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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Aug 08. 2021

『꿀벌의 우화』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1. 들어가는 말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시절에는 환상에 빠져있기 마련이다. 절대선과 절대악이 존재하고, 선과 악이 싸우면 선이 무조건 이기는,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환상들 말이다. 나 역시도 그러한 만화영화를 보면서 컸다. 위인전은 어떠한가? 어렸을 적 집에 소위 위인전이라고 하는, 김구, 아인슈타인, 이순신과 같은 인물들의 일대기를 그린 전집을 한 번이라도 보지 않은, 그런 인물들을 닮고 싶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커가면서 그러한 환상들은 필연적으로 깨지기 마련이다. 만화에서 참교육 당하던 악당들은 현실에서는 오히려 자신이 악행을 가하던 피해자들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경우가 허다하고, 절대선을 따르는 이들은 그들에 비해 빌어먹고 살기 십상이다. 위인전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적 읽었던 김구의 위인전에서는, 그가 그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에 혼신을 다 바친 인물로 그려졌는데, 커서 보니 그런 김구조차도 자신과 가는 방향은 달리했지만, 어쨌든 항일운동이라는 길을 같이 걸었던 김립을 살해했다는 의혹이 있다.('국제 공산당 자금 사건'과 '김립 피살 사건'을 참고하라.) 이 의혹을 처음 들었을 때는, 과거 김구가 '반항'이라는 정신을 잘 실천했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배신감도 느꼈더랬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환상들과는 달리, 커가면서도 도무지 잘 깨지지 않는 환상이 있으니, 바로 선과 악, 그 자체와 그것이 인간 사회에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인류 전체를 보더라도, 그 옛날 1700~180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선과 악을 명확히 나눌 수 있고 인간은 반드시 선을 좋아하며,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시각이 팽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글에서 내가 누누이 밝힌 것처럼 니체나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등과 같은 근·현대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업적 중 하나가 이러한 선과 악에 대한 환상을 깨부쉈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여기, 『꿀벌의 우화』를 통해 그러한 환상의 해체에 기여한 자가 또 있으니 바로 버나드 맨더빌이다.


 버나드 맨더빌은 개인에게 있어서 선한 덕목이라는 것이 사회 전체를 보면 오히려 악덕이 될 수 있으며, 악덕이 사회에는 이익을 불러올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어찌 보면 경제학적 사상에 그치지 않고, 더욱 근본적인 문제, 그러니까 선함이라고 하는 미덕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 미덕과 사회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가 지은 우화가 바로 『꿀벌의 우화』이다. 먼저 밝혀둘 것이 있는데, 개인적인 이유(이 이유는 뒤에서 밝히겠다.)에서 이 책에 나오는 경제학적 논의는 모두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에 번역된 『꿀벌의 우화』는 문예출판사에서 최윤재 교수님의 역본이 유일한데 이 역본에서는 원전을 완역하지 않았고 일부만 번역되어 내가 쓰는 이 글에는 『꿀벌의 우화』에 담겨있는 사상이 온전히 녹여있지는 않다는 것(아니 설사, 완역이 되어있다고 해도 내가 그럴 능력이 되는지도 의문이다.)을 밝힌다.(『꿀벌의 우화』를 원전으로 읽고자 하는 이를 위하여 주소[https://www.gutenberg.org/files/57260/57260-h/57260-h.htm]를 남겨둔다.) 『꿀벌의 우화』가 담고 있는 핵심 사상이 잘 담겨있는 다음의 문장을 시작으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자.


우화의 전체적인 뼈대는, 황금시대에 있을 법한 미덕과 순수함으로는, 부지런하고 부유하고 힘센 나라에서 누릴 편하고 훌륭한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세상이 생겨난 첫날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튼튼하고 부유하고 예의 바른 모든 왕국과 나라에는 늘 악덕과 불편함이 있기 마련인데, 잘 사는 나라가 되어 그에 걸맞는 모든 혜택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악덕과 불편함을 큰 소리로 나무라며 투덜댄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바보짓이라는 것이다.


2. 꿀벌의 우화

 『꿀벌의 우화』는 원래 운문으로 되어 있으며, 읽기에도 그리 어렵지 않고 길지도 않다. 하지만 그것을 여기에 그대로 적을 순 없으므로 내 나름대로, 아주 약간의 창작도 가미하여 아래와 같이 산문의 형태로 요약하고자 한다.

