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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돌레 매거진 Apr 30. 2021

베리베리와 엔하이픈이 표현한 죽음의 미학

바니타스와 카니발 이론을 중심으로

WRITER. 쪼꼬

(왼) 베리베리(VREIVERY) <SERIES ‘O’ [ROUND 1: HALL]> 콘셉트 포토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

(오) 엔하이픈(ENHYPEN) <BORDER: CARNIVAL> 콘셉트 포토 ©빌리프랩


베리베리(VREIVERY)와 엔하이픈(ENHYPEN) 모두 만찬이 차려진 식탁 앞에 정장을 갖춰 입고 있다. 식탁 위의 음식들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주된 경향이었던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를 떠오르게 한다. 베리베리의 <SERIES ‘O’ [ROUND 1: HALL]>은 광란의 파티에서 어두운 내면과 만났다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으며, 엔하이픈의 <BORDER: CARNIVAL>은 데뷔 후 경험한 낯설고도 화려한 세계를 카니발에 빗대고 있다. 죽음의 축제인 ‘카니발’ 역시 두 그룹의 콘셉트에서 공통적인 부분이다. 같은 레퍼런스를 사용하고 있지만 각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히 다르다. 서로 다른 맥락에서 바니타스와 카니발 이론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바니타스(Vanitas) 도상

(왼쪽)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아르카디아의 목동들(The Shepherds of Arcadia)>, 캔버스에 유채, 101×82㎝, 1628-1629

(오른쪽)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 캔버스에 유채, 185×121㎝, 1637-1638


‘바니타스(Vanitas)’ 이전 죽음의 상징으로 ‘메멘토 모리(Memento-mori)’가 있었다. 그 어원은 라틴어로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이다. 이는 죽음을 의인화하여 발언하도록 한 것으로 회화에서는 대개 해골로 나타나 기독교적 교훈을 표현한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죽음의 무게중심이 메멘토 모리에서 바니타스로 이동했다. 바니타스는 전도서 1장의 ‘Vanitas vanitatum(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에서 유래하여 메멘토 모리와 마찬가지로 종교에서 기원했다. 하지만 17세기 개인주의적 성향과 더해져 알레고리로 발전하면서 종교적 색채는 지워지고 실생활에 중점을 둔 죽음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은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의 <아르카디아의 목동들(The Shepherds of Arcadia)>이다. 1628년에 그려진 첫 번째 그림에서는 석관이 그려져 있지만, 1637년에 그려진 같은 주제의 작품에서는 석관을 찾아볼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사유가 교회로부터 실생활로 이동하고 있음을 은유한 것이다. 이후 회화에서 바니타스 알레고리는 개인 소장용으로 그려졌으며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이 죽음의 소재와 함께 등장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정물화의 하위장르로서 세속적 쾌락과 성취 그리고 상실로 이어지는 삶의 근본적 갈등을 표현한다. 하지만 꼭 정물화에 바니타스의 전통이 국한된 것은 아니고 인물화, 풍경화, 민속화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스페인 등에서도 등장한다.


(왼쪽) 안토니오 데 페레다(Antonio de Pereda) <기사의 꿈(The Knight 's Dream)> 목판에 유채, 152X217㎝, 1650

(오른쪽) 빌렘 클래즈 헤다(Willem Claesz Heda) <정물(Still life with a Roemer)> 목판에 유채, 46X69㎝, 1629


오른쪽의 그림은 스페인 화가 안토니오 데 페레다(Antonio de Pereda)의 <기사의 꿈(The Knight 's Dream)>(1650)이다. 그림 전면에 정물이 가득한 탁자 앞에서 잠들어 있는 기사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옆에 적혀져 있는 라틴어 ‘Aterne pvngt, cito volat et occidit’은 ‘위대한 업적이 가져다준 명성은 하룻밤 꿈처럼 소멸하리라.’라는 뜻으로 세속적인 가치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탁자의 물건은 각각 금은보화-부, 악기와 악보-유희, 책과 지구본-지식, 갑옷과 무기-명예, 왕관-권력이라는 세속적인 업적을 상징한다. 


