 그냥 집의 입구였다. 버스 같은 큰 차가 오면 사람들은 벽으로 붙어 서 있었다. 대문을 열면 바로 찻길이었다.
베트남 푸꾸옥의 도로는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신작로가 깔린 할머니 댁과는 달리 길은 넓고 똑바르게 놓여 있었고 길 옆 마을의 후방은 넓었다. 좋은 변화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모두가 아는 상식처럼 베트남에서는 무단횡단이 흔했다. 그냥 천천히 걸으면 오던 차나 오토바이는 보행자의 속도와 방향에 맞춰 각자의 속도를 조절했다. 사람만 무단횡단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토바이와 차도 필요하면 아무 곳에서나 유턴을 하거나 좌회전을 했다.
재미있는 건 이때 다른 차들의 반응이었다. 다른 차들은 서행을 하거나 그냥 기다렸다. 어떤 차도 클락션을 눌러 항의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원래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을 원하는 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갑자기 유턴이나 좌회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누가 봐도 '저 차가 유턴을 하겠구나'를 알 수 있게 움직였다. 그러면 다른 차들은 그걸 인지하고 속도를 조절하며 기다렸다. 그래서 차도를 건널 때는 절대 뛰지 말고 천천히 걸으라고 한 것이었구나! 보행자가 뛰는 것은 운전자의 입장에서는 예측 난도가 올라가는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경우 '내 권리를 침해당했다'라고 느낀다. 그래서 항의한다. '너의 불법으로 인해 내 권리를 침해했으니 상품권을 받아라!'거나 경적을 길게 누르거나 심하면 차 밖으로 뛰어나오기도 한다. 정해진 룰을 어긴 사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의 감정이 마구 표출된다. 우리나라의 도로는 룰을 어기는 사람들도 많고, 그걸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베트남의 운전자들은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게 급격하고 급작스럽고 예외적인 움직임이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마치 차 안에 사람이 없는 느낌이었다. 그냥 차들은 입력된 목적지를 향해 가게 되어 있고, 가다가 만나는 장애물은 알아서 피해서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내가 먼저인지, 네가 먼저인지 중요한 게 아니라 사고 없이 목적지에 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인공지능 알고리즘 같았다.
경적을 울리는 경우는 순수한 의미의 경고였다. 오토바이가 너무 차 쪽으로 붙는다거나, 앞 차가 뒷 차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처럼 '알림'이 필요한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이런 경우에도 경적을 맞은 운전자는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다. '기분 나쁘게 나한테 경적을 울려!'가 아니라 '아차!' 정도로 받아들였다. 울리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감정이 섞이지 않았다.
전기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도로를 관찰하면서 '자동 운전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운전자가 사라진 미래의 도로는 저렇겠구나. '저 새끼는 왜 빨리 안 가지?'라거나 '저 미친놈은 왜 저렇게 운전하지?' 같은 쓸데없는 감정 소모가 사라진 도로. 푸꾸옥에만 한정된 얘기인지, 푸꾸옥에서도 그 5일 동안만 한정된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주 재미있는 관찰이었다.
예전에 호텔과 골프장을 인수하는 일 때문에 미군 기지가 있었던 필리핀의 한 지역에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필리핀 내의 미국 같은 곳이었다. 분위기가 미국의 시골 마을 같다고 했다. 출입구에 통제소가 설치되어 관리를 했고 총기도 엄격하게 규제하던 곳이었다. 필리핀의 여느 곳과는 달리 계획된 도시여서 바둑판 형태의 길이 잘 닦여 있었다. 당연히 한적했고 차도 많지 않았다.
그곳에는 매우 간단한 교통 규칙이 있었다. 첫째로 모든 교차로/횡단보도에서 일시 정지한다. 둘째로 먼저 멈춘 차가 먼저 지나간다(First Stop First Go). 그게 전부였지만 도로는 잘 통제되었다.
우리는 도로에서 잘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꼬리물기가 심하다. 교차로건 횡단보도건 멈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나는 걸 선호한다. 우리는 극도로 효율적이다. 아무것도 없으면 가는 게 효율적이라고 판단한다. 효율이 교통 규칙의 단일 기준이라면 그것도 말이 될 듯하다. 그런데 우리는 극도로 이기적이다. 그래서 간단한 규칙으로 해결이 안 된다. 심지어 감정적이다.
자신의 효율을 최우선으로 하는 감정적인 인간들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운전을 하고 나면 피곤해지는 것이다. 간혹 도로의 나르시시스트를 만나거나 극단적 효율론자를 만나거나 감정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날은 수명이 단축되는 날이 된다.
차 안에 앉아서 다른 차의 미묘한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을 소모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편협한 경험 속의 '교통 강국 베트남'처럼 감정 빼고 담백하게 목적지로 갔으면 좋겠다. 이미 벌어진 일은 그냥 자연물처럼 생각하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