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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an 29. 2018

발리의 춤들

발리의 춤은 트랜스, 즉 접신, 무아지경, 황홀경과 관련되어 있다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 춤추는 세계 #1


 4년 전 나는 발리를 여행했다. 한 달 간 느긋하게 쉬면서 발리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2017년 11월 말, 발리 아궁산 화산이 폭발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 여행이 생각남과 동시에, 행여 그 아름다운 풍경들이 부서졌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당시 직접 본 춤들은 많지 않았다. 조사 목적이 아닌 여행이었기에 관광객 용 공연으로 유명한 께착Kecak 춤과 레공Legong 춤을 보았을 뿐이다. 발리의 춤에 관해선 여행에서 돌아와 지금껏 틈틈이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마 께착 춤에서 받은 인상이 강하지 않았다면 발리 예술을 궁금해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힌두 서사시 라마야나를 내용으로 하는 이 춤은 수십 명의 남자들이 둥글게 둘러 앉아 ‘께착’, ‘께착’ 하고 외치면서 반복적인 동작을 한다. 후반부에 불길을 발로 차면서 추는 춤이 압권이다. 다들 최면 상태에서 추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합일된 분위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께착 원숭이 군단으로 출연한 사람 중에 내가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도 있었는데, 발리에서 행해지는 모든 춤 공연이나 의례들은 마을공동체 단위에서 조직하기 때문에 집집마다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의무적으로 출연해야 한다고 했다. 발리라는 사회는 발리 힌두교 신앙과 함께 강력한 마을 공동체 질서로 돌아간다고 볼 수 있는데, 마을 공동체에서 조화롭게 지내지 못하면 추방을 시킨다고 한다. 그 덕분에 전통예술이 유지될 수 있는, 참 신기한 곳이었다.


케착 춤 :

https://www.youtube.com/watch?v=v8cbRtFC0d4


 발리는 20세기 초중반 네덜란드 식민지를 거치면서 꽤 일찌감치 유럽과 미국에 그들의 문화를 선보인 편이다. 유럽 문화예술계에 원시주의가 유행할 당시 발리 또한 그런 호기심으로 찾는 여행자들이 많았다. 유럽 여행자들이 보기에 역시 신기했던 건 발리 춤이 트랜스, 즉 접신, 무아지경, 황홀경, 최면 상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발리 힌두교는 발리의 토착 신앙과 힌두교가 결합되어 있어서 인도의 힌두교와는 사뭇 다르며, 종교의식에 춤과 음악뿐 아니라 트랜스가 대부분 포함된다. 네덜란드 통치자들은 이런 점을 발리 문화의 고유성으로 인식하고 문화 보존 정책을 펼쳤다. 물론 통치자들 입장에서는 관광 수익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유럽인의 구미에 맞게 이 트랜스 상태를 관광객용 공연으로 재구성한 면이 많았다. 이 시기 창작된 께착 춤 역시 원래 마을 의례 중 일부에 라마야나 이야기를 넣어서 춤 공연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상향 데다리 공연


 상향 데다리Sanghyang dedari는 두 명의 어린 소녀가 추는 ‘신성한 선녀’의 춤으로 알려져 있다. 두 소녀는 접신하여 악귀를 막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사제가 물을 뿌리면 깨어난다. 이런 관광객용 공연에서 소녀들이 정말 접신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흥미로운 춤사위와 장면 구성으로 이루어진 것 같기는 하다.


상향 데다리 종교 의식


 실제로 마을에서 하는 종교의식으로서의 상향 데다리에는 이렇듯 정말 접신하는 소녀들이 등장한다. 이 소녀들은 춤을 배워본 적이 없다. 접신되었기 때문에 춤을 추는 것이다.


