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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을 선택이라 착각했던 순간

재수 대신 입학, 첫 번째 착각 - 도전이라 쓰고 회피라 읽는다.

by Defin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나는 늘 어딘가에서 왕따였다. 학교에서 평온한 시절이 있으면 학원에서 미움받았고, 학원에서 괜찮으면 다시 학교에서 밀려났다. 이유는 없었다. 착해서, 조용해서, 혹은 튀어서. 이유는 늘 바뀌었지만, 결론은 같았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불편했다.


왕따라는 건 누군가의 악의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가 시기하거나, 부러워하거나, 자기 안의 불편함을 덮고 싶을 때 시작된다. 그 감정을 처음 던지는 사람은 단 한 명이지만, 다수는 그 감정의 방향으로 쉽게 선동된다.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 빠르게 공감한다. 그렇게 한 명의 불안은 다수의 합의가 되고, 다수의 합의는 공기가 된다. 나는 그 공기 속에서 자랐다.


그 시절의 나는 그저 견디는 사람이었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더 조심했고,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얕보이지 않도록 콧대를 곧게 세우고선 허리를 굽히진 않았다. 대신 누군가 웃으면 같이 웃었고, 속으로는 누가 나를 흘끗 보면 이유 없이 불안해졌다. 그게 내 열두 해였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열두 해 동안 나는 미움을 피하기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결국 왕따를 피하지 못 할때는 콧대를 곧게 세우고선 난 지지 않았다는 듯 어떻게든 허리를 곧추세우고 다니며 자랐다.


왕따의 끝은 늘 비슷했다. 그들이 원하던 걸 얻었을 때였다. 내 자리를 차지하거나, 불안을 다른 대상으로 옮겼을 때. 그리고 끝날 때마다 나는 똑같은 말을 들었다. “야, 그래도 너 참 대단하다. 그걸 버텼다니.” 사과는 없었다. 감탄만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한 미움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저 그 상황이 끝나서 다행이라 생각할 뿐이다.


그 일을 겪으며 나는 인간에 대해 조금 일찍 배웠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것, 그냥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것. 이해타산에 따라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되고 함께 밥먹던 친구는 어느새 나를 투명인간 취급할 수 있다. 세상에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것, 찐친은 언제나 시기마다 달라진다는 것. 어떤 시점에서 가장 자주 속을 터놓던 사람, 그게 그 시기의 찐친일 뿐이라는 걸. 그건 언제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라는 걸. 나는 그걸 열아홉에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 편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되, 오래 기대하지 않게 됐다. 인간관계의 온도를 재는 데 익숙해졌고, 적당한 거리의 편안함을 배웠다. 대신 혼자 있는 법을 익혀야 했다. 아무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나 자신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수는 내게 공포였다. 왕따를 청산할 기회를 1년 더 미루라는 말처럼 들렸다. 다시 대중의 구경거리가 되고 웅성웅성대는 공간 속에서 묵묵하게 혼자 밥을 먹고, 겉으로는 눈치 안보는 싸가지 없는 애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속으로는 눈치를 보며 버텨야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나는 이미 너무 오래 견딘 사람이었다. 다시 견디는 쪽을 선택하면, 이번에는 무너질 것 같았다. 그때 붓을 놓았다.


그 즈음 엄마가 말했다. “요리를 해보는 건 어때?”
그 말은 생각보다 쉽게 내 마음에 들어왔다. 요리는 어릴 적부터 취미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스트레스받은 날엔 냉장고를 열어 무작정 무언가를 만들었다. 요리는 늘 실패할 수 있었고, 그래도 괜찮았다. 이상하게 미술보다 자유로웠다. 미술은 ‘틀리면 망한 그림’이었다면, 요리는 ‘틀리면 간을 맞추면 되는 일’이었다. 그 차이가 나를 구했다.


수능 3등급이라 굳이 미술을 고수하지않고 성적맞춰서 갈 수 있었던 나는 결국 학점은행제를 택했다. 세상은 그걸 "새로운 진로"라 불렀지만, 내겐 피신이었다. 그래도 그 선택에는 이상한 해방감이 있었다. 아무도 나를 평가하지 않는 곳으로 옮겨간다는 안도감. 새로운 교실,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공기. 이번에는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 나는 그렇게 요리의 세계로 들어갔다.


조리복을 처음 입었을 때의 기분을 아직도 기억한다. 하얗고 단정한 옷이었는데, 그 옷을 입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정리됐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옷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옷 같았다. 이제는 더 이상 왕따도, 실패자도 아니었다. 어린나이에 호텔에 입사한 호텔리어였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나를 향해 “새로운 길을 찾았다”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건 길이 아니라 방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방어 속에서 나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주방에서 선배들과 어울리며 나도 사람과 어울릴 수 있구나 하는 안도를 찾았고 꽤 나는 일을 잘했다. 때문에 음식을 만드는 손끝으로 다시 나를 믿기 시작했다. 점점 발전하는 칼의 리듬, 불의 온도를 알아채고, 식재료의 질감과 특징을 공부하고. 그 감각들이 나를 이 세상에 붙잡아두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손의 감각으로 덮어가는 기분이었다. 피하기 위해 들어온 주방이 나의 훈련장이 되고, 도망치며 얻은 시간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얼마 못갔다. 주방에서 일하는 건 군대와 다를 게 없었다. 누군가의 폭언이 날아들고, 부모 욕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출근길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았다. 마지막 눈물을 흘리며 숨을 고르는 기분. 누군가 나를 미워해서 음식물 쓰레기를 머리 위에 부어도, 얼굴에 무언가를 던져도, 성희롱을 해도,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뎠다. 그게 내 하루였다. 그럼에도 버텼다. 도망갈 곳이 없었고, 그 호텔을 끝까지 못버텨내면 난 도망자라고 공식적으로 낙인찍힐 것 같아서 2년반을 견디고선 떠났다.


그 시간을 견디며 서 있었던 나는, 누구보다 단단했다. 남이 보아도, 나 스스로 보아도 그건 대단한 일이었다. 주방은 나에게 훈련장이자, 도망치며 얻은 훈장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쳤지만, 그 안에서 나는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돌아보면 나는 참 성실한 도망자였다. 무너진 자리마다 이유를 만들고, 상처마다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세상은 그걸 ‘도전’이라 불러줬다. 나는 그 말에 기대어 조금씩 살아났다. 어쩌면 도망이란 이름으로라도 살아 있는 게 중요했다. 도망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제는 안다. 그 시절의 나는 나약하지 않았다. 너무 예민하게 살아 있었을 뿐이다. 타인의 미움이 내게 가르쳐준 건 세상의 잔인함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함이었다. 그것을 조금 일찍 알아버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지금도 누군가의 미움 앞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도망은 나의 방패였고, 그 방패가 나를 지켰다.


하지만 버티는 동안에도 마음은 늘 불안했다. "이걸 언제까지 이렇게 버텨야 하지?""내가 이 시간을 끝내고 싶다면,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나는 또다시 방법을 찾았다.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라 이름 붙인 다음의 피신.
그게 나에겐 유학이었고, 대학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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