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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Aug 29. 2018

경험의 변주 #2

우리, 다음에는 어디에 있게 될까?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 the Stranger : 나는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2




“삶의 과정은 연속적이다. 그것이 연속성을 갖는 이유는 환경을 끊임없는 갱신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필연적으로 누적되며 그 주제는 누적된 연속성 때문에 표현성을 갖는다. 우리가 경험해 온 세계는 행위하는 자아의 통합이며, 앞으로의 경험은 그것 위에서 이루어진다. 예술은 경험한 사물의 표현성을 감추고 있는 커버를 벗긴다.”

 - 존 듀이¹


4.

 뉴올리언스는 마디 그라Mardi Gras²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마디 그라가 시작되기 한 주 전 주말에 도착한 건 우연이었다. 흥이 넘치는 사람들에 섞이며 우리도 덩달아 신이 났다. 재즈를 좋아하는 그는 재즈의 시발점인 뉴올리언스를 언제고 여행하고 말겠노라고, 조금은 뻔한 생각을 하고 살았지만, 미국에 살면서도 쉽사리 마음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첫 학기가 끝나고 대학원 방학을 맞아 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뉴욕과 뉴올리언스였다고 한다. 그의 재즈 사랑은 전문가 이상으로 학구적이지만 본인은 순수한 사랑으로 여기며 사는 것 같다. 나는 그저 우리 여행의 시작과 끝이 재즈일 거라는 걸 직감했지만, 새로운 곳은 새롭다는 이유로 항상 만족스러웠고, 어디든 가 보자고 했고, 어떤 음악이든 기꺼이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5.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경험을 쉽사리 즐기지 못한다. 지금 갖고 있는 것, 머물러 있는 자리에서 잠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는 있지만 멀리, 온전히 떠나지는 못한다. 나도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을 ‘완벽하게’ 즐겨 온 건 아닌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언제고 새로운 경험으로 자라났고, 그곳에서 무엇을 맞이하든 최선의 선택을 해 왔으면서도. 해 봐, 해 보고 알아내는 것과 해 보지 않고 머무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어, 쉽게 말해 버리지만,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6.

 나는 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비릿한 냄새나 물컹한 식감도 별로고 먹고 난 뒤 입 안에 미끈거리는 것도 별로였다. 하지만 바다와 가까운 뉴올리언스는 어딜 가나 굴이었고, 누구든 다 굴을 먹고 있었다. 우리도 굴을 먹기로 했다. 호텔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Acme Oyster House. 신선한 굴이 나왔고, 살사와 핫소스를 올려 후르릅 빨아들였다. 입 안에 바다를 머금은 것 같은 기분은 조화롭고 놀라웠다. 우리는 그날 밤, 생굴을 스물네 개나 먹었다. 굴을 먹고사는 고래들처럼.




7.

 아침부터 길거리는 분주했다.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인파와 밤새 술을 마신 사람들의 냄새 사이의 여백을 재즈가 채우고 있었다. 어딜 가나 골목길에는 재즈바가 있고, 연주자들이 보였다. 그들의 재즈는 깊지도 얕지도 않은 공기처럼 어디에서나 흐르고 있었다. 훌륭한 트럼펫 소리 곁을 지나가기도 하고 억척스러운 색소폰 실력에 발길을 돌리는 게 쉽기도 했다. 재즈가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짝을 찾는 새들의 지저귐처럼.




8.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 Cafe de monde에 가려고 나섰지만 정작 보게 된 것은 카페를 장악한 비둘기들이었다. 하얀 슈거 파우더를 잔뜩 뿌린 갓 튀긴 도넛, 베니에Beignets를 먹으려고 재즈의 시간 내내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겨우 베니에 한 봉지와 핫초콜릿을 사서 근처 공원으로 갔다. 슈거 파우더를 눈처럼 날리며 낄낄거리던 기억이란.



9.

