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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Feb 04. 2020

반짝이는 일상의 하루

낯선 땅에서의 새로운 삶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The Stranger : 나는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7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을 잘 표현할 방법을 생각해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와 그가 생각하는 그가 같은 의미로 연결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감정적인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


휴스턴에 살아. 라고 말하면 어? 제임스 하든? 어? 아스트로스? 어? 나사? 같은 말을 듣기는 쉽지만 그런 단어를 제외하곤 그 어떠한 말로도 내가 사는 곳을 표현하기 어렵다. 마치 나를 표현하기 어려운 것처럼 내가 살고 머무는 이곳을 묘사할 단어가 없다는 게 조금은 아쉽다. 뭐, 나중에 더 많아지겠지. 라며 자신을 위로한다. 


내가 사는 휴스턴은 규모가 큰 병원들과 나사NASA로 유명하다. 혹은 아스트로스 야구팀 또는 농구 선수 제임스 하든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다. 다들 분명 익숙한 것에 관심이 있을 테고, 그 관심이 결국 정보로 연결되었을 테니 모두들 본인들이 가진 만큼의 정보로 질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이곳에는 한인 의사가 몇 명 있다. 그중에 산부인과 의사는 단 한 명이다.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휴스턴에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산부인과 의사가 단 한 명 있다는 거다. 물론, 이곳의 한인 비율은 뉴욕이나 LA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가끔은 그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한국말 할 줄 아는 산부인과 의사는 내 남편이다. 내가 결혼해서 살고 있는 그 사람이 휴스턴의 유일한 한국인 산부인과 의사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을 기억한다. 왠지 모를 가을 냄새가 번지는 날이었고 초가을 혹은 늦여름이었다. 우리는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했고 나는 그날 스케줄이 끝난 뒤 10분 정도 일찍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골목길 구석을 서성이고 있었다. 저 멀리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라는 것이 느껴졌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내가 만나기로 한 그 사람이 저기 서 있고, 그 사람의 손에는 교보문고에서 갓 들고 나온 것 같은 종이봉투가 들려있었다. 스트라이프가 쳐진 밝은 색 재킷(블레이저라고 하기엔 너무 올드해 보이는 그 재킷…)의 양쪽 어깨는 왠지 모르게 축 늘어져 있었고, 나 미국에서 왔어요, 라는 듯 머리카락은 약간 혼란스러워 보였는데 어느 한쪽이 반짝이는 듯했으나 뭐랄까, 한 문장으로 설명하긴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맺혀있는 뒷모습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안녕하세요? 라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 눈빛. 나를 보던 그 눈빛은 내 마지막 순간에 보게 될 눈빛일 것 같을 정도로 또렷했는데 그는 날 보고 당황하다가 동시에 반가워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내 남편을 처음 만난 5초의 기억이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건 언제나 반갑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우리는 웃고 있다. 나는 그를 봤고 그는 나를 봤다. 서로가 서로를 처음 본 그 인사동에서의 짧은 몇 초가 나를 미국으로 데리고 왔다. 남편에게 말한 적 없지만 나는 그를 처음 본 순간 내가 그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삶은 다채롭게 변화한다. 그 변화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 색을 가져온다. 누군가에게는 추운 이곳의 1월이 내겐 영상 10도에 따뜻한 햇살, 그래서 눈이 그리운 1월로 느껴진다. 모두 제각각 다른 방법으로 삶을 살아간다. 처음 이곳, 휴스턴에 왔을 때 우리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명도 우리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미국은 주마다 의사 면허를 발급받아야 한다. 전에 살던 곳은 일리노이 주였기에 우리가 휴스턴, 텍사스 주로 옮기면서 가장 먼저 시작했던 게 남편의 텍사스 면허 발급이었다. 남편은 오랜 세월을 거쳐 비로소 전문의가 된 뒤 본인의 병원을 시작하고 싶어 했고, 그 사이 내가 그의 삶에 뛰어들었기에 그 이후로의 모든 여정을 나와 함께 해야만 했다.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된 부분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힘들면 서로를 위로하고 지치면 격려하고 기대와 사랑과 희망과 좌절을 반복하면서 우리 둘은 한 걸음씩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에 비해 느리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곳의 시스템 덕에 몇 달이 지나서야 남편은 텍사스 면허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 둘 다 무형의 ‘우리 병원’이 과연 진짜 ‘우리 병원’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정말 우리 병원을 오픈했고 첫 환자의 전화를 받고 첫 예약을 잡고 첫 환자를 보면서도 그 사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당시 그 순간은 길고 막막한, 끊임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너무나 갑자기 지나가 버렸다는 걸 깨닫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언제 이곳에 앉아 환자를 보게 되었는지, 시작이 존재하기나 했던 건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이렇게 지내왔던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국에서의 의료 시스템은 아주 복잡하다. 고 다들 알고 있다. 실제로 복잡하다. 아프면 병원에 가서 몇 천 원 내고 주사를 맞고 약을 받아 오던 한국에 비하면 이곳은 정말 복잡하다. 우선 병원에 가기 전에 내가 어떤 보험을 갖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고자 하는 병원의 의사가 그 보험을 가진 환자를 보는지 확인해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보험을 가고자 하는 병원이 받지 않으면 그 병원에 갈 수 없다. 그리고 보험 플랜도 너무 다양해 보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자기 보험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병원을 준비하면서 둘이 머리를 맞대고 보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 그리고 전혀 관심 없던 분야를 이해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야 할 만큼 체계가 복잡하고 워낙에 다양해서 좋게 보면 선택의 폭이 넓은 거고 어떻게 보면 선택을 할 수조차 없을 만큼 복잡한 것이 이곳의 의료 시스템이다.