또 하나 살펴볼 그림은 왼쪽, 빌렘 클래즈 헤다(Willem Claesz Heda)의 <정물(Still life with a Roemer)>(1629)이다. 이 회화는 앞서 살펴본 <기사의 꿈>보다 기독교적인 성격이 짙다. 일반적으로 식사 후의 음식물을 중심으로 그린 정물화는 성찬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생선/포도주/빵은 그리스도의 성찬, 황금잔은 그리스도의 성배, 진주는 믿음과 진리, 칼은 올바른 삶을 향한 분별력 있는 선택을 상징한다. 부정적인 가치들도 함께 그려져 있다. 치즈는 부패를, 껍질이 벗겨진 레몬은 미각을 자극하는 욕망을 통해 절제를 경고한다. 더해서 유리잔은 인간의 연약함을, 시계는 유한한 시간을 지닌 인생의 허무함을 보여준다. 모래시계, 촛불, 꽃도 시계와 같은 역할을 한다.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

John Sloan, Travelling Carnival, 캔버스에 유채, 76.5 x 91.6 cm, 1924

서양 전통에서 카니발은 뒤죽박죽된 세상을 표현하는 궁극적 방식이다.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 역시 이성/질서/법의 체계가 일시적으로 혼돈과 갈등을 겪으며 재확립되는 과정을 말한다. 카니발은 우주적이고 전면적이기에 경계가 없고 피할 수도 없으며, 인간의 삶에서 초월적인 것이 드러나는 위기이자 변혁의 계기로 시간성과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 축제적인 세계관에서는 위기와 극복, 죽음과 부활, 변화와 갱생의 계기들이 주도적으로 작용한다.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지상 모든 삶의 내용이 상대화 되고 모든 가치의 전도가 일어난다.


모든 위계질서가 탈중심화된 세계에서는 인간 본성의 숨겨진 측면이 드러난다. 성스러운 것은 세속적인 것과, 고귀한 것은 저속한 것과, 위대한 것은 무용한 것과, 현명한 것은 어리석은 것과 만난다. 양가치성은 부정성을 단순한 죽음이 아닌 탄생의 계기가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만들며, ‘모든 것은 죽음이면서 동시에 탄생’이라는 우주적 원리와 연결된다. 카니발의 양가치성은 미래와 탄생을 향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며 미래는 과거의 낡은 것을 심판하고 없애는 주체다.


베리베리(VREIVERY) ‘Get Away’: 어두운 내면과의 만남

베리베리(VERIVERY) 'Get Away' Official M/V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
베리베리(VERIVERY) 'Get Away' M/V 비하인드 포토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


베리베리(VREIVERY)는 작년 [FACE] 트릴로지를 통해 ‘내 안의 수많은 모습을 마주한다’라는 스토리라인을 내세웠다. 3월 2일 발매한 <SERIES ‘O’ [ROUND 1: HALL]>은 그 연장선으로 어두운 내면과 만남을 표현했다. 콘셉트 포토와 뮤직비디오에는 광란의 파티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정장을 차려 입은 멤버들과 만찬이 차려진 테이블의 모습을 담았다. 사진의 과일/꽃/유리잔이 인생의 유한함을 상징하는 바니타스의 도상임을 추측할 수 있다. 뮤직비디오에서 멤버들은 이전 시리즈에서 마주했던 또 다른 자아의 초대로 파티룸으로 이끌려 들어가며 시작한다. 초대를 받는 장면에서 시간을 뜻하는 시계와 지식의 상징인 지구본이 등장한다.


(오른쪽) 베리베리(VERIVERY) 'Get Away' M/V 비하인드 포토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

(중앙) 베리베리(VERIVERY) 'Get Away' M/V 캡쳐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

(왼쪽)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God of God)>, 17.1X12.7X19cm, 2007


이들이 도착한 홀에는 성대한 만찬이 차려져 있으며, 콘셉트 포토에 등장한 과일/꽃/유리잔뿐만 아니라, 해산물/포도주/빵 그리고 진주까지 나타난다. 모두 앞서 살펴본 바니타스의 도상이며, 특히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은 호영이 들고 등장하는데, 오브제의 모습은 현대의 대표적인 바니타스 작품인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God of God)>(2007)를 닮았다. 이 작품은 영원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와 합치되어 영원한 죽음을 상징하며 뮤직비디오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호영이 이것을 들고 등장했다는 것 자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엘리노 타운젠드(Eleanor Townsend)는 『Death and Art: Europe 1200-1530』(2009)에서 메멘토 모리의 도상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그 분류는 죽음을 의인화되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상기시키는 유형과 살아있는 사람을 죽음의 이미지와 병치하여 표현하는 유형으로, 이 장면은 후자에 해당한다. 삶과 죽음이 대비 효과를 이루는 모습에서 카니발의 순환성이 떠오른다.


