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Aug 25. 2017

태양을 피하는 방법

농촌에선 절기에 몸을 맞추는 게 자연스럽다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 들에서 보낸 사계 #3


 “아빠, 미국 사람 같아.”


 얼마 전 아끼는 동생 결혼식에 가기 위해 정장을 입고 나왔을 때 딸아이가 한 말이다. 놀랄 만도 하지. 늘 흙투성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날은 내가 봐도 훤했다. 톰 쿠르즈? 브래드 피트? 상상의 나래를 펴는데 이어진 말.


 “너무 까매.” 


 그래, 아이가 본 미국인은 인근 초등학교에서 같이 일한 흑인 친구 밖에 없었지. 아, 축가해야 하는데 어쩌지.



 원래부터 하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까만 것도 아니었다. 딸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된 건 팔 할, 아니 십 할(발음 주의)이 태양이다. 은근히 사람 태우는 봄볕 아래서 하루 종일 일하고, 열기가 업그레이드 된 여름에도 들에 나가는 게 다반사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은 장마와 태풍이 오기 전, 논을 바짝 말리기 전에 논에 물길을 내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입에 단내가 난다.


 논을 말리는 이유는 벼가 논 깊숙이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다. 논이 쩍쩍 갈라지면 뿌리는 습기를 찾아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그래야 장대같은 비와 세찬 바람이 몰아쳐도 쓰러지지 않는다. 행여나 꺾일까 어린 아이처럼 다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단단해진 벼는 벌써 이삭을 보인다. 공중곡예를 하며 벼를 괴롭히는 참새 떼가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 없다.


 멧돼지, 고라니와의 전쟁은 참새와의 신경전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된다. 멧돼지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옥수수를 좋아하는데, 그걸 먹기 위해 밭 주변에 쳐놓은 망을 뚫고 들어온다. 또 콩을 좋아하는 고라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밭 주위를 배회한다. 열대야에 잠도 안 오는데 ‘꽥! 꽥!’ 괴성에 가까운 고라니 울음소리를 들으면 열화가 치민다.


 여름은 심고 거두는 봄가을만큼 큰일은 없지만 자잘한 일들이 많다. 반대로 아침 8시만 되면 땀이 주르륵 흐르는 실시간 더위 때문에 일할 시간은 많지 않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딸애가 다니는 어린이집이 방학을 했다. 집에선 웬만해선 아이의 혈기를 잠재울 수 없다. 우린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 태양을 피할 수 있고, 아이가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곳으로!





 태양의 기세도 한풀, 아니 반 풀 꺾일 무렵 포천 어메이징 파크로 향했다.(도저히 낮에는 움직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와우, 이런 첩첩산중이라니! 6‧25 전쟁 때 우리 할아버지가 피난 갔던 곳이라고 하더니, 과연 인민군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곳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과학관(이라는 것보다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라는 게 더 중요)에 들어갔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기 시작했다.


 전시실은 3층까지 있는데 그 안에 200여 개의 과학 기구들이 전시 돼 있다. 이제 다섯 살, 세 살 된 것들이 과학에 대해 뭘 알겠냐마는 아이들은 꽤 흥미를 보였다. 움직이고, 소리도 나고, 불빛도 나고, 무엇보다 마음껏 만질 수 있으니 어찌 아니 좋으랴. 어디 가나 쫓아다니며 ‘하지 마, 만지지 마!’ 제지하기 일쑤였는데,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으니 내 마음이 더 좋았다.



 과학관을 나와 숲 속에 있는 히든 브릿지로 갔다. 에어컨 바람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산에서 부는 바람이 더 좋았다. 아주 커다란 나무 중간을 묶어 만든 다리로, 옆을 보면 나무와 눈이 마주치고 아래를 보면 공중부양을 하는 느낌이 든다. 아내는 진즉에 포기했고, 큰 애와 함께했는데, 제법 긴 거리를 꿋꿋이 걷는 아이를 보며 마음이 뭉클했다. 아이는 벼 같구나.


