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웃음이 났다. 어쩐지 나를 정확히 표현하는 문장 같아서. 도망치며 살았는데, 그 도망이 결국 나를 만들었다. 피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면서 엉겁결에 브랜딩이 꽤 잘된 사람이 되었다. 도망의 방향이 결국 정체성이 된 셈이었다.
예전엔 그게 부끄러웠다. 불안에 쫓겨서 한 선택을 “도전”이라 포장했고, 버티는 걸 “끈기”라 불렀다. 그렇게 꾸며야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꾸밈이 아니라 생존이었고, 포장이 아니라 방식이었다는 걸. 살기 위해 택한 모든 도망은 결국 나의 언어가 되었고, 그 언어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설명한다.
살아남는다는 건, 결국 문장을 얻는 일이다. 그 때는 그저 버티는 중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버팀이 스토리가 되어 있었다. 고통이 지나가면 경험이 되고, 부끄러움이 마르면 문장이 된다. 그렇게 도망이 기록이 되고, 기록은 서사가 된다. 브랜딩이라는 건 어쩌면 그 서사를 스스로 읽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도망친다. 다만 예전과 다른 건, 이제는 내가 도망치고 있다는 걸 ‘안다’는 것이다. 자각한 도망은 부끄럽지 않다. 그건 회피가 아니라 선택이고, 포기가 아니라 조율이다. 무너지는 대신 멈추는 법을, 숨는 대신 기다리는 법을 배운 것이다.
돌아보면, 내 이미지는 계획해서 만든 게 아니었다. 살기 위해 버틴 흔적들이 자연스럽게 브랜드가 되었다. 삶의 방향보다 버팀의 자세가 나를 설명했고, 그 버팀이 결국 ‘De.fin’이라는 사람의 브랜딩이 되었다.
이제는 부끄럽지 않다. 도망인데 브랜딩이 잘됐다. 그건 실패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서사의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