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에서 자꾸 뭐가 보인다고 한다
아무래도 약 처방이 잘못된 것 같다. 대기실에 사람이 많아 보여서 빨리 끝내 드리려고 랩시전을 한 것이 불안장애처럼 보여서 안정제를 과다 처방한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아니면 오전 약에 부작용 '졸림'이 들어간 약이 들어가 있을 리가 없다. 주위가 슬로모션처럼 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 약 먹고 약기운 돌 때 운전을 하면 100% 확률로 사고 날 것이다. 구역질과 메스꺼움 때문에 이젠 약을 쳐다만 봐도 메슥거린다. 먹기 싫어서 사약을 앞에 높은 대역죄인처럼... 아니 걔네들은 그래도 주상전하한테 큰절하고 의연하게라도 먹었지. 그럼 장희빈인가? 아무튼 먹기 싫어서 미적미적거리다가 큰 결심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겨우 약을 삼켰다. 약 부작용에 대해서 문의하려고 병원에 전화를 해보니 수요일 휴진이다. 젠장.
이 약을 먹으면 정말로 무기력이 치료되고 의욕이 살아날까? 멍청이가 회사일을 다시 할 수 있게 될까? 일단은 부작용 때문인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그전에도 못했는데 더 못하게 됐다고! 이 몽롱함과 메스꺼움을 버티고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이번 주는 끝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올해는 지나가겠지.
가을이 되고 한 해가 저물어 가니 브런치에 한 해를 보내며, 혹은 한 시대를 흘려보내며 느끼는 감회에 대한 글이 많다. 나는 뭐 이미 감회고 나발이고 없다. 애초에 나는 브런치 갬성이 아니니까 60이 되면 그때서야 '환갑을 맞이하며...'라는 제목으로 아련한 글 하나 남길 예정인데,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 브런치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사십이 넘어가면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들. X(구 트위터)에 여기에 대해서 돌던 웃긴 글들이 있다. '40이 넘으면 뭔가를 깨닫게 될 거라는 오만함을 버려야 합니다'라던가 '40이 넘어가면 건강검진에서 뭐가 자꾸 보이기 시작합니다'같은 글귀들. 나는 이런 글들이 좋다. 사실 나이 좀 먹는다고 무슨 지혜가 더 생기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몸만 더 피곤하고 감정 기복 좀 덜해지는 정도지.
40이 넘어가면 검진에서 뭐가 자꾸 보인다는 말은 매우 사실이다. 그리고 40이 넘어가면 원치 않아도 잃어가는 것들이 있다. 머리(hair), 탄력(elasticity), 장기(organ).
장기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겠다. 나는 일단 우측 갑상선이 없고, 담낭이 없다. 쓸개 빠진 놈이라고 욕하지 마라. 나도 떼고 싶지 않았다. 우측 갑상선은 건강검진 하다가 갑상선암이 발견돼서 반절제했고, 담낭을 잃게 된 사연은 이렇다.
소화가 잘 안 되고 맨날 더부룩하길래 동네 병원에 가서 위내시경과 복부초음파를 했다. 초음파에서 담낭에 담석 큰 게 있다며 소견서를 써주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길래 우에엥 이번엔 또 뭐지? 하고 가 보았다.
뭔가 건성건성~ 하는 말투에 머리도 막 흐트러진 교수가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전날 마신 술이 아직 안 깬 것임에 틀림없었다) 증상이 뭐가 있냐고 물었다.
"지금은 괜찮은데 동네 병원 갔을 때만 해도 속이 맨날 얹히고 메슥거리고 기타 등등요."
"동네 병원이 원래 그래요." 내가 계속 못 알아듣고 네? 네? 거리자 똑바로 발음하려고 애쓰며 의사가 말했다. "속이 안 좋으니 내시경을 하겠지. 내시경을 하면 초음파도 같이 하자고 하겠지. 초음파를 하니까 아~ 담석이 있네? 아 그럼 원인은 이거다! 그러는 거예요."
약간 "돈은 벌어 뭐하겠노 소고기 사 먹겠지." 같은 말투로 의사는 계속 설명했다. "그런데 속이 안 좋은 원인은 느~무느무 많아서 담석이 원인이면 좋은데 담석을 제거하고 나서도 계속 안 좋을 수도 있어요."
"그럼 수술하는 게 낫나요 안 하는 게 낫나요?"
"증상을 떠나서 이 정도 크기에 모양도 눌려서 찌그러져 있는데 그러면 담낭벽을 자극해서 암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상태면 수술을 권해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라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수술하겠다고 결정했다. "하겠습니다! 언제 할 수 있나요?"
"언제가 좋으신데요?"
"제가 고를 수가 있나요?"
"간단한 수술이라 별로 안 걸려서 이번 주도 될걸요?" 의사는 모니터에서 내 진료 기록들을 보더니 말했다. "우수 고객 할인을 해드리고 싶은데 그런 게 없어서 참 안타깝네요(나는 이 병원에서 자궁근종수술, 갑상선절제수술, 원인불명의 염증으로 인한 입원을 했다)."
"저... 그럼 혹시 다음 주도 되나요?"
간호사는 일정을 보더니 가능하다고 했다. 담낭제거 수술이 바로 다음 주에 가능하다고? 내가 너무 놀라서 "그게 그렇게 바로 되나요?" 했더니 의사는 "왜요, 다른 과에서는 그렇게 안 했는데 여기서는 왜 이런가 싶고 그러세요?" 했다.
"아니요... 좋네요. 다른 데서는 잡았다 하면 삼 개월 후였는데."
"이 날 입원해서 다음날 수술하면 특별한 일 없으면 추석연휴 첫날에 퇴원하게 될 거예요. 기혼 분들은 일부러 추석연휴 전으로 잡아서 '아유 난 수술해서 몰라 동서가 알아서 해~ 난 몸이 이래갖고 이번엔 못 내려가~' 이러는데(의사가 점점 말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연차가 별로 없어서요. 추석연휴 전에 수술해서 연휴 끼고 쉬고 싶어요."
"아! 먹고사는 문제가 있군요. 알겠습니다." 의사는 매우 친절하게 이렇게 말하며 날짜를 잡아 주었다. "우수고객이신데 날짜라도 원하시는 대로 잡아드려야죠. 할인도 못 해 드리는데."
그렇게 해서, 나는 담낭을 잃었다.
담석은 2개였고 포도알만큼 컸다. 내가 뭐가 이렇게 크냐고 놀랐더니 의사가 "이렇게 크게 키우신거죠."하고 정정해 주었다.
아, 그 의사쌤 진짜 말씀하시는 거 딱 술친구 먹기 좋은 스타일이었는데. 다시 만나려면 장기를 또 하나 포기해야 하니 함부로 가서 뵐 수도 없고. 오늘의 환자는 부디 술 깨고 맑은 정신으로 진료 중이시길 빌 뿐이다. 의사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