미국에서의 분만에 관해서도 잠깐 설명해 보자면 우선 이곳은 산부인과와 분만을 하는 병원이 분리되어 있다. 남편은 산부인과 전문의이고 산모들이 임신을 하면 10달 동안 12번 정도 남편을 보러 우리 병원에 온다. 초음파를 하고 피검사를 하고 아기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사진을 보다 보면 어느새 분만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진통이 오면 기존에 선택한 병원의 분만실을 찾는다. 그럼 그곳의 간호사가 담당의(우리 남편)에게 전화를 해 네 환자가 분만하러 왔다고 알린다. 남편은 시스템을 확인하고 산모의 상태를 가늠한 뒤 산모에게 달려간다. 


한국은 산후 조리원이 당연한 코스이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후 조리원이라는 개념 자체도 존재하지 않고 자연 분만은 24시간, 제왕절개는 48시간이면 퇴원을 한다. 나도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간접 경험에 의하면 모든 병실은 1인실이고 입원한 그 병실에서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분만까지 이뤄진다.


우리 병원에서 분만실이 있는 곳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시야에 가까운 곳이지만 막상 뛰어가면 땀이 나고 힘들다며 남편은 얼마 전 세그웨이를 구입했다. 처음 그 녀석을 타고 병원 안을 돌아다니며 몇 번을 넘어질 뻔했지만 10분쯤 타더니 금세 적응해 이젠 눈을 감고도 탈 수 있다. 



우리는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어쩌면 미국 속 작은 한국을 만들어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학교 오전 수업이 끝나면 병원으로 퇴근 해 남편 앞에 앉아 숙제를 하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때로는 멍하게 하늘만 보기도 하는 나는 아직도 우리가 우리 병원을 함께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병원 이름부터 로고, 홈페이지 그리고 모든 시스템을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만들어 낸 우리는 어느새 “우리”라는 단어가 없으면 웃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 언제부터 우리가 존재했는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어깨가 되어 하루하루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기 전, 미국에 사는 남편을 알게 되고 그와 SNS로만 대화하던 시절에 그 사람을 나만의 캐릭터로 만들어 소설에 등장시킨 적이 있다. 그 소설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미완성인 상태로 멈춰있다. 그는 더 이상 내가 상상하던 그가 아니기에 그렇다. 하지만 2017년에 살아있는 그를 마주하기 전, 상상 속의 그는 여전히 나의 과거에 존재한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면 일주일이 넘게 사적인 대화를 할 필요가 없고 미친 듯이 크게 볼륨을 높여 키스 자렛의 음악을 들어도 누구도 시끄럽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가끔은 허전함을 느껴 SNS 친구들과 대화를 하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살결을 코끝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본 기억이 희미하다. 


그래도 뭐, 이런 삶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자기 위안을 20시간에 한 번 꼴로 하며 정확히 7시에 눈을 뜨고 8시면 출근 후 회진, 11시부터 한 시간 반 동안 점심 식사 그리고 짧은 낮잠 후 다시 4시 반까지 소소한 일을 처리한다. 그러면 4시 42분, 잘 정리된 잔디가 깔려있는 집 앞에 도착한다. 


이런 삶을 4년쯤 살았을까? 좀 지루하다. 라는 생각이 들면 옷을 갈아입고 조깅을 하고 홀로 테니스 코트를 찾아 벽을 친구 삼아 몇 십 개의 공을 치고 혼잣말을 하며 집에 돌아와 저녁을 간단히 먹고 TV 채널을 돌리다가 스르륵 잠이 든다. 그리고 또 7시, 일어나고 출근하고 회진 돌고 점심 먹고 졸다가 오후 회진 그리고 퇴근, 벽치기, 저녁 식사, 음악 감상 그리고 TV, 잠. 또 아침 7시. 


심심하긴 하지만 외롭다는 감정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그 역시 홀로 오랜 세월을 불편함 없이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사치스러울지 모르는 외로움의 감정을 심장 구석 어딘가에서 꺼내 놓은 지 오래여서일지도 모른다. 사실, 미국에서의 초기 몇 년은 아무런 감정도 기억하거나 남겨 놓지 못할 수밖에 없는 원초적인 싸움의 연속이었다. 자고 싶지만 잘 수 없고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는, 그리고 항상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것을 뇌 속에 저장해 놓았다가 말과 손끝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24시간이 하루가 아닌 24초처럼 짧게 지나가는 나날이었다. 꿈을 좇는 사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날이 선, 그렇다고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라고 말하기엔 너무 아름다웠던 몇 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주변 사람들은 평범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었고 어느 누구 하나 그를 이해해 줄 사람은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상상 속의 인물로 존재했던 그는 이제 하루, 24시간 내내 내 옆에 존재한다. 2년 전 이맘때 미국에 처음 여행 온 나는 이제 이곳에서 살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해질 법도 한데 나는 그 일상이 매일매일 너무 소중해 작은 것 하나까지 다 기억 속에 담고 싶다. 인간의 뇌에 클라우드 스토리지 같은 개념이 존재해 언제든 과거를 끄집어내 추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그저 찍고, 담고, 쓰고 기억하려 애쓴다. 


우리는 내일도 7시 47분에 일어나 나란히 서서 양치질을 하고 남편은 10분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나는 학교로 갈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약속처럼 정해져 있지만, 그 약속을 신나고 즐겁게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미소 짓고 사소한 일에도 감격하며 그렇게 오늘을 살아간다. 





글/사진 별나

클래식 작곡 전공, 빌보드 코리아 기자, 예술 강사를 거쳐 이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선 (우아한) 몽상가. 수전 손택을 닮고 싶고, 그보단 소박하게 전 세계를 산책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미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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