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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돌레 매거진 Dec 04. 2023

에스파가 전하려는 '균형'

WRITER. 차이트


 에스파(aespa)는 처음부터 '메타버스 걸그룹'을 표방하며 런칭된 아이돌이다. AI를 포함한 IT 기술 분야가  더욱 빠르게 발전하는 시류에 발맞춰 내놓았다면, 아이돌 업계에서 그 "선구자"로서 업계에서 유리한 입지를 점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일까? 그렇다는 듯 기획은 야심차게 가상의 세계, 시스템, 분신, 빌런과 조력자까지 설정한다.(P.O.S, 광야, 블랙맘바, naevis 등) 이 독자적인 세계관 구축에는 소위 '오타쿠' 감성과 사이버틱한 미래지향적 사조가 합쳐져 거대한 심리적 진입장벽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세계관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친절함을 베풀었는가? 그렇지도 않았다. 꾸준히 '마이웨이'로 순도 높은 일렉트로니카 계열 음악과 현란한 뮤직비디오, 세계관 용어가 남발된 가사를 밀어붙였을 뿐이다. 이를 접한 사람들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세계 안에 빠져 그저 설정놀음으로 재미 보는 정도의 기획이었다면 이 글이 탄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naevis'는 '광야'와 '리얼월드' 그 사이인 FLAT에서 문을 여닫는 일을 하며 관리, 감독하는 임무를 맡은 중간자적 존재다. 대신 양쪽 세계의 일에 관여하거나 개입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동시에 자신의 영역(FLAT)에 사는 'ae-에스파'(분신)과 현실 세계(리얼월드)의 '에스파'가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합일하면 성장할 수 있도록 서로 이어준다. 수호자이면서 조력자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데 FLAT을 기준으로 리얼월드 반대편인 광야에서, 리얼월드의 루머와 증오를 먹이삼아 성장한 블랙맘바가 서로의 연결은 끊어져야 옳다고 접근하며 연결을 방해한다. 처음에 에스파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직접 알아보러 갈 테니 'naevis'에게 광야로의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블랙맘바와 대치까지 간 그들이 궁지에 몰리자 보다 못한 'naevis'가 광야로 넘어온다. 그의 도움으로 블랙맘바 처치에 결정타를 가한 에스파는 다시 리얼월드로 돌아가고, 'naevis'는 임무를 져버린 대가로 결국 힘을 잃는다. 여기까지가 'Black Mamba'부터 'Girls'까지 총 4장의 음반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다.


ⓒ aespa official YouTube Channel'Spicy' MV


 그래서인지 과연 우리가 잘 아는 <Spicy>부터는 리얼월드로 돌아온 에스파의 일상을 그리는 듯하다. 더 이상 그 어떤 세계관적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 같다. 폐쇄성 있는 세계관 용어 남발에 지친 이들은 "드디어 광야 컨셉을 버렸다"라고 환호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블랙맘바와의 최종 결투에서 'naevis'는 다른 차원으로의 문을 열고 그를 추방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에스파 멤버들이 블랙맘바를 최대한으로 무력화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 에스파 멤버들이 사용한 방법은, 블랙맘바의 복구 동력인 리얼월드의 데이터를 오히려 쏟아부어 과부하를 일으키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행동의 여파는 자연스레 리얼월드에 부작용을 몰고 왔다. 리얼월드의 자체적 유지에 필요한 데이터가 과다유출 되면서 모든 존재의 유지 자체에 불안정성이 초래된 것이다. 리얼월드의 모든 것, 모든 곳에서 산발적인 글리치(Glitch)가 나타나고 형태가 불쑥불쑥 변하는 이상현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영상 링크: https://youtu.be/WfW6dJHKtIA?si=Umh43iS222nar5oc


 위 영상에서 언어능력자(Xenoglossy; 접한 적 없는 언어도 모두 읽어내는 능력)인 지젤이 기자의 질문에 '이상현상'이라는 표현에 "이상형?"이라고 대답하며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은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슬쩍 드러낸다. 돌발상황에도 모두가 아무런 관심이나 경각심도 가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무사했을 'ae-에스파'에 대한 언급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모든 게 찜찜하다.