 꿀벌들이 사는 나라는 산업, 정치, 국방 등 나라의 어느 부분을 보아도 흠잡을 데 없는 부강한 나라였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나 으레 존재하는 불평불만 많은 족속들 역시 꿀벌 나라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번 인간의 언어를 빌려 이 꿀벌들이 사는 나라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나라에서는 사치와 향락이 마치 국민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소양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꿀벌들은 도무지 절제라는 미덕을 모르는 듯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사는 것을 갈구했다. 어쩌면 꿀벌들은 그 상품이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품들을 사는 그 행위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많은 꿀벌들이 생산 라인에 달라붙어 공장에서 수많은 상품을 만들어내도 그 상품들은 만들자마자 팔려나갔으며, 오히려 상품을 만들어낼 생산 라인에 꿀벌이 없어 공장장은 골머리를 썩였다. 공장에서 꿀벌들이 상품을 만들고 그 상품들을 사 가서 금방 싫증이 나 상품들을 버리는 꿀벌들을 보노라면,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종이를 열심히 갈아 넣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파쇄기가 떠오른다.
 꿀벌 나라와 파쇄기와 비슷한 구석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소음'이었다. 수많은 공장을 돌리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 상품들을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채우는 거리의 왁자지껄한 그 소음 말이다. 이와 같은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메워진 거리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은 바로(독자들도 아시겠지만,) 도둑, 사기꾼, 노름꾼, 소매치기 등과 같은 남의 등골을 빼먹는 자들이다. 오, 하지만 독자여. 너무 이 자들을 욕하진 마시길. 꿀벌들의 나라에는 자신이 정직하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이 악당들과 진배없었는데 그 구체적 면면들은 다음과 같다.
 변호사라는 것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을 싸움 붙이고 그 싸움에 끼어들어 한몫 챙기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며, 일을 하다가 자신의 논리가 궁지에 몰릴 때면 법전을 붙들어 매고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 마치 도둑이 어떤 루트로 집을 털어야 경찰한테 안 걸릴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의사는 어떻게 하면 환자를 고칠지 자신의 의술을 고민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이 환자들이 자신의 몸짓, 화술과 같은 '서비스 정신'에 감화되어 아프면 자신을 찾아올지 고민했다. 원래는 이러한 악당들이나 '불행하게도'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보살펴 신의 품에게 인도해야 하는 우리의 거룩한 성직자들 또한 품고 있는 탐욕이란 것이 그 악함의 정도가 악당들에 전혀 뒤지지 않아 신께 빵을 더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더랬다. 이와 같이 아무리 왁자지껄하고 탐욕으로 그득한 나라라도, 이 나라를 반드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군인들은 있어야 하는 법인데, 혹독한 전투에 참전하여 팔다리를 잃어 빌어먹고 사는 군인이 있는가 하면 개중에는 뇌물을 받고 적국의 군인을 풀어주는 이, 전투에 참전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고사는 군인도 있었다.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재판관은 어떠한가. 꿀벌 나라의 재판관은 재판관이 쓰고 있어야 할 안대는 벗어재낀지 오래였고,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금을 들고 있었다. 이 재판관이라는 종자들은 돈 많고 힘센 자가 한 손에 금을 그득히 쥐어주면 그 칼을 약자에게, 삶이 너무나 어려워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향했으며, 정작 돈 많고 힘센 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안대를 찾느라 급급했다.
 꿀벌들의 나라는 이렇게 악이 번창하는 나라였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것이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꿀벌들의 나라를 하나하나 떼어보면 악이었지만 전체를 보면 낙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 살펴본 추악한 꿀벌들의 모습들은 탐욕, 오만, 시기, 사치와 같은 악덕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는데 이 악덕이라는 것은 잘 활용만 한다면 한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꿀벌들의 나라는 그런대로 악덕이 아주 적절히 작동했다. 꿀벌들의 사치와 탐욕은 공장장으로 하여금 많은 상품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했고, 공장장은 그로 인해 더욱 많은 일꾼이 필요하여 일자리가 남아돌 지경이었으며, 다시 공장의 수많은 일꾼들은 자신들의 사치와 탐욕을 채우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는 식으로 이 악덕이라는 것은 오히려 꿀벌들의 사회의 '선순환'을 창조해냈다.
 하지만 하루는 잘만 다른 꿀벌들과 똑같이 속임수를 써가며 기꺼이 악덕을 베풀던 저 불평불만 많은 족속들 중 하나가 여태까지 자기가 등쳐먹은 불쌍한 다른 꿀벌들은 생각도 안한채 도대체 이 땅에 정의가 어디에 있느냐며, 신에게 이 땅에 정직함을 내려달라고 간절히 외쳐댔다. 그간 약자들의 신음에는 꿈쩍도 안 하던 신은 이번에는 돌연 저 꿀벌의 기도를 들어줬다. 그로 인해 정직해진 꿀벌들은 자신들이 저질러왔던 수많은 악행들을 깨닫고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했으며, 악덕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저 탐욕스러운 얼굴에서 악덕이 한 꺼풀 벗겨지자 오히려 서로를 어색해했다. 채무자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으면서까지 빚을 갚기 바빴고, 채권자들은 도저히 갚을 능력이 못 되는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줬으며, 변호사의 억지스러운 주장으로 시끌벅적하던 재판정은 더 이상 재판할 거리가 없어지자 금세 조용해졌고, 우리의 선한 길로 들어선 정직한 변호사들은 이제 굶어 죽을 처지에 놓여있게 되었다. 악덕이 사라진 나라에 더 이상은 감옥, 감옥을 지키는 옥졸들은 필요가 없어졌고, 이들은 재판관, 변호사, 그리고 사회의 정의를 등한시하던 정의의 여신과 무리를 이루어 꿀벌들의 나라를 떠나갔다. 그 외에도 의사도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으니, 아픈 꿀벌들은 이웃의 꿀벌들이 발 벗고 나서서 아픈 꿀벌들을 치료해줬기 때문이다. 교회의 식량만 축내던 높은 자리에 오른 성직자들은 더 이상 하잘 데기 없는 일에 몰두하지 않고 신께 이 나라의 축복을 내려달라고 온몸으로 기도하여 예전만큼 많은 성직자가 필요 없어져 성직자들도 나라를 떠나갔다. 임금과 나라를 섬기던 신하들도 예전에는 자기들의 악행을 눈감아주고 서로 도와주느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여 많은 신하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턱에 신하들 또한 나라를 떠나는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렇게 수많은 꿀벌들이 앞다퉈 나라를 떠나게 되었고, 쉴 새 없이 공장을 가동하여 기껏 만들어놓은 물건들은 팔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결과로 또다시 공장을 운영하는 공장장이들과 매점의 상인들도 나라를 떠나게 되었고 살(buy) 사람도, 살(live) 사람도 없어져 부동산 가치는 폭락하였으며 향락을 즐기던 이가 없어져 술집과 술집의 기생들도 모두 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이전의 사치를 일삼던 이들이 없어지니 자신이 만든 예술품, 공예품을 살 이들을 위하여 하늘이 주신 영감을 끊임없이 발휘하던 예술가들은 더 이상 그런 쓸모없는 것들은 만들어내지 않았다. 또한 나라에 진귀한 열매들도 그것을 원하는 이가 없게 되자 굳이 수고로움을 들여 진귀한 열매를 수확해올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되어 꿀벌의 나라에서 그러한 열매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렇게 수많은 이가 나라를 떠나게 되어 마침내 전쟁이 발발해도 싸울 이가 그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어, 승리를 쟁취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에 따른 댓가는 너무나 혹독했다.


