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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타키나발루] 방이 있는데 왜 들어가지를 못하니

새해 첫날을 난민처럼 시작하다

by 마봉 드 포레

한 해의 마지막 날 밤,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하다.

출장 한참 다닐 시절의 일이다.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한 것은 12월 31일 밤.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한 시간은 약 23시 50분.

로비 옆 라운지에는 이미 술 취한 서양인들이 관광버스 막춤을 추고 있었다.


호텔 체크인하는 도중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텐! 나인! 에잇! 와~~~!!! 햅삐 뉴이얼!

라운지의 취객들은 부부젤라를 불며 새해를 축하했다.


비행기 타고 오느라 피곤하고, 힘들고, 배도 고프고, 부부젤라는 시끄럽고, 빨리 올라가서 자야지! 하고 방에 올라갔다.


불안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가

이상하다. 카드키가 안 먹는다.

가끔 그런 일도 종종 있긴 하니 다시 프론트에 내려가 키를 바꿔 달라고 했다. 직원은 친절하게 웃으며 "이제 될 거야." 하며 키를 바꿔 줬다.


올라가서 다시 문을 열어 보았다. 또 안되네. 아무리 갖다 대도 빨간불만 뜬다.

내 손에 자석이 달렸나... 이상하다!

아무튼 다시 내려가서 얘기하자 직원이 미안하다면서 다른 키를 주었다.


이상하다, 이거 뭔가 잘못됐다.

세 번째 키도 안 먹자, 왠지 불안해졌다.

뭔가가... 정상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직원을 데리고 와서 입회 하에 열던가 그래야지 하면서 내려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점점 문 안 열린다는 사람들이 프론트로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


직원들은 당황했다. 연말이라 호텔은 만실, 뉴이얼즈 이브라 술 먹고 자정 넘어 들어온 사람들도 많은 이런 날, 술에 얼큰히 취한 사람들이 딸꾹! 이젠 들어가서 자야긋다~ 하고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다들 문이 안 열린다며 사람들은 점점 프론트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열리지 않는 문, 체크인하고도 방에 못 들어가는 나

직원들은 원인을 알아냈다. 소프트웨어 문제였다. 20**년이 되자 뭔가가 인식이 안돼서 카드키가 모두 expired로 인식된 것이었다.


Y2K도 아니고... 작년에는 괜찮았다는데 왜?


그놈의 소프트웨어 문제는 금방 해결이 안 되는 듯했고, 사람들은 점점 큰 소리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한국사람이 없어서인지 크게 소리치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양인들 따지는 방식대로 다다다다 따박따박 따져댔다. 나는 항상 미소로 대답하는 동양인이므로 옆에서 지켜보며 쟤네들이 저렇게 항의하니 내 방도 덩달아 같이 열어주겠지... 하며 서 있었다.


소프트웨어는 지금 당장 해결이 안 되니 대신 문을 따는 디코더?라는 것으로 맨 위층에서부터 열어준다고 했다. 그런데 그 디코더가 하나뿐이란다. 방 번호를 여기 적어놓고 저리 가서 앉아있으면 알려준다고 했다. 적어는 놓았으되 내가 어디 앉으러 가는지 쳐다도 안 보는 걸 보니 나한테 알려줄 의지가 있는지는 모를이었다.


맨 위층부터 따고 온다는데 이 호텔은 12층이고 내 방은 8층이니 금방 열어주겠거니 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좀 앉아있다가 시계를 보니 웬걸 1시도 넘었고 2시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방이 있는데 왜! 들어가지를 못하니...!

체크인하고 방에도 못 들어가 본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던 것 같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어딘가에 나갔다 온 숙박객들이었다. 짐을 옆에 두고 로비 의자에 앉아있다가 프론트에 가서 좀 서성거리기를 반복했다. 결국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꼬깔모자를 쓰고 부부젤라를 불며, 방문이 열리든지 말든지 어차피 들어갈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 로비 옆 라운지로 가서 사정 설명을 했다. 커피는 그냥 주겠다고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한 세 번 정도 독촉하니 그제서야 커피가 나왔다. 배도 고파서 메뉴를 달라고 했다. 미고렝하고 콜라를 시켜 먹었다. 먹고 나서 프론트에 몇 번 더 가봤지만 여전히 내 방문이 열렸다는 소식은 없었다.