 용감한 자와 겁쟁이를 가르고 나서 좀 특별한 계곡에 갔다. 이 계곡은 바위가 아닌 각종 과학 도구로 만들어졌다. 계곡 꼭대기에 커다란 분수가 있는데 이번에도 힘을 낸 것은 큰 딸이다. 멀리서 볼 때도 컸던 분수는 가까이서 보니 더 컸다. 우리 부녀는 분수를 돌며 물방울을 맞으며 한참 동안 수다(유난)를 떨었다. 계곡을 내려오는 아이의 표정이 환한 달보다 더 밝았다.



 농촌에 살면 철들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도시에 살 때는 절기와 상관없이 살았지만, 이곳에선 절기에 몸을 맞추는 게 자연스럽다. 아주 오랫동안 쌓아놓은 계절과 날씨에 대한 정보들은 놀랄 정도로 정확하다. 더위가 영원할 것 같던 얼마 전 저녁에 전날과는 다른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달력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입추(立秋)였다. 어디, 바람 한 번 제대로 맞아볼까?


 바람은 하늘에서 불어오기에, 말복(末伏)에 찾은 곳은 산 중턱에 위치한 포천아트밸리다. 폐 광산에 예술 작품으로 숨결을 불어 넣은 이곳은 N 포털에서 뽑은 ‘포천에 가볼만한 곳’ 1위에 등극한 곳이다. 아이유가 주연한 드라마 ‘달의 연인-보보심경 려’에서 그녀가 빠진 천주호가 유명하고, 별 볼 일 있는 곳 천문과학관, 그리고 야외조각공원과 호수 공연장이 볼 만하다.



 먼저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은 건 ‘꼬마 버스 타요’의 라니를 닮은 모노레일이다. 매표소에서 공원까지 좀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제는 고민도 안 하고 모노레일을 탄다, 아이들을 핑계로. 기력이 넘치는 아이들은 은하의 신비, 별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상관없이 천문과학관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물론 아이들이 더 좋아한 건 건물 앞, 계곡 옆에 있는 오줌 싸는 개였지만….


 천주호는 언제 봐도 예술이다. 깎아지는 절벽 아래 푸른 물, 이날따라 유난히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야구에서 9회 말 투 아웃 극적인 역전을 하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이다. 더욱이 아이유의 흔적이 여기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아이유와의 인연(?)은 다음 회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내 기분에 취해본다. 



 아내와 큰 애는 천문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과학관에 가고, 난 둘째를 데리고 조각공원에 갔다. 작품도 좋았고, 저무는 햇살과 푸른 잔디가 함께 만드는 색감도 좋았다. 더 좋은 건 잠시 후 카페에서 시원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 오르막이 끝났을 때 난 좌절했다. 카페가 6시에 닫아 우리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아이에게 물을 주겠단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호수공연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높은 절벽에 둘러싸여 울림이 좋은 곳이다. 터키 여행을 갔을 때 에페스 원형공연장에서 노래하던 어떤 여성이 떠올랐다. 그때는 못했지만, 이번엔 자신 있게 노래하고 싶었다, 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하지만 생각나는 노래는 ‘로보카 폴리’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난 그 노래를 했고, 소리는 멋지게 울려 퍼졌고, 아들은 그에 맞춰 막춤을 추었다.


 아마도 고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아직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말로 표현할 수 있었을 때. 여름이 되면 이마는 유난히 희게 보이던 그는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었다. 속상한 마음에 태양을 원망했지만, 아버지는 해님을 원망하지 마라 했다. 그 때문에 살아간다고…. 그토록 고마운 태양을 피하고 싶어 하는 건 내가 철이 안 든 탓일까, 아니면 지구온난화 때문일까?





글/사진 농촌총각

인생의 절반에서 새로운 기회가 한 번은 더 올 거라 믿는 농부. 좋은 책, 음악, 영화, 사람들로 가득한 문화창고를 꿈꾸고 있다. / mmbl@naver.com





여행 매거진 브릭스의 더 많은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http://www.bricksmagazine.co.kr/




매거진의 이전글 8월에 떠올리는 크리스마스, 그리고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