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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ul 02. 2018

실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2

자그레브의 '실연박물관'에서 삶은 사랑하는 일의 연속임을 깨닫는다.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 카페 미야 #12




 나는 단 한 번도 실연이 쉬웠던 적이 없었다. 이 나이쯤 되면 내공이 쌓일 법도 한데 상처는 늘 깊었고, 사랑한 시간보다 실연의 상처가 아무는 세월이 더 길었다. 왜 나는 이렇게 미련할까. 끝난 사랑에 허우적대는 내 모습은 항상 초라했다.


 크로아티아 남단의 작은 섬, 흐바르에서부터 시작된 요코언니와의 여행은 의도치 않게 지난 사랑을 되새김하는 여행으로 흐르고 있었다. 실연 박물관은 이 여행의 종착역처럼 느껴져, 저 멀리 눈에 들어오는 간판에 가슴이 다 떨려왔다.



 석사 과정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예술 디자인 인류학(Anthropology of Art and Design)’이었다. 교수님의 프레젠테이션을 20분 정도 듣고 90분 동안 토론하는 것이 수업 방식이었다. 그 날의 주제는 태평양 작은 섬에 사는 여성들의 카펫 직조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카펫의 무늬라든가, 색상, 짜임, 재질 같은 카펫 자체의 직관적 ‘미’에 대한 분석을 기대했다. 하지만 강의 슬라이드의 제일 첫 번째 장은, 베틀 앞에서 카펫을 한 땀 한 땀 짜고 있는 엄마와 그 옆에 앉은 어린 딸의 사진이었다.


 “이 카펫의 디자인 도안은 엄마의 머릿속에 있어요. 딸은 엄마 옆에 앉아 손의 움직임에 따라 만들어지는 카펫을 바라봅니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습득한 카펫 직조 기술은 세대를 거듭하며 전해집니다. 이 카펫이 단순한 카펫으로 보이나요? 이 섬에서 살아온 엄마들의 감성과 삶이 그대로 응축된, 살아있는 역사에요. 너무 멋지지 않나요?”





 실연박물관의 시작은 한 커플의 이별에서 비롯되었다. 예술가이고 전시 기획자였던 그들에게는 실연도 예술의 모티브가 됐다. 간직하자니 과거에 얽매인 듯싶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까운 물건을 전시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였다. (그동안 겪어본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감성을 생각해보면 이런 독창적인 감각은 놀랍지도 않다.)


 전시를 위해 자신들의 ‘실연 물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실연 물품도 기증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품에 얽힌 사연을 함께 동봉하도록 했다. 이는 의외로 큰 반향을 일으켜, 크로아티아를 넘어 세계 각지에서 실연 물품이 쏟아졌다. 2006년에 시작된 이 기묘한 전시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2010년, 자그레브에 정식으로 '실연 박물관The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이 문을 열었다.



 마치 성지에 다다른 것처럼 잔뜩 기대를 하며 전시실에 들어섰는데, 곧바로 머리가 멍해졌다. 전시품들은 창고에 처박혀 존재조차 잊혔을 것만 같은 하찮은 것들이었다. 쓰레기와 다름없는 것들이 과연 박물관이라는 엄중한 곳에 보무도 당당하게 놓일만한 자격이 있나?


 나는 그 답을 ‘예술 디자인 인류학’ 수업에서 찾았다. 인류학에서 예술이란 작품 그 자체보다는 작품을 만들어낸 인간에 관한 탐구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다. 실연 박물관은 물건이 환기하는, 사람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고 어떻게 잊히는지에 집중했다.





 런던에 사는 그 여자, 결혼식을 6개월 앞둔 어느 날 약혼자의 불륜 현장을 목격했다. 파혼을 선언한 날, 그녀는 ‘행운의 탈출’을 자축하며 뻥! 샴페인을 땄다. 차오르는 배신감과 슬픔, 어리석었던 자신을 자책할 때마다 코르크 마개를 꺼내보며, 구렁텅이에 빠질 뻔했던 자신의 인생을 애써 상상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잘된 일이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그레브에 사는 그 남자, 사라예보에 사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휴일이면 어김없이 국경을 넘으며 사랑을 이어간 그들은,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헤어짐의 슬픔도 깊어졌다. 그는 그녀와 함께할 미래를 떠올리며 의미 있는 제안을 했다. 다리가 스무 개 달린 애벌레 인형을 사서 헤어질 때마다 다리를 하나씩 자르고, 스무 번의 헤어짐이 끝나면 같이 살기로. 하지만 사랑이란 늘 그렇듯, 다리를 다 자르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암스테르담에 사는 그 여자, 부다페스트에 놀러 갔다가 유럽을 여행 중인 페루 출신 남자와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믿었다. 급기야 그는 여행을 멈추고 그녀의 집에 눌러앉았다.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그가 홀연히 사라졌다. 떠난 자리에는 작은 성모 마리아상과 짧은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진실한 사랑을 만나면 주려고 페루에서부터 가져온 거야.”


 멍청한 녀석. 그녀는 이미 수십 개의 성모마리아 상이 그의 가방 속에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운명적 사랑이라니, 다 부질없었다.


 사랑을 잃는 것은 비단 연인 사이에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우울증을 앓다 떠나버린 어머니의 유서에 저세상에서는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는 딸의 바람에서, 어렸을 때 가족을 버린 아버지의 부음을 전한 전보에 어떤 감정도 없었다는 아들의 무덤덤한 고백에서, 나는 삶을 살아가며 맺는 모든 형태의 인간관계의 종국에는 실연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신없이 휘몰아치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궁극의 슬픔도 ‘다 지나간 일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함으로, 사랑은 그렇게 완결되고 있었다.


고작 3주 간의 출장 동안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 도피행각을 벌인 연인의 가구를 모두 부셔버린 도끼


나를 짝사랑했던 이웃집 남자


기만의 성모마리아상


잘 벗어났어, 코르크 마개


다리가 성한 애벌레 인형


엄마의 유서




 나는 실연을 사랑을 잃은 고통의 최고의 정점에 있는 분리된 감정 상태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처참한 감정을 경험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런데, 실연에 집착할수록 보이는 것은 사랑이었다. 전시장에 놓여있는 물품의 수만큼 사랑의 방식은 다양했고, 특별했다. 하지만 모든 실연의 방식은 달라도 그 결은 같았다. 그리하여, 묘한 위안을 얻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고. 


 삶은 사랑하는 일의 연속임을 깨닫는다. 사랑이란 베틀에 앉아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올리는 자수와 같은 것이었다. 카펫의 모양이 아무려면 어떠랴. 나의 삶은 사랑에 성실하였고, 그대로도 좋다.


 창고에 처박혀 거미줄 올리고 있을 나의 상자들을 생각해 본다. 상자 안에 실연 물품을 차곡차곡 담고 있는 나를 떠올린다. 실연의 내공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저 그때의 나에게 ‘수고했어’ 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는 날들이 소복이 쌓여간다.





글/사진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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