 위의 내용이 『꿀벌의 우화』의 요약한 내용이다. 내용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맨더빌이 자신의 서문에서 밝힌 대로, 『꿀벌의 우화』는 사회에서 각 역할을 담당하는 자들의 악덕을 먼저 보여준 뒤, 이러한 악덕을 잘 다루기만 하면 사회 구성원이 두루두루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만약 이와는 반대로 사회의 구성원이 악덕을 행하지 않고 미덕과 절제 등 선행을 실천하면 어떠한 댓가가 따르는지 보여주는, 말 그대로 어떠한 교훈을 담고 있는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꿀벌의 우화』 자체가 전하고 있는 바는, 누누이 얘기하듯이 간단하다. 바로 '사치'와 '탐욕'이 인간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으며, 이런 사람의 욕심을 자극하지 못하는 사회는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는 단순히 저 우화를 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저 『꿀벌의 우화』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배척받는 악덕이 사회에 이익이 되고, 미덕이 오히려 해가 된다면, 맨더빌은 그 미덕이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3. 미덕은 어디에서 오는가?

 맨더빌은 먼저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사람은 ‘이기적이고 고집 세고 약삭빠른 짐승’이기에 오직 인간만이 사회를 결성하여 살아간다고 말한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것은 맨더빌은 분명히 사람의 천성이 좋은지 나쁜지, 즉 맨더빌 자신이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다만 동물 중에서도 이기적이고 유난히 약삭빠른, 머리가 좋은 동물이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물론 누군가는 ‘이기적이고 고집 세고 약삭빠르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천성이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적어도 맨더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저러한 천성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고, 이러한 성향은 그가 주장하는 사상을 보면 납득할만한 것이다.


 맨더빌은 인간들이 무리 지어 사이좋게 잘 살도록 하는 데에는 무력만으로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무력보다는 오히려, 서로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각자에게 더 큰 이로움을 불러온다고 믿게 하는 것이, 그것을 손수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에 수많은 도덕군자와 철학자들이 동원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사회 구성원 개별 개체에게 손수 보여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공동의 선을 앞서서 추구하는 사람들도 별다른 수고로움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공동의 선을 추구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체험하는 '수혜자'들도 좋아할 만한 속임수를 꾸며내기에 이른다. 그 속임수란 바로 전 인류에 대한 '아첨'이었으며,  이 '아첨'은 인간 이성에 대해 가해졌다.


그들은 우리 본성에서 장점과 단점을 속속들이 살핀 끝에, 치켜세우는 데 끌리지 않을 만큼 막된 것도 없고 깔보는데 참고 있을 만큼 못난 것도 없음을 보면서, 사람이라는 짐승에게는 아첨이 가장 잘 듣는 약이라고 마땅히 매듭짓게 되었다. 사람을 홀리는 이 연장을 가지고 그들은 우리 본성을 다른 짐승들에 앞서는 뛰어난 것으로 올려놓았다. 또한 우리가 놀랍도록 똑똑하고 폭넓게 안다고 끝없이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우리 넋에 들어 있는 이성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고귀한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줄줄이 찬사를 쏟아내었다.


