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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Sep 17. 2021

생명의 냄비, 파차망카

자연을 섬기는 잉카의 후예들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모모와 함께 헬프엑스를 #7





헬프엑스는 일을 해주고 숙식을 제공받는 교환여행입니다. 도움이라는 뜻의 ‘Help’와 교환이라는 뜻의 ‘Exchange’를 결합한 단어지요. 여행자는 전 세계에서 호스트를 찾아 그 집에 머물면서 하루에 4~5시간 일을 돕고 대신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어요. 헬프엑스로 유럽에 이어 남미를 여행했습니다.



내일 체코 그룹이 하는 마지막 전통 제의에 참여하기로 했다. 근처에 한국인 친구 K가 머물고 있다고 해서 그도 초대했다. 같은 날, 남미로 오는 같은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대단한 인연의 K였다.


오늘은 마마가 점심으로 ‘파차망카’라는 음식을 만드는 걸 도와달란다. 좋지, 요리는 언제나 환영이다. 무릎보다 낮은 나무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마마가 가져다 준 감자 한 포대를 깎았다. 몇 번 해 봤다고 페루식 감자 칼이 이제 제법 손에 붙었다.


그러다 ‘파차망카’라는 음식 이름을 어디선가 들었다는 게 기억났다. 우아라스 재래시장 2층 식당 코너. 함께 갔던 K가 메뉴에 적힌 ‘Pachamanka’를 검색해보고서는 “으응, 페루 전통 요리래요” 하길래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다. 내가 그걸 만드는 데 일조할 줄이야.


파차망카를 만드는 법은 이랬다. 작은 파프리카처럼 생긴 빨간 고추와 여러 재료를 갈아 넣어 만든 양념에 닭고기를 잰다. 몇 시간 동안 양념이 잘 배어들면 이때부터가 중요하다. 어른 남자 주먹보다 조금 큰 크기로 닭고기를 묵직하게 떼어 기름 먹인 질긴 종이에 선물 포장하듯 싸는 게 포인트. 끈으로 하나하나 싸는 마마의 손길은 정갈하면서도 재빠르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닭고기 뭉치가 어디론가 보내질 소포 더미 같다.



막내 여동생인 산드라의 남자친구가 자기 친구까지 불러 예닐곱 명이 씻고 자르고 묶는 데 여념이 없는 동안, 넬슨과 남자 형제들은 어디 갔나 했더니 집 뒤 빨래터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큰 삽으로 돌과 흙을 퍼 올리는, 얼핏 보면 공사 현장이나 다름없었는데 자세히 보니 벽돌로 만든 작은 이글루 같은 걸 세우는 중이었다.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도 이 흙 난로가 없었다. 넬슨이 어느새 뚝딱 만든 모양이었다.


누군가 노동하는 이들을 위해 슬그머니 술을 꺼내왔다. 도수 38도의 코카잎 술이다. 까슬까슬한 반투명 유리병에 코카 이파리로 물들인 듯한 진초록 뚜껑이 고급스러워 보인다. 뱀과 새 머리를 새기고 황금으로 칠한 천상의 배를 타고 온 신이 하늘에 떠 있고, 인디언 복장을 한 인간이 정중히 무릎 꿇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인간이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신으로부터 건네받는 건 다름 아닌 ‘코카잎’이다. 페루인에게 코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닌 대단히 신성한 의미를 지닌 ‘신의 선물’이다. 산봉우리 위 하늘에는 페루의 상징, 펼친 날개가 3미터가 넘는다는 콘도르가 새겨져 있다.


이 술을 보통 ‘오로’라는 잉카 콜라 같은 탄산음료에 섞어 마신다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앉은뱅이 술이 아닐 수 없다. 맛은 달콤한 콜라 맛인데 도수는 양주만큼 세니 맛있다고 홀짝거리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라마를 끌고 산에 올라간 A와 V에게 점심을 배달하고 돌아와서 나도 홀짝홀짝 몇 모금을 마셨다. 내 입맛에는 콜라와 섞지 않은 본연의 맛이 더 좋았다. 코카잎 향이 은은하게 입안에서 감돌고 목 넘김이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하다. 몸에 후끈 열이 나고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고 다들 손뼉을 치며 기뻐한다. 가격도 우리 돈으로 1만 원도 채 되지 않으니 한국에 몇 병 부쳐서 내 주위 술꾼들에게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몇 분 정도 지났어요, 마마?”


시간을 확인한 넬슨이 신호를 보냈다. 남자 형제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일사불란하게 삽으로 비닐과 흙을 걷어내고 돌과 벽돌을 치우기 시작했다. 모두 우르르 몰려가서 구경했다.


“모모, 잘 봐.”


돌과 벽돌을 허물어낸 자리에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머물러 있다. 재를 살살 걷어내자 닭고기 소포와 김이 솔솔 나는 감자가 보인다. 아, 이건 흙으로 만든 압력솥이었구나! 크리스티앙이 먹어보라고 얼른 한 점 떼어준다. 세상에, 굉장한 맛이다! 적당히 밴 간, 무엇보다 식감이 굉장하다. 이 쫄깃함이라니! 다들 흙 난로 주변에 둘러앉아 손으로 닭고기와 감자를 뜯었다. 따뜻할 때 먹으라며 마마가 닭고기 덩이를 쥐어주었다.


“Come(먹어)!”