베리베리(VERIVERY) 'Get Away' M/V 비하인드 포토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


연회장이 잘 정돈되어 있는 초반부와 달리 영상의 후반부에서는 죽음의 축제가 시작된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혼돈의 상태에 빠지는 가운데 레터링 케이크의 문구가 눈에 띈다. ‘Tirez-moi de lå’ 프랑스어로 ‘날 꺼내줘’라는 의미다. 파괴는 곧 생성인 카니발의 법칙에 따라 베리베리가 뭉그러진 케이크에서 어떤 것을 끌어냈는지, 축제가 끝나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다음을 기대하게 된다.


엔하이픈(ENHYPEN) ‘Drunk-Dazed’: 낯설고 화려한 세계

ENHYPEN (엔하이픈) 'Drunk-Dazed' Official MV ©빌리프랩
엔하이픈(ENHYPEN)  콘셉트 포토 ©빌리프랩


엔하이픈(ENHYPEN)은 데뷔 앨범 <BORDER: DAY ONE>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차용하며 고전적인 판타지의 막을 올렸다. 데뷔 트레일러와 앨범의 인트로에서 『소네트 11』으로 뱀파이어 콘셉트를 통해 아름다움의 영원성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Given-Taken’은 『햄릿』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다’를 ‘현재 이룬 것이 주어진 것인지 쟁취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치환했다.


<BORDER: CARNIVAL>의 인트로는 전작의 아웃트로와 이어진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합창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내레이션의 마지막 문장 ‘Here, come inside the castle. Take  everything’이 말한 화려한 성이다. 콘셉트 포토에서 멤버들은 빅토리아 시대풍의 의상과 가면을 쓰고 만찬 앞에 앉아있다. 식탁 위에 차려진 것은 베리베리의 사진에서 살펴본 것과 비슷하나 과일/꽃/빵이 주를 이룬다. 특히 그리스도의 성배를 상징하는 황금잔으로 종교적 성격을 강화하고 있으며 껍질이 벗겨진 과일은 절제를 경고한다. 하지만 멤버들은 가면으로 ‘초라한 진실’을 가리고 경고를 어겨 완전히 취해버린다. 죽음의 도상인 해골은 역시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God of God)>(2007)를 닮은 오브제로 표현했다.


엔하이픈(ENHYPEN)  콘셉트 포토 ©빌리프랩


타이틀곡 ‘Drunk-Dazed’의 가사는 카니발을 ‘규칙 없는 세계’라고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뮤직비디오는 양정원이 촛불을 끄는 장면부터 죽음의 세계로 이전된다. 인생의 허무함을 상징하는 촛불마저 완전히 꺼져버린 세상을 빨간 조명이 비추고 ‘느껴져, 내 머린 Daze / 중독에 빠져 Replay’라는 가사와 함께 숨겨진 본성을 드러내는 파티가 시작된다. 피할 수 없는 카니발의 속성은 ‘나를 가둔 Carnival’이라는 가사가 드러낸다.


선우가 물에 떨어뜨린 피 혹은 제이크가 쇼파에서 흘린 포도주처럼 천장에서 피가 쏟아진다. 특히 제이크는 ‘전부 뒤집혀 뒤집혀 서있어’라는 가사처럼 거꾸로 쇼파에 누워있으며, 콘셉트 포토에서도 멤버들이 거울상처럼 대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미지는 삶과 죽음이라는 관계가 전복됐음을 드러내지만 완전한 죽음이라고 볼 수는 없다. 카니발에서 죽음은 탄생의 계기를 내재하고 있다. 또한 여성은 생성의 주체이자 영원성에 대해 적대적인 존재로,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여학생은 죽음 이후 새로운 삶을 상징하며 엔하이픈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린다.


참고문헌

정헌이 (2011), 죽음의 미학: 포스트모던 바니타스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사연구, 30, 67-98.

정현목(2017), 예술 사진에서 발견되는 바니타스 회화의 영향, 미학예술연구, 52, 377-413.

박수경(2017), ‘바니타스’의 상징적 이미지에 대한 연구, 목원대학교 대학원.

정영한(2013), 바니타스 정물화의 동시대적 담론: 개념과 양식의 변용 그리고 의미의 확장을 중심으로, 부산교육대학교, 287-295.

박건용(2003),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과 문학의 카니발화, 한국학술진흥재단, 280-305.

이동춘(2017), 『한 여름밤의 꿈』: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을 중심으로, 대구대학교

박승규(2010), 광장 카니발과 미학적 정치 공간, 공간과 사회, 34, 60-85

ENHYPEN의 멋진 세계(https://magazine.weverse.io/bridge/ko/140), 위버스 매거진, 2021.04.27.

ENHYPEN의 서사가 셰익스피어와 만날 때(https://magazine.weverse.io/bridge/ko/67), 위버스 매거진, 2020.12.07


* 본 글은 아이돌레 웹진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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