 이 철학자들은 동물과 인간이 다른 이유가 바로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파하며 인간을 치켜세웠다. 동물은 이성을 갖고 있지 않아 자연의 충동이 시키는 바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이다. 가령, 수컷 원숭이가 발정기에 교미를 원하지 않는 암컷 원숭이에게 짝짓기를 강제로 하는, 인간으로 치면 강간을 하는 행위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인간 중 그 누구도 저 수컷 원숭이를 욕하지는 않는다. 저 철학자들이 설파한 것에 따라 인간에게 들이대는 잣대와 동물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이, 실상 그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하등 다를 게 없는 행위인데도 불구하고, 저런 행위를 똑같이 하면 그 사람은 ‘범죄자’가 된다.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해보자. '만물의 영장'이라 칭송받는 인간도 결국에는 동물에 불과하다. 원숭이에게 자연이 강요하는 충동과 인간에게 자연이 강요하는 충동의 정도에 과연 차이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단 하나의 차이는, 그러한 충동을 동물들은 무제한적으로 현실에서 실천하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은 (사회가 말하는 '범죄자'와 같은)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그 충동을 성공적으로 억제하며 살아간다는 점에 있다.(한 가지 생각해볼 만한 점은 그러한 충동을 억제하려는 이유가 어쩌면 성선설이 맞는지, 성악설이 맞는지를 나누는 잣대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 성선설의 경우 인간이 동물과 달리 저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이유가 인간만이 가진 연민에서, 자신과 동류인 다른 개체가 고통을 받는 모습을 견디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성악설의 경우 단지, 저러한 행위를 하면 처벌을 받고 다른 개체들에게 배척을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리스크를 감수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철학자들은 이렇게 동물과 달리 그 충동을 억제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이라고 규정하였고, 충동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규정한 것은 어쩌면, 맨더빌이 지적한 것과 같이 그러한 충동이 인간과 동물에게 똑같은 강도로 작용한다는 것을, 동물이 그러한 충동을 억제하는 것과 딱 그만큼 인간도 그러한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고 철학자들 스스로가 시인한 것과 같다. 만약 저러한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운 일이었다면 철학자들이 전 인류에게 가하는 아첨은 그리 '약빨'이 안 먹혔을 것이다.(누구나 자신이 어려운 일을 한 것에 대해 칭송받는 것을 원하지,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칭송받는 것은 오히려 비꼬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고안해낸 마지막 방법은 자연의 충동을 억제하지 않는 사람과 자연의 충동을 억제하여 타인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사람 사이에 계급을 나눈 것이었다. 전자를 첫 번째 계급, 후자를 두 번째 계급이라고 하자. 계급이 나눠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계급에는 상하관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누구라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더 높은 계급에 속하기를 원하며, 이러한 욕구에서 높은 계급은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계급이 된다. 또한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이러한 상위 계급에 대한 존경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낮은 계급 자체에 대해서, 자신이 낮은 계급에 속해있다는 것에 대해 함구하게 되는데, 그것이 저 높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과 자신들을 비교해 볼 때 부끄럽고, 자신이 천박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폐의 욕구에서 번째 계급의 사람들은 번째 계급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소위 '미덕'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좋은 것이라고 찬양하는 것을 마지않으며, 자신도 그러한 미덕을 갖고 있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게 된다. 물론, 그들이 번째 계급에 속해있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고, 그들 자신도 그걸 아는지, 혹은 은폐의 대상이라는 것에 자기 자신도 속해있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불확실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철학자들의 방법은 첫 번째 계급과 두 번째 계급의 사람들 모두에게 잘 먹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쨌든 사회 공동의 선을 위하여 모두가 노력하게 되면, 이를 위해 노력한 그 자신도 공동의 선의 수혜를 입게 되어 좋고, 그로 인해 선을 위한 노력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사람의 노력으로 인해 자신도 수혜를 입게 되므로 그가 잘 해내기를 진심으로 바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찌 보면, 인간의 탐욕과 관련해서도 남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탐욕을 무제한적으로 충족시키다 보면 타인과 으레 부딪히기 마련이고, 이러한 갈등은 개인에게 매우 귀찮은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공동의 선을 추구하면서 적당히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킨다면 버나드 맨더빌의 표현대로 꽤 '점잖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먼 옛날 아주 솜씨 좋은 철학자와 정치인들이 고안해낸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는 미덕이 좋은 것이라고 모두가 떠벌리고 다니게 되고,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자들조차도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미덕을 신봉하며, 자신의 내면에는 저러한 미덕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통에 도무지 이러한 미덕에 감히 대들지 못하게 되며 미덕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히게 된 것이다.


 맨더빌은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어떠한 선함을 행동에 옮길 때에 저러한 계산적이고 속물적인 마음을 내심 품고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자신이 선행을 베풀 때에 바라는 보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자신이 선행을 베풀었다는 그 기쁨만이 바라는 보상의 전부일 수 있다. 그리고 맨더빌은 이러한 순수한 미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연민'으로 뽑고 있는데, 맨더빌이 이 책 전체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연민이란 가장 선함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것이고, 연민 또한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라는 점이다.


연민은 우리 감정 가운데 가장 부드러우며 나쁜 뜻이 가장 적게 들어 있지만, 우리 본성의 약한 부분임은 분노나 뽐내는 마음이나 두려움과 매한가지다. 마음이 여릴수록 연민이 많으니, 여자와 어린아이보다 동정적인 사람은 없다. 우리가 가진 모든 약점 가운데 연민이 가장 사랑스럽고 미덕에 가장 가깝다는 것은 인정한다. 아니, 연민이 적잖이 섞여 있지 않다면 사회는 거의 살아남지 못한다.