인간이 먼저 먹는 동안 개들과 고양이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콩고물을 기다렸다.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한참 이야기도 나누던 가족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고, 넬슨과 나 그리고 남동생 융만 남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파차망카’가 어떤 뜻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그저 페루 전통 음식 가운데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파차’라는 단어가 꼭 어디서 들은 것처럼 뇌를 간지럽혔다. 그래, 크리스티앙이 제사 의식에서 기도를 드리는 대상이 ‘파차마마’가 아니었던가. 파차마마의 ‘파차’ 그리고 파차망카의 ‘파차’, 같은 글자다. 그리고 아까 그 이글루 같은 흙더미를 가리키며 ‘망카’라고 했다.


“넬슨, 이 두 ‘파차’가 같은 거예요?”

“응, 같은 거야. 케추아어로 ‘파차’는 ‘대지’라는 뜻이야.”


머릿속에서 회오리가 쳤다. 파차마마는 어머니 대지, 파차망카는 대지의 솥이라는 뜻이다. 이 흙 솥으로 만든 음식은 대지와 연결된 음식인 셈이다. 새로운 생명을 ‘어머니의 배를 갈라서’ 꺼내듯이, 새로운 음식을 ‘흙 솥을 갈라서’ 꺼낸다! 내가 순간적인 깨달음으로 아연해 있자 넬슨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모모, 네가 본 저 위 돌무덤 말이야. 그 무덤에서 미라가 발굴되었을 때 어떤 자세였는 줄 알아? 마치 배 속 태아처럼 웅크려 있는 자세였어. 어머니의 자궁, 그러니까 어머니 대지로 만든 무덤과 어머니 대지로 만든 솥. 모든 게 하나로 연결되는 거야. 생명은 대지와 연결되어 있거든.”


우리는 인간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고(삶을 시작하고), 어머니 대지로 만든 솥 안 음식을 먹고 살아가며(삶을 지속하며), 어머니 대지로 만든 무덤에 묻힌다(삶을 마친다). 어머니는 대지고, 대지는 어머니다. 이것이 바로 이곳 토속신앙이며 삶에 녹아들어 있는 철학이다.


“시장 메뉴판에서 파차망카를 봤는데…….”

“그건 가짜야, 그냥 부엌 솥에서 만든 거잖아. 진짜는 이렇게 만드는 거야.”



넬슨과 크리스티앙은 오늘 파차망카를 먹고 내일 파차마마에게 드리는 제사 의식을 행하러 간다. 마지막 제의에서 “고대 잉카 사람들과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주문을 외운단다. 그렇게 그들은 고대와 현재의 삶이 연결되는 신비로운 힘 안에서 미래를 향해 살아간다. 그 옛날 고대 잉카 사람들이 어머니 대지와 더불어 살아갔던 것과 똑같이. 넬슨이 적당한 영어 단어를 생각해내려고 애쓰면서 차근히 설명하는 동안, 내 나름대로 꿰맞춘 게 이제야 하나로 연결되었다. 주변 모든 게 일순간 뒤틀어졌다가 번개같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나는 이미 그 순환 속에 있었다, 내가 미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대지를 ‘섬긴다’니, 돌이켜보면 나는 한 번도 그런 눈으로 대지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지를 ‘자연’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보면 나의 자연관은 어떠했나. 단지 개발하거나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자연을 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내 생각 속 자연은 막연하게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는 어떤 것’ 정도였지 ‘섬김’의 대상이었던 적은 없었다. 자연을 나와 ‘동등한’ 무엇이 아닌 ‘섬김’의 대상으로 본다는 이 사람들의 관점은 새로웠다. 그건 여태까지의 내 생각을 많은 부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자연을 섬김의 대상 즉 최상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순간, 가장 높은 수준의 존중과 경외를 자연에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가장 좋은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가장 좋음’의 수준은 당연히 다르다. 그건 채식으로의 완전한 전환(쉽지 않은 선택이다)일 수도 혹은 하루 한 끼 채식일수도 혹은 무슬림 문화에서 말하는 ‘할랄’일 수도 있다. 플라스틱 생리대를 줄이고 귀찮더라도 한두 번 더 천 생리대를 쓰는 일일 수도 있고, 가방 속에 챙겨 다니는 장바구니나 텀블러일 수도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좋음’은 자신만이 안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음’은 더욱 섬세한 교육과 많은 경험을 통해 끌어 올려질 게다.



크리스티앙이 내일 제의에 참여하는 체코 사람들과 나 그리고 한국인 친구 K에게 오늘 저녁부터는 채소나 쌀 위주로만 소식하라고 조언했다. 산 페드로 약이 몸에 맞지 않으면 토하는 사람도 왕왕 있기 때문이란다. 넬슨에게도 혹시 제의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으면 이야기해달라고 했더니 별다른 말이 없었다.


“시작하기 전에 기도해. 어머니 대지, ‘파차마마’를 생각하면서 말이야. 그래야 연결될 수 있을 거야.”


평소 미신적인 조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아름다운 사람들과 대지가 나를 품어주었으니 나도 그들에게 조금은 더 가까이 가고 싶어졌다. 윌카와인에 있으면서 어떤 생각 하나가 조금씩 마음에 차올랐다. 그건 여기에서의 생활이 마치 ‘문’과 같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잠시 존재할 수는 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결국 내 몫이라는.




글/사진 김소담(모모)

교환여행, 헬프엑스(HelpX)로 전세계에서 ‘살아보고자’ 하는 생활인. 여행보다는 일상을 좋아하여, 장소보다는 그곳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호한다. 대안적인 삶, 환경문제, 퍼머컬쳐(Permaculture), 채식주의, 공동체 등에 관심이 많고 서울의 공동체 ‘성미산마을’에 산다. 《모모야 어디 가? : 헬프엑스로 살아보는 유럽 마을 생활기(2018)》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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