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비바체
있지는 자존감, 아이브는 자기애, 에스파는 광야. 4세대 걸그룹은 저마다의 메인 테마를 하나씩 갖고 있는 듯하다. 콘셉트 세분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우후죽순 같은 콘셉트로 데뷔했다가 빠르게 사라져 간 수많은 아이돌들의 모습을 보며 깨달은 점이 있는 걸까. 청순과 섹시로만 나누어지던 기존의 이분법적인 콘셉트에서 벗어나 한층 더 다양한 주제로 대중에게 다가서고 있다. 그 결과 최근에 데뷔한 4세대 여자 아이돌은 굵직한 히트곡을 하나씩 뽑아내며 강한 인식을 남기는 데에 성공하였다. 있지의 <달라달라>, 아이브의 <LOVE DIVE>, 에스파의 <Next Level>이 그 예시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4세대 걸그룹 열풍의 선두주자, 르세라핌이 추구하는 테마는 무엇일까?
르세라핌의 타이틀곡과 수록곡을 듣다 보면 재미있는 점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다. 가사에 ‘욕망’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말이 꼭 등장한다는 점이다. 데뷔 앨범 [FEARLESS]에는 ‘욕심을 숨기라는 네 말들은 이상해’라는 가사가 나오는 <FEARLESS>, ‘타오른 이상 멈출 수는 없어 my desire’라는 가사가 나오는 <Blue Flame>이 있다. 미니 2집 [ANTIFRAGILE]에는 ‘눈빛엔 거대한 desire’이라는 가사가 나오는 <ANTIFRAGILE>, ‘I can see 선명해지는 desire’이라는 가사가 나오는 <Impurities>가 있다. 서술한 가사 외에도 다양한 표현이 르세라핌의 노래에서 등장한다. 욕망, 욕심, desire. 생김새는 다르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탐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그렇다. 르세라핌이 추구하는 테마는 바로 ‘욕망’이다. 단순히 욕망을 가지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그 욕망을 표출하고자 한다. 이러한 르세라핌의 욕망 추구는 타이틀곡, 수록곡 가리지 않고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다.
발단 및 전개 : 데뷔 앨범 [FEARLESS]
르세라핌은 가장 먼저 데뷔 앨범 [FEARLESS]에서 어떤 욕망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드러낸다. 우선, 동명의 타이틀곡 <FEARLESS>는 그 욕망을 숨길 기색도 없이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처음부터 ‘제일 높은 곳에 난 닿길 원해 느꼈어 내 answer’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카즈하의 랩 파트에서도 ‘가슴팍에 숫자 1 내게 ay 내 밑으로 조아린 세계 ay’라고 하며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는 욕망의 내용을 계속해서 구체화하고 있다. 물론 르세라핌이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우려하며 욕심을 숨기라는 외부의 목소리도 당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르세라핌은 ‘FEARLESS’, 겁이 없다. ‘겸손한 연기 같은 건 더 이상 안 해’, ‘내 흉짐도 나의 일부라면 겁이 난 없지 없지’라며 두려움 따위는 잊어버린 듯, 가장 높은 곳에 닿고자 하는 욕망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한편, 수록곡 <Blue Flame>은 욕망으로 인해 완전히 바뀌어버린 르세라핌의 일상과 그들이 욕망에 대처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손 데일만큼 뜨거운’ 욕망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까지 뻗어나가는데, 두려워하기는커녕 호기심을 느끼며 진취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러한 욕망은 무료했던 날을 제법 아름답게 바꾸어주었고, ‘타오른 이상 멈출 수는 없어 my desire’이라고 하며 원하는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보다 명확하게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정리하자면, 르세라핌은 데뷔하자마자 최고가 되기를 원하는 욕망과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거침없이 달려나갈 것이라는 의지를 가요계에 선포한 셈이다.