 연민이란 맨더빌의 표현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의 불행과 재난을 동료 의식으로 슬퍼해주는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 연민이라는 것은, 다른 감정의 경우 앞서 설명한 뽐내는 마음, 자신의 이성이나 자신의 미덕에 아첨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어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연민의 경우 그러한 뽐내는 마음 없이 가장 순수하여 사람들이 으레 말하는 '미덕'에 가장 가까운 마음이라고 맨더빌은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순수하다는 속성으로 인하여 연민마저도 사회에 독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연민이 악에 호소를 할 때이다. 예를 들어 거지가 적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가슴 깊이 연민을 느껴 거지에게 적선을 마구 해준다면, 오히려 거지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람들이 주는 돈을 받아 그저 편하게 살아가려고 할 것이다. 또한 재판관이 흉악범에게 형량을 선고할 때에, 그 흉악범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면 사회의 정의가 그 흉악범에게 냉철하게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 하나, 연민이 품고 있는 한계는 바로 자신과 물리적으로 가까운 대상에게만 느끼게 되는, 그 대상에 있어서는 선택적 감정이라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의 어딘가에서는 어린아이가 기아에 허덕이며 비참한 몰골로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아이와 비교하여, 잠시 편의점에 가려고 집을 나섰는데 길가에 혼자 엉엉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고 상상해보자. 나는 아프리카의 어린아이에 대해서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생각으로, '어휴, 불쌍하다.'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어떠한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저 엉엉 울고 있는 아이에게는 먼저 다가가 왜 이렇게 울고 있는 것인지, 내가 무엇을 해주면 울음을 그치고 아이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에는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아는 것과 직접 TV나 다른 대중매체를 통해서 그러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다른 강도로 나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맨더빌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연민이 눈이나 귀로 들어온다고 한 내 말을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맞는다는 것은, 대상이 가까이 있을수록 더 고통받고 멀리 있을수록 덜 걱정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맨더빌은, 연민이라는 감정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대상에게 동료애,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즉 연민을 통해 선행을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가 그것을 치하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하며, 그 자신도 자신이 '연민'이라는 미덕을 베풀었다고 큰소리쳐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여기까지가 맨더빌이 미덕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고, 미덕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로 선한 마음에서 오는지에 대해 품은 의구심,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이다. 맨더빌은 위와 같이 미덕이라는 것이 정말로 선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이 미덕을 좋아하고 악덕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고,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아무리 어떤 사람이 선행을 베푼다고 해도 그 선행이 비교적 순수한 것인지, 아니면 '뽐내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계산적인 행동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좋아하는 '미덕'이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4. 사회의 본질

 맨더빌은 여기에 이르러서는 사회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게 된다. 앞서 살펴본 것은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고 그러한 본성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인간을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면 이 절에서는 그렇다면 사회의 기원이 무엇인지, 사람만이 어떠한 좋은 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는 달리 사회적 동물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진다.


 먼저 맨더빌은 당시 섀프츠베리 백작이 쓴 《특성》이라는 책을 언급하면서, 이 책에서 섀프트베리가 말한, '금욕하지 않고서도 미덕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반박한다. 한 가지 밝혀둘 것은, 각주에서 최윤재 교수님은, 섀프츠베리는 실제로는 미덕을 얻으려면 금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두 가지의 주장, '금욕하지 않고서도 미덕을 얻을 수 있다.'와 '미덕을 얻으려면 금욕이 있어야 한다.'라는 두 주장에 대해 맨더빌은 모두 말하고 있으므로 두 가지 주장에 대해 맨더빌이 어떻게 반박을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나는 개고기를 얼마 전에 처음 먹어봤다. 딱히 어떤 음식에 대해서 그것이 특이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면(예를 들어, 개불, 꼼장어) 거부감이 없는 나에게 개고기도 똑같은 '고기'일뿐이었고, 다른 고기와 특별히 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개고기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도 많은 듯하다. 2016년 리우 올림픽 당시 양궁 국가대표 기보배 선수의 부친이 인터뷰에서 기보배 선수가 보신탕을 먹는 날이면 좋은 성적을 냈다는 내용을 본 어떤 이가 '한국을 미개인의 나라라고 선전하느냐'라고 비판한 일이 있었다. 개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어떤 법에 적혀있기라도 한가? 외국에서 이에 대해 미개하게 본다는 것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개는 닭, 소, 돼지와는 다르게 체내에 아주 위험한 독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요, 개가 닭, 소, 돼지와 다르게 정말 어떤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유독 개고기에게만 그러한 엄격한 잣대가 부여되는 것인가? 나는 모든 고기는 똑같은 고기라고 생각을 한다. 물론 개고기의 유통과정, 생산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윤리적 관점에서 사회가 나서서 개선을 해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러한 동물에게 가해지는 비윤리적 행태는 오직 개에게만 유독 더 심하게 가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누군가가 개고기를 싫어한다면 자기가 개고기를 안 먹으면 될 문제이지, 그것을 남에게 강요할 권리와 자유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이와 같이 '무엇을 해야 한다', '무엇이 좋다'라고 하는 미덕은 시대와 장소에 있어서 상대적인 성질을 갖는다. 맨더빌이 지적한 것과 같이 아랍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자연스러운 제도처럼 받아들여지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금욕하지 않고서도 미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 인간 본연의 모습이 바로 미덕을 타고난다는 주장이다. 그 누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즉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려는, 금욕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미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맨더빌은 이 주장에 대해, 미덕이라는 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미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고로 그러한 절대적 미덕이 존재하지 않을진대, 인간 본연의 모습에 미덕이 담겨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 도덕적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은 부질없이 기러기 잡겠다고 쫓아다니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다음은 '미덕을 얻으려면 금욕이 있어야 한다.'라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만약 어떤 이가, 심성이 착하고 얌전하며, 남들보다 배는 똑똑한데도 불구하고 홀로 유유자적한 곳에서 평생 즐기면서, 단지 가끔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안출해낸 사상에 대해서 설파하면서 산다고 한다면 그는 세간에서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칭송받을 것이다. 하지만 맨더빌은 그가 사실은 전혀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그가 정말로 그렇게 도덕적이고, 이지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는 반드시 공직으로 나아가 이 사회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일말의 도움이라도 줬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덕은 행동에 있는 것이다. 그처럼 사회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신분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어떤 공직으로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서, 일할 수 있을 때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잘되도록 스스로를 다 바쳐야 한다.