바롱댄스의 일부


 비슷하게 크리스Kkris 춤이 있다. 크리스라는 신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이 춤은 사자춤으로 알려져 있는 바롱Barong 춤의 뒷부분에 나온다. 악마의 흑마술에 걸려 궁전 경비원들이 자신을 스스로 찌르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마법에 걸린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트랜스 상태에서의 크리스 춤


 하지만 마을의 종교의식에서는 이렇게 접신된다. 꽤 섬뜩하다. 굿을 하면서 주최자나 연희자가 접신되는 건 봤어도, 이렇게 아이부터 노인까지 집단 트랜스에 빠지는 건 흔치 않은데, 이런 의식들이 발리 곳곳에서 매일 행해진다고 하니 정말 섬 전체가 접신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발리에서 한 달 씩이나 지내다 보니 간혹 동네 어귀에서 가믈란 연주 소리가 나고 흰 옷을 입은 동네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소리가 나는 담장 안쪽은 볼 수가 없는 배타적인 분위기였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만을 위한 행사이기 때문에 힌두교도가 아닌 관광객이 구경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 같다.


 연극학자 리차드 쉐크너는 <행위의 복원Restoration of behavior>(1985)에서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가 1938년 발리를 조사차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한다. 마을 종교의식에서 이런 트랜스 모습을 촬영하려고 하자 마을 지도자들이 미리 트랜스를 연습한 젊고 예쁜 여성들을 준비시켜뒀는데, 촬영이 시작되자 갑자기 어떤 할머니가 혼자 진정한 트랜스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할머니만 카메라에 담기게 되었다. 그러게 말이다, 접신이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겠는가.



 자연스럽게 되었건 연습해서 되었건 간에 접신은 발리춤의 중요한 요소다. 많은 발리의 춤들은 영적인 상태를 몸으로 표현한다. 트랜스를 하나의 장면으로서 구성한 것들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넓게 퍼져 있던 갖가지 궁중 춤과 종교의식 춤들을 적절히 섞어서 레퍼토리화한 것들이 오랜 시간 인기를 끌고 있고 이제 발리의 전통공연으로 인식되는 것을 보면, 제 3세계 식민지 도시가 관광지화되면서 덩달아 겪게 되는 전통춤 원형의 변형과 왜곡 현상을 그다지 나쁘게 겪은 것 같지는 않다. 


 연출가이자 연극이론가인 유제니오 바르바는 <연극인류학 사전: 연희자의 비기A dictionary of theatre anthropology:the secret art of the performer>에서 발리 춤의 근본적 에너지 흐름을 설명한다. 발리 춤꾼들은 이 에너지를 몸을 통과하는 자연의 힘, 바람으로 인식하는데, 이 바람은 강함과 부드러움의 섬세한 연결로 이루어진다. 이를 발리어로 마니스Manis(섬세함, 부드러움, 유순함)와 케라스Keras(강함, 엄격함, 단순함)로 표현하며, 몸의 여러 부분에서 계속 이 두 에너지가 수정되면서 춤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 개념들은 아니마, 아니무스와도 유비적으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고로 여성, 남성 연희자 모두 두 가지 에너지를 잘 다루는 훈련을 하며, 일상 속에서 고정화된 여성성, 남성성 이미지를 넘어 예술의 세계에 있는 특별한 존재를 드러내고자 한다.



 물론 발리춤에는 소녀들의 춤 레공 크라톤Regong Kraton이나 전사들의 춤 바리스Baris처럼 젠더를 드러내는 춤들도 있지만, 고정된 젠더 이미지로 그 춤사위들을 읽을 필요가 없다. 몸의 각 부분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면서 마니스와 케라스로 이어지는 움직임이 특이하며, 그 와중에 정교한 눈동자 표현과 발리식 무드라(손동작)를 끊임없이 바쁘게 하는 것도 대단해보인다. 한 손으로 세모, 다른 한 손으로 네모를 그린다거나, 한 손으로 배를 문지르고 다른 손으로 배를 두들기다가 갑자기 뒤바꾸는 행동을 떠올려보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매우 따라 하기 힘든 춤이다.


 무릎이 바깥을 향하는 턴아웃 자세로 다리를 굽히고 엄지발가락을 들고 이동하는 것 또한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다음에 또 발리에 간다면(화산 폭발 때문에 언제쯤 다시 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때는 직접 발리 춤 클래스에서 배워 보고 싶다. 세모 네모를 그리는 막막한 느낌일지, 아니면 의외로 술술 될지, 궁금하다.


바리스 퉁갈


레공 크라톤


타리 케비야르 두둑




발리의 전통춤, 자세한 이야기는 도서 『춤추는 세계』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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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허유미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춤과 관련된 수업과 글쓰기를 함께 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춤들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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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ricksmagaz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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