위기 : 미니 2집 [ANTIFRAGILE]
그러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고난과 시련을 겪기 마련이다. 미니 2집 [ANTIFRAGILE]은 눈앞에 주어진 가시밭길을 극복하는 르세라핌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동명의 타이틀곡 <ANTIFRAGILE>은 르세라핌의 앞에 어떤 가시밭길이 펼쳐졌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고, 모두가 그들의 추락을 기도하며, 멋대로 한계를 단정 짓는 것과 같은 것들이 시련의 내용이다. 이러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르세라핌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더 높이 가줄게 내가 바랐던 세계 제일 위에, 떨어져도 돼 I’’m antifragile’라는 후렴 가사가 핵심이다. 최정상을 차지하겠다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떨어져도 괜찮다는 단단한 자세. Antifragile, 즉 욕망을 추구하는 강인한 여성상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수록곡 <Impurities>에서는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가시밭길 위로 걸으며 얻은 상처는 르세라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더 단단해질수록 욕망은 더욱 선명해진다.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힘’을 얻게 된 르세라핌은 더 이상 겁내지 않고 욕망을 다 이루고자 할 것이다.
절정 : 정규 1집 [UNFORGIVEN]
하지만 전통적으로, 사회에서 여성의 욕망 추구는 ‘금기’로 여겨져 왔다.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기어코 금기를 깨버린 르세라핌의 이야기, 지난 5월 발매된 정규 1집 [UNFORGIVEN]이다. ‘용서받지 못한’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를 제목으로 갖는 이 앨범에는 금기를 깨버린 르세라핌과 그것을 계기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외침이 담겨 있다. 수록곡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에는 금기를 깨려는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제목이 특이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데, 사실 제목에 있는 세 인물은 르세라핌과 동일시되는 인물이다. 이브는 창조주의 말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고, 프시케는 에로스의 말을 어기고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램프를 들었으며, 푸른 수염의 아내는 남편의 말을 어기고 열쇠로 문을 열어버렸다. 세 여성은 모두 금기를 어긴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르세라핌은 이 곡에서 금기를 어기는 행위가 타락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며 자신들을 둘러싼 금기를 깨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타이틀곡 <UNFORGIVEN>에서 금기를 깨버리며 함께할 사람을 찾는다. ‘내가 제일 싫은 건 낡은 대물림‘이라며 부수고자 하는 대상을 지정한 뒤, ‘힘 없이 늘 져야만 했던 싸움, 바란 적도 없어 용서 따위는 난 금기를 겨눠’라며 더 이상 금기 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용서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는 각오를 하고 나니, 이제는 두려운 것이 없다. ‘나랑 저 너머 같이 가자, 나랑 선 넘어 같이 가자’라며 의견을 함께할 사람을 모으기 시작한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낡은 대물림에 같이 저항할 사람을 모으는 모습은 가히 혁명적으로 느껴진다. 이렇듯 르세라핌의 정규 1집은 그들이 써 내려가는 ‘새 시대’의 절정에 이르렀다.
가장 높은 곳이라는 ‘욕망’을 추구하고, 이러한 욕망 추구를 터부시하는 ‘금기’를 깰 사람을 함께 불러 모으는 혁명적인 목소리를 낸 그룹이 있는가? 혁명의 메시지를 단편적으로 담은 곡들은 꽤 있지만, 욕망의 내용부터 욕망에 대처하는 과정, 이를 실현하기 위해 금기에 도전하고 선봉장이 되어 동참할 사람을 모집하는 것까지,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체계화하여 여러 개의 앨범에 담아 표현한 그룹은 단연코 르세라핌이 유일할 것이다. 데뷔하자마자 대뜸 욕망을 외치는 모습이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지금까지 일관성 있게 잘 풀어나갔다. 앞으로도 이 콘셉트의 당위성을 유지하려면, 금기에 대한 르세라핌의 투쟁 과정 및 결과를 다음 앨범에 잘 녹여내야 할 것이다.
‘I’m not that Cinderella type of a girl’이라는 가사가 <UNFORGIVEN>에 나온다. 이 가사를 보면, 르세라핌의 욕망 추구는 어쩌면 현대 사회의 여성들을 대변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 ‘유리천장’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유리천장 때문에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능력이 좋아도 사회의 더 높은 곳에 닿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이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녹록지 않았다. 포기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맞서는 사람도 많다. 새 시대를 함께하고자 하는 르세라핌의 목소리는 가시밭길을 걷는 여성들에게 강하게 와닿을 것이다. 르세라핌이 지금까지 펼쳐온 일련의 활동을 고난과 시련에 지친 여성들의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울림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 본 글은 아이돌레 웹진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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