 즉, 맨더빌은 사람이 아무리 금욕한다고 해도 거기서는 미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금 예로 든 저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한다면, 만약 저 사람이 위에서 말한 뽐내는 마음이든, 이 나라의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마음이든, 그것이 어떠한 악덕에 가까운 마음이든 간에 금욕을 통해서는 절대로 저 사람은 공직에 나아가지 않을 것이고, 나라는 크나큰 인재를 하나 잃어버린 꼴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더하여 맨더빌은 알렉산더 대왕이 열정, 아니 광기에 가까운 열정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또한 키케로도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허영심이 아니었다면 그만한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맨더빌이 저 섀프츠베리 백작에 대해 반박한 주장이 있으니 바로, '사람은 사회를 이루어 살게 되어 있다.'라는 주장으로, 사람이란 무릇 어울리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맨더빌은 첫째, 그 사람이 교양 있고 정말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화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즐거워 기꺼이 이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보단 혼자서 시간을 보내길 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만약 맨더빌의 주장을 오해한 것이 아니라면 이 주장은 조금은 말장난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둘째, 이것은 사람이 무릇 어울리기 좋아하며, 그러한 인간이 가진 사회성으로 인해 인간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진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인데, 만약 인품이 좋고 덕망 있는 사람이 저렇게 사회성이 좋기 마련이라면 섀프츠베리 백작이 주장한 바에 따라 그러한 사람이 많을수록 자신의 덕성을 그 특유의 친화력을 이용하여 사회에 널리 퍼뜨릴 것이니 저 주장이 맞겠지만, 맨더빌은 대개 '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마음 약한 사람, 반성을 싫어하는 죄진 사람, 제 손으로는 쓸 만한 것을 만들어낼 줄 모르는 하잘것없는 사람'들이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며, 덕망 높고 똑똑한, 사회에서 말하는 선한 사람은 혼자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저 주장도 틀리다고 말한다. 이 주장 또한 개인적으로는 선한 사람들 중에서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은둔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악한 사람들 중에서도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은둔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즉 이 주장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맨더빌이 섣부른 일반화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기에 딱히 동의를 하지는 않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맨더빌은 저렇게 섀프츠베리 백작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사회성이라는 것이, 무릇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거나, 자신이 가진 덕성을 온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이를 위해 맨더빌이 예로 든 것을 설명하면, 만약 우리가 타국에 홀로 배낭여행을 떠났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발견한다면 그 아무리 사교성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들에게 반갑게 먼저 인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을 만났다는 아주 단순한 반가움 외에도, 어쩌면 그 사람에게서 여행지에 대한 정보, 알아두면 좋을 것 등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맨더빌은 이렇게 사람이 서로 어울리는 것 또한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인간이 거기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맨더빌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여태까지 살펴본, 인간이 노력하지 않아도 덕성을 갖고 태어난다는 주장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주장에 대한 맨더빌의 반박이 나타나 있는 구절이다.