ⓒ aespa official YouTube Channel 'I'm Unhappy' Track Video

 

  <Spicy>의 MV는 정확히 이러한 상황을 담는다. 단, 미장센은 핫한 캠퍼스 걸로 변신한 네 명의 멤버들에 초점을 맞추느라 이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 그 와중 <Welcome to MY WORLD> MV와 나머지 수록곡 <Salty&Sweet>, <Thirsty>, <I'm Unhappy>의 트랙비디오는 현재 상황이 비정상성 안에 놓여있음을 은유하며 타이틀 곡의 영상물과 정반대의 진로를 그린다. 여러 장면이 각자 다르게 비상식적 상황을 그리지만, 먹게 되는 약의 색상에 따라 현실과 환상 둘 중 한쪽으로 깨어나게 되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오마주한 카리나의 개인 컷으로 결국 이 모든 것이 환각 속이라는 증거를 확실하게 던져준다. 이 뿐이 아니다. 에스파는 <MY WORLD> 음반 전체가 이전 음반의 연장선상에 놓인 이야기임을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토록 명시한다. '환영한다'는 내용에도 어딘가 스산하게 진행되는 1번 트랙 <Welcome to MY World(Feat. naevis)>, 여전히 폭력적이고 불친절한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자랑하는 <Spicy>를 넘어, '난 또 너를 두드리고 있어'라며 아무리 닿아도 이상하리만치 목마른(thirsty) 느낌의 상대방에게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Thirsty>로 이어지는 가사 등 음악적인 요소들도 그 결이 일관되도록 짜였다.



ⓒ aespa official YouTube Channel ep.3 'Don't you know I'm a savage?' Behind The Scenes


  확실히 이들 세계관에서 '기술'이라는 소재는 중요하다. 한창 홀로그램 기술을 소녀시대 단독 콘서트 무대에 적용할 때도 있었던 SM엔터테인먼트인 만큼, 에스파는 SM엔터테인먼트의 '신기술'에 대한 욕심이 결합된 집약체다. 전개되는 이야기를 표현할 영상물에 각종 3D 그래픽과 크로마키, 모션캡쳐, 아바타 모델링과 랜더링이 동원된다. 'ae-에스파'처럼 '가상세계 속 또다른 나', '아바타' 같은 키워드도 강조한다. 심지어는 이런 존재와 현실 속 '나'가 무려 '연결'될 수 있다는 설정까지 담았다. 따라서 이들의 세상이란 잿빛 기술세계에 한없이 친화적인 태도만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더욱 의외다. 사실 잘 되짚어보면 '블랙맘바'가 만들어진 원인은 다름아닌 리얼월드에서 발생하는 루머와 모든 나쁜 소문 같은 암(暗)적인 존재였다. 결국 리얼월드에서 사는 존재인 에스파와, 광야에서 만들어진 블랙맘바는 적대적 관계처럼 보이지만 상기한 대로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라는 상반되는 속성으로 맺어진 존재적 필연성을 띤다. 묘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또 위기상황에서 'ae-에스파'는 '블랙맘바'에게 해킹으로 잠식당할 수도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다시 말해, 'ae'라는 가상세계의 전자적 존재는 그 특성 상 존재 자체만으로도 얼마든지 적군도 드나들 수 있는 통로일 수 있음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덧붙여 블랙맘바의 처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결국 리얼월드의 데이터를 마음대로 가져다 쓰면서 능력을 남용하고,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한 이들에게 더 큰 후폭풍으로 돌아오는 결말도 빼먹지 않았다.


ⓒ aespa official YouTube Channel 'Spicy' MV


 특정 개념의 명암을 차별적으로 비추지 않고 같이 조명하는 것은 이들이 관련된 부정적 이슈에 대해서도 딱히 언급을 피할 생각은 없음을 시사한다. 오히려 각종 이야기에 민감할 아이돌의 기획임에도 정면으로 맞서고, 다루려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강조하는 '메타버스'가 단순히 중요하고 유용함만을 이야기하기보다 분명히 그만큼 '위험하기도 함'이 공존한다고 공평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 있는 전달은 반드시 균형 있는 인지를 낳고, 곧 균형 있는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발판이다. 얼핏 보면 '기술주의적'인 면모에서 껍데기만 가져온 설정인 듯도 보인다. 대충 본 사람들에게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접근했다는 미움을 샀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과학만능주의만 팽배한 것 같은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뜯어보면 사실 인본주의를 져버리지 않은 에스파가 그려내는 이 사이버 던전은,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인간미 있는 기조로도 빛난다. 따라서 기술 아래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보다도 기술 그 너머에 더 중요한 인문학적 가치도 있음을 보여주는 이 기획은 한 차원 위의 감동을 전한다. AI 등의 활용처가 그저 유행 편승, 모사, 자원 낭비에 불과한 수준을 넘어 보다 수준 높이 격상하는 감동 말이다. 지금 이 시간, 에스파는 당연한 진리치인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누구보다도 역설하는 중이다.



* 본 글은 아이돌레 웹진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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