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슐랭 파인다이닝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하루 열네 시간, 길면 열여섯 시간을 일했다. 퇴근은 쉬는 게 아니라 씻으러 가는 일이었다. 휴무는 없었다. 누군가 들어오면, 다음날엔 누군가 나갔다. 버티는 사람이 곧 선임이었고, 살아남는 것이 곧 실력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어설프게 착한 사람이었다. 힘들어하는 사수를 혼자 두지 못했다. 같이 남았고, 같이 지쳤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나까지 스스로 갈아넣었다. ‘이 정도는 해야 인정받겠지’, ‘버티면 언젠가 달라질 거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버텼다.
주방은 전쟁터였다. 욕설이 인사였고, 폭언이 리듬이었다. 누군가의 화풀이가 나를 향해 쏟아져도, 그건 업계의 문화라 여겼다. 그 안에서는 누구도 감정의 여유가 없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제를 삼기보단 익숙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문득,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그 질문이 마음에 오래 걸렸다. 주방은 내 자존심이었다. 동시에 감옥이었다. 나를 키운 곳이자, 나를 갇히게 한 곳이었다. “이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나”라는 문장이 마음속에 돌덩이처럼 박혀 있었다.
어김없는 새벽 4시 퇴근길, 택시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늘 같은 표정이었다. 피곤하고 무표정했다. 불빛 아래에서 점점 5년 후, 10년 후의 내가 보였다. 하루가 지나면 다음 날이 오고, 그다음 날이 또 온다.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을 계속하면 나는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무너진 마음의 틈으로 다른 선택들이 스며들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단어가 있었다. ‘유학.’
처음엔 멋있어 보였다. “해외는 다르다더라.” “요리를 배울 거면 유럽이지.” 그런 말들이 내 귓가를 스쳤다. 어쩌면 거기라면, 이곳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게 생겼다. 한국에서의 나는 늘 ‘예민한 애’, ‘튀는 애’, ‘까칠한 애’, ‘싸가지 없는 애’였다. 말하면 공격적이라 하고, 조용히 있으면 싸늘하다 했다. 어떤 프레임 속에서도 나는 문제로 존재했다. 그 프레임을 벗어나고 싶었다. 해외라면, 아무도 나를 그런 말로 부르지 않을 것 같았다.
유학은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도망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도망은, 이번엔 꽤 근사한 포장지를 두르고 있었다. “경험”, “확장”, “글로벌 감각” 같은 단어들이 그럴듯하게 도피를 감췄다. 게다가 가족에게서도 멀어질 수 있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야 직성이 풀리고, 필요할 때만 나를 ‘이 집의 기둥’이라 부르던 가족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기회였다. 거기에 더해, ‘학점은행제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지울 수도 있었다. 모든 이유가 정당해 보였다. “그래, 이번엔 나를 새로 만들어보자.”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현실은 곧 나를 다시 붙잡았다. 유학은 돈이 들었다. 영어를 공부해야 했고, 비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생활비도 계산해야 했다. 내가 상상했던 ‘새로운 출발’은 생각보다 계산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늘 그 계산 앞에서 작아졌다. 어렸을 때 미술도 했고, 정신과도 다녔던 기억이 종종 ‘돈이 많이 드는 애’라는 꼬리표로 돌아왔다. “너한테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 그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죄책감이 따라왔다. 그래서 이번엔 손을 벌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내 통장엔 현실이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멈췄다. 코로나였다. 모든 게 정지됐다. 공항이 닫히고, 유학원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내가 못해서 못 간 게 아니라, 시대적 상황때문에 내가 못 간 거야.” 그 말 하나로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는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생겼다. 세상이 대신 멈춰준 덕분에