내가 이제까지 애써 보여준 것은 도덕적 아름다움, 뛰어남, 참된 가치 같은 걸들이 불안정한 것이고 유행과 관습을 좇아 바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확실한 것이라 전제하고 거기서 이끌어낸 이야기는 별것이 아니며, 사람이 원래부터 착하다는 너그러운 생각은 그릇된 판단을 하도록 해를 끼치는,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이것을 나는 역사에서 가장 뚜렷한 사례들을 들어 보여주었다. 나는 어울리기 좋아하고 홀로 있기 싫어한다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바닥에 깔린 속마음을 샅샅이 살폈으며, 이들이 모두 자기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 절에서 맨더빌이 마지막으로 다룬 것은, 그렇다면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자연 상태에서 품성이 특출 나게 바른 동물이라서 사회를 이룩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자신이 사회를 결성하여 살아가기를 좋아하는 동물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게 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첫 번째 이유로 맨더빌은, 섀프츠베리 백작이 지적한 것과는 정반대로 인간의 성품이 '나쁘고 밉살스러워서', 그리고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뛰어나지 못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인간이,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사바나의 초원에서 소규모의 가족을 이루고 열매를 채집하고, 가끔 운 좋은 날에는 다 같이 뭉쳐 힘겹게 잡은 고기를 맛있게 먹으면서 만족감을 얻었다면 과연 인간이 큰 사회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그 사회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위의 『꿀벌의 우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치품이 그 수요가 없다면, 즉 사치품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탐욕이 없다면 사치품은 더 이상 생산되지도, 팔리지도 않는 이치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현대에는 그 악함으로 치부하는 정도가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는 탐욕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지난 억겁의 시간 동안 사바나 초원에서 맹수에게 쫓겨다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맨더빌이 말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 자체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먼저 물리적으로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에 대해 말해보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나은 것이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새처럼 하늘을 맘껏 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고양이처럼 날쌔게 달려가거나 몸이 유연한 것도 아니요, 강아지처럼 후각이 그렇게 좋지도 않고, 맹수들처럼 힘이 세지도 않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 오늘날에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치켜세우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자연은 매우 척박한 곳이었기에 인간은 나름대로 궁여지책을 마련한 것이고, 그러한 궁여지책이 모이면서, 세대가 거듭하면서 발전하여 사회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이 겪는 자연에서의 물리적 어려움에 더하여, 맨더빌은 인간들이 포악한 짐승이라기보다는 '겁이 많은 짐승이어서 평화와 평온을 좋아'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방해받지 않고 싶어 하고 그러한 방해받지 않기 위한 발명품으로서 정부가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이 맨더빌이 『꿀벌의 우화』에서 밝힌, 인간의 미덕의 실체,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의 실체이다. 물론 맨더빌의 말이 모두 다 맞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 내가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맨더빌이 글을 이상하게 적어놓은 것인지는 몰라도, 맨더빌의 주장이 엄밀하게 논리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꿀벌의 우화』에서 '우화' 자체도 그렇고, 그리고 그 우화에 덧붙여 맨더빌이 주장한 것들은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생각 된다.


5. 욕구를 인정하라, 너 자신을 알라.

 맨더빌은 제일 앞서 자신이 이 글을 쓴 이유에 대해서 첫째, 그저 사회, 남의 욕을 일삼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끄러움을 느끼길 바랬다고 말하고, 둘째, 정부가 어떠한 '삽질'을 하고 어떤 이가 안락한 사회에서 살길 바란다면 그는 그러한 정부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용인할 수 있길 바랬다고 말한다. 나 또한 이러한 맨더빌이 『꿀벌의 우화』를 쓴 이유와 비슷하게 이 글을 쓴 이유이자 『꿀벌의 우화』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바를 말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끊임없이 남을 헐뜯는 사람들이 이것을 읽게 되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될 것이고, 제 마음을 살펴보면서 이래저래 저도 저지르기 마련인 잘못을 두고 끊임없이 욕을 퍼붓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것이다. 다음으로는, 넉넉하고 편안한 것을 찾으면서 잘 사는 큰 나라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 세상 어떤 정부도 고칠 수 없는 불편함을 이제 더욱 참을성 있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니, 뒤의 것 없이 앞의 것을 누릴 수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맨더빌이 말한 정부의 '삽질'은 아마 어떠한 악행과 관련된 삽질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하등 필요도 없어 보이는 대규모 토목공사 같은 것들, 그러니까 실제로는 실용적 목적이 충족되지 않지만 일자리는 충족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정책들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정반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현 정부는 맨더빌이 얘기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탐욕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욕구를 충족시키려 드는 사람들을 '나쁜 사람' 취급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내가 들은 정치인들의 막말 중 가장 개탄스러웠던 말을 뽑으라면 바로 이 말이다.


1. 우리들 "개천에서 용 났다"류의 일화를 좋아한다. 그러나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10대 90 사회'가 되면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줄었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2.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 쳐다보며 출혈경쟁하지 말고 예쁘고 따뜻한 개천 만드는데 힘을 쏟자!


 이 말이 올해에 처음 나온 건 아니고 2012년에 처음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트위터에 쓴 글이긴 하지만, 적어도 나는 비교적 최근에 저 말을 처음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이다. 모두가 용이 되기를 바라지만 용이 되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고, 나머지는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 수밖에 없는데, 만약 내가 용이 될 수 없다면 그 개천이 용이 사는 하늘 못지않게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맨더빌의 사상에 따르면,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렇게 개천을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장소로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를 욕망한다. 말을 하자면 높은 지위인 거지, 돈이 많은 것을 욕망할 수도 있고, 정말로 판검사라든지 사회에서 촉망받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러한 욕망을 억누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개인에게 정말로 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설사, 주장이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해도, 과연 용이 사는 하늘과 '가붕개'가 사는 개천이 무차별하다면, 내가 판검사를 하나, 의사를 하나, 하루하루 그저 연명하는 여러 직업을 떠도나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 사회가 발전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정부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말한 것처럼 이 사회를 정말 안락한 개천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만들어놨다고 한다면 이렇게까지 내 글에서 비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는 겉으로는 저렇게 번지르르한, 아무 생각 없이 듣기에는 좋은 말들을 늘어놓고, 그와 동시에 소위 탐욕을 갖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마치 '악한'들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부동산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등과 같은 대립 속에서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어느 한쪽에 대하여 '적폐'라는 낙인을 찍고 그들에게 페널티를 부과하고 어느 한쪽 보고 '양심'을 들이밀며 무조건적으로 양보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는 대책을 내놓고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 정부는 내가 볼 때, 그저 탐욕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지 혼자 용이 되어 '탈개천'하려고 한다며 '적폐'로 몰아가고, 국민은 또 이에 부응하여 편 갈라서 자기들끼리 싸우니, 평범한 회사원인 나조차도 정말로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아래의 멘더빌의 글은 이러한 우리 정부의 문제점을 잘 꼬집고 있다.