 요즘 들어 부쩍 유년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잠들기 전, 길을 걷다 불쑥. 나의 유년은 지금의 나를 상상하던 시절이었겠지만, 지금 내게 그 시절은 전생처럼 아득한 일 같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엄마 몰래 사 먹던 300원짜리 초록색 슬러시, 펴본 적은 없지만 때론 <대부>의 말론 브란도처럼 멋지게 입에 물어보고 싶었던 시가 몇 개.

 밤늦도록 프렌치 쿼터French Quarter를 걷기고 했고, 2층 테라스에 잔뜩 서 있는 사람들이 던져 주는 비즈 목걸이를 받기 위해 손짓하던 사람들 속에 섞여 손을 흔들어 대기도 했다. 유년 시절엔 지금 이 모습을 상상했을까? 이 거리를 상상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가면을 사서 쓰고 재즈 바와 거리를 누비며 다녔다. 내 목에 걸린 비즈가 그리 많지 않은 걸 보고 지나던 사람이 직접 목에 걸어주기도 했고. 레스토랑에서 굴을 먹고 있는 내게 (역시나 또 굴을 먹었다. 삼시 세끼 생굴 먹기!) 비즈를 주고 가기도 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카니발이라고 하기엔 다들 너무나 술과 흥에 취해 있었다. 도시 전체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울부짖고 술렁대며 웃고 떠들었다.



10.

 다음 날 아침은 비가 내렸다. 비 예보가 있긴 했지만, 서늘하게 내리는 비를 보며 지난 며칠의 흥이 씻겨 나가 대지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여행이 며칠 남지 않았다. 빗물에 발목을 적시며 버번 스트리트Bourbon St.를 걸었다. 꽤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라 가게와 풍경이 눈에 익숙했다. 어떤 길을 걸어야 취한 사람들이 없는지 알 만큼.

 루이지애나는 타바스코의 본고장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먹는 음식은 미국에서도 꽤나 이례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거의 모든 음식에 핫소스를 곁들여 먹는다. 신기한 건 레스토랑마다 쓰는 핫소스의 종류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직접 브랜드를 만들어 내놓는 곳도 있고 로컬 브랜드가 적혀 있는 얄팍한 병의 핫소스를 주는 곳도 있었다.




12.

 뉴올리언스 여행은 사실 별다른 게 없었다. 아침이면 일어나 재미없는 미국식 호텔 식사를 했고 점심이면 프렌치쿼터를 따라 쭉 걸어 올라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마음에 드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는 재즈클럽을 순회했다. 밤늦도록 문을 연 오이스터 바에 앉아 한 사람당 열두 개의 굴을 먹으며 떠들고 환호하고 밤이 지나 또다시 익숙하고도 낯선 집으로 돌아왔다. 삶이라는 게 어찌나 단조로운지 떠나면 돌아온다. 본질은, 돌아올 곳이 있어야 떠날 수 있다는 걸지도 모른다.



13.

 존 듀이의 책을 읽고 있으면 삶을 리드미컬하게 유지해야 하고, 예술적인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적인 인생이라는 게 잘 가늠은 안 되지만. “혼란에서 조화로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렬하게 살아 있는 순간이다.”³ 돌아오니 집 앞에 장미가 피어 있었다. 며칠이 지나, 몇 차례 비를 맞고 땅에 떨어져 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새로운 덩굴에서 꽃이 피어났다. 우리, 다음에는 어디에 있게 될까?





1) 존 듀이, 『경험으로의 예술』

2) 프랑스어로 “참회의 화요일 Fat Tuesday” 사순절 직전 4일 동안 열리는 축제로 예수가 광야에서 보낸 40일의 고행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이다.

3) 존 듀이, 같은 책




글/사진 별나

클래식 작곡 전공, 빌보드 코리아 기자, 예술 강사를 거쳐 이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선 (우아한) 몽상가. 수전 손택을 닮고 싶고, 그보단 소박하게 전 세계를 산책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미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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