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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친숙함] 무전여행

#베트남여행기 #베트남 #푸꾸옥 #Vietnam #PhuQuoc

by Maama


예전엔 여행 준비를 하면 꼭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환전이었다. 월급 통장이 있는 주거래 은행에 가서 우대 환율을 적용받아 환전을 하곤 했었다. 대충의 쓰임을 예상해서 그것보다는 조금 넉넉하게 준비해야 했는데, 촘촘한 사용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그러다 보니 환전을 많이 해서 과소비를 하거나 남은 외화를 손해 보고 되팔아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무슨 깡이었는지 베트남 돈 하나 없이 공항에 내리고 말았다. 심지어 달러도 한 장 없었다. 정말 무일푼으로 한국에서 쓰던 지갑 그대로 베트남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렇게 무전여행 -정확히는 무지폐 여행-은 시작 되었다.




도착 당일에는 돈 쓸 일이 없었다. 호텔 측에 셔틀을 요청해 놨기 때문에 무료로 이동했다. 호텔에 도착한 후엔 허기진 배를 무료 생수로 끓인 컵라면으로 채웠다. 음료수까지 무료로 제공받았기 때문에 첫날 밤은 무지출로 무사히 넘어갔다.


다음 날 푸짐하고 맛있는 조식 뷔페도 숙박비에 포함이었으니 돈 쓸 일이 없었다. 심지어 방문하고자 하는 곳의 입장권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여행사를 통해 구매할 필요가 없었다. 수중에 현금이 없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도시를 왕복하는 무료 전기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갔다. 이때까지 현금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입장까진 무료! 그런데 서울대공원의 코끼리차 같은 관람차는 유료였다. 체력을 아낄 수 있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에 거의 필수에 가까웠다. 현금이 없는데 어떡하지! 그런데 카드가 된다. 이때 사용한 카드가 토스 체크카드다. 한국에서도 신용카드는 공과금 할인받는 것에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체크카드를 쓰고 있었다. 편해서 쓰던 체크카드인데 베트남에서도 사용이 된다. 심지어 결제 금액만큼 자동으로 환전되어 베트남 동으로 결제가 된다. 콜라와 생수도 체크카드로 사 먹었다.


아무리 그래도 비상용으로 현금이 조금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알아본 결과 ATM에서 출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그 체크카드로 말이다. 더군다나 수수료도 없다. 한국에서도 뽑을 일이 별로 없는 현금을, 한국 ATM기에서 현금을 뽑듯이 뽑았다. 와우 이게 무슨 일이지!


점심을 먹은 것도 체크카드로 결제를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택시는 '그랩'을 불렀는데, 그랩을 부르면 그랩에 연결된 카드로 자동 결제가 되기 때문에 현금을 낼 필요가 없다. 심리적 안정을 위해 현금을 뽑긴 했는데 쓸 곳이 없었다. 우린 이런 상황을 서로 신기해 했다.


아침에 예약한 호텔 리조트 내에 있는 무료 자쿠지와 사우나를 하고 났더니 저녁 먹으러 나가는 것이 너무 귀찮아졌다. 그래서 호텔로 음식을 배달시켰다. 그랩에서 배달 사업도 하고 있었다. '그랩푸드'로 주문을 하면 택시와 마찬가지로 그랩에 연결된 카드에서 자동 환전되어 결제가 된다. 저녁도 그렇게 현금 없이 해결했다. 나중에 여행 후일담을 나누었는데 이날 저녁이 제일 맛있었다는 것에 만장일치를 봤다.


현금을 처음 쓴 곳은 현지 마사지 샵이었다. 베트남 푸꾸옥에는 팁이 별도로 없었다. 그런데 너무 친절하고 기분 좋은 마사지를 받아서 소정의 팁을 제공했다. 남은 현금은 마지막 날 쇼핑할 때 체크카드와 혼합 결제를 했다. 결국 돌아오는 비행기에는 베트남 돈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베트남이라는 젊은 나라에 놀라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전 지구적인 핀테크 기술에 놀라야 하는 것일까? 어쨌든 매우 놀랐다. 지폐 한 장, 동전 한 닢 남기지 않고 여행을 마쳤다.


현금을 쓰지 않아서 제일 좋은 점은 역시 불안감이 없다는 것이다. 현금을 들고 다니면서 관리해야 하는 것은 불안하고 불편하다. 또 하나 좋은 점은 불필요한 과소비나 필요 이상의 절약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체크카드이기 때문에 여행 예산만큼 계좌에 넣어 놓으면 자동으로 예산 관리가 된다.


또 하나 좋았던 점은 택시 기사나 상인들과 쓸데없는 네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여행의 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밋밋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세상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간결하고 깔끔한 거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후자다.


어쩌면 이런 무현금 여행이 이번 여행을 더 좋게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역시 쓸데없는 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이 큰 행복이고, 그 행복은 기술로 상당히 보편화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재밌는 여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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