한 나라 힘을 키우는 데에 무역이 첫째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밖에도 챙겨야 할 것들이 있다. 내 것과 네 것이 확실해야 하고, 범죄는 처벌되어야 하고, 사법과 관련하여 모든 법을 슬기롭게 만들어 엄격하게 집행해야 한다. 외교 또한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며 각 나라에 나가 있는 대사는 정보를 잘 챙겨서, 어떤 나라가, 그 옆 나라 때문에 또는 힘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우호적으로 또는 적대적으로 되는지 잘 알아야 하며, 그에 따라 정책과 힘의 균형에 맞추어 어떤 나라는 막고 다른 나라는 도울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대중이 경외심을 갖도록 하고, 양심을 강제해서는 안 되며, 성직자는 구세주가 허락한 이상으로는 나랏일에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세속적인 위대함을 얻는 기수이다. 군주국이든 연방이든 둘 다이든, 웬만큼 다스릴 만한 나라를 가진 군주가 이를 잘 지킨다면, 다른 힘센 나라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잘살게 하지 못할 까닭이 없으며, 사치나 그 어떤 악덕도 법질서를 흔들지 못할 것이다. 


 맨더빌이 『꿀벌의 우화』를 쓴 첫 번째 이유인 사회, 남의 욕을 일삼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길 바랬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위와 달리, 우리 사회에 정확히 들어맞는 듯하다. 내가 옛날에는 어려서, 그저 지각이 없어서 못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사회를 바라보자면 정말 사회 구성원 전부가 '정의의 투사'인 것처럼 느껴지며, 내가 전의 글(https://brunch.co.kr/@macather0998/5, '『전락』, 카뮈의 현대인에 대한 고발')에서 쓴 것처럼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이 마치 저마다의 '심판관'이 되어 누군가를 심판하는 모양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선하다며, 자신이 정의롭다고 말하며, 어떠한 사건이 벌어지면 '좌표'를 찍고 우르르 몰려가 소위 말하는 '정의구현'을 하기 바쁘다. 만약 그 정의구현의 대상이 정말로 악독한 범죄자에게 겨냥되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는데, 누군가 정말로 잘못을 한 것인지 아닌지 불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자의적으로 '저 사람이 바로 악독한 사람이다!', '저 사람은 쳐 죽일 놈이다.'라며 마녀사냥을 하기 급급한 모양새가 가끔은 유치해 보일 지경이며, 심지어 유력 대권주자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여당, 야당의 당권을 가진 자들도 이러한 심판에 동참하는 것을 보노라면 나는 또다시 개탄을 금치 못하겠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정의로운 심판관'이며 다른 누군가가 '악당'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내가 보기에, 그 자신도 또 다른 악당에 불과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장하는 단지 불순분자에 불과하다. 이러한 자들이 많아서는 사회가 발전할 수 없으며, 소모적인 논쟁만 불러일으킬 뿐이고, 사회의 분위기를 냉각시켜 유연한 사고가 더욱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부디 이러한 자들도 위에서 맨더빌이 말한 것처럼, 그 자신은 정의롭다고 믿겠지만, 자신 안에는 자신이 그토록 찬양하는 정의로운 마음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자연의 충동, 악덕도 함께 갖고 있음을 깨닫고, 저 델포이 신전에 적혀있는 말('너 자신을 알라')처럼 자신을 한번쯤은 되돌아보길, 그렇게 되돌아보고 자신에게도 허물이 있음을 깨닫고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에 대한 '혐오'를 멈추길, 이 글을 빌어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세상엔... 완벽한 사람은 없는 거예요. 사모님."(영화 『친절한 금자씨』中)

6. 맺음말

 군대에서 처음 읽었던 『꿀벌의 우화』는 나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었다. 내용 자체도 그리 어렵지 않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했기 때문에 그 메시지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원래 글을 쓰려고 했던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는 와중에, 루소가 『꿀벌의 우화』를 언급했길래, 다시 한번 책을 펼쳐보았더니 우리 사회에 매우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되어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개인적 이유라는 것도 내가 현재 읽고 있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는 『꿀벌의 우화』에서 경제학과 관련된 부분은 다루지 않기에 나도 그냥 읽지 않고 넘어간 것이다.


 여태까지 내가 말한 부분 중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든다면 여태까지 모든 투표를 참여한 나로서, 그리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 저러한 말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한 말이니 넓은 이해를 부탁한다. 또한 기회가 된다면 내가 이 글에서 다루었던 『꿀벌의 우화』를 한 번쯤을 읽어보길 강력히 권하는 바이며, 『꿀벌의 우화』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을 끝으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자연에 있어서나 도덕에 있어서나, 사회의 누구에게도 해될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좋은 것도 없으며, 또한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나쁜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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