세 시가 되었다. 라운지의 슈퍼바이저라는 사람이 내 배를 보고 임산부라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라운지 뒤의 방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가방도 옮겨주고 베개랑 이불도 가져다주겠단다. 라운지 뒤의 방이라 함은 VIP 라운지였다. 양각무늬 새겨진 사장님 소파와 사장님 테이블 그리고 선반에는 양주병들이 놓여 있었다. 이불에서 좀 냄새가 나긴 했지만 일단 누워 잠을 청했다. 로비에서 어쩔 거냐고 지랄하는 사람들도 많구만 나만 이런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내 짐가방을 보고 체크인하자마자 이 사달이 나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지친 나를 불쌍히 여겨서인 것 같았다.


잊혀진 여인, 푹신한 침대

자다 일어나 보니 아침 5시였다. 아놔 좀 있으면 해 뜨겠다! 프론트에 가보니 지랄하던 사람들이 꽤 많이 줄어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문이 열리긴 한 모양이었다. 분명히 어제 나 체크인해줄 때만 해도 웃는 얼굴에 상냥하고 총명해 보였던 직원이 '대답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완전히 피로에 쩔어 있었다'.


내 방 번호를 대자 직원이 말했다. "니 방 이미 열려있다능."

"근데 왜 아무도 나한테 얘기를 안 해줘?"

"...저런, 아무도 말 안 해줬니?"


내가 라운지 뒷방에 있을 테니 문 열리면 얘기해달라고 라운지 슈퍼바이저가 프론트에 얘기를 해놨다고 했는데, 나를 모두들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저 사람들 지금 어떤 상황인지 공항에서 일하던 내가 모를 리가 없지. 화는 나는데 직원 얼굴이 너무 피로에 쩔어 있어 화를 낼 수가 없었다...(아아 난 왜 이렇게 착할까...!!!)


아무튼 드디어 방으로! 짐을 가지고 방에 올라갔다. 정말로 '누가 방문을 열어놓고 다시 안 닫히게 종이 뭉친 것 같은 걸로 끼워 놨다'.


방에 들어간 시간은 5시 반.


어젯밤 11시 50분에 도착했는데... 라운지 뒷방에서 1박을 날리다니...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아아.. 라운지 뒷방의 소파는 딱딱하고 팔걸이 베고 자느라 목도 아팠는데, 이 침대는 어쩜 이렇게 푹신하고 편안하고 뽀송할까?


이 포근한 침대의 느낌이란...

온몸이 침대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다.

퍼질러 자는 이 느낌, 영원히 간직하고파...


그렇게 하여... 나는 20**년 새해를 코타키나발루의 모 호텔 라운지 뒷방에서 난민처럼 맞이하고 말았다. 코타키나발루에 또 갈 일이 있다면, 다시 또 갈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디코더를 내가 직접 갖고 가던지 해야겠다.


디코더가 뭐였냐고?


그날 내 방으로 올라가는 길에 디코더로 문 따는 아저씨를 봤다.

뭐였냐면 자동차 문 잠기면 긴급출동 와서 문 따 줄 때 쓰는,

끝이 구부러진 철사 같은 거였다.

그걸 문 틈으로 들이밀어서 하나하나 한 땀 한 땀 따고 있었다.


그게 하나밖에 없어서! 나를 거기다 재운 거였다. 내 1박 억울해서 어떡해.

좀 더 큰 소리로 항의하고 식사권이라도 받을걸. 난 어딜 가나 너무 점잖아서 탈이다.

잊혀진 여인, 호텔 라운지에서 한뎃잠을 자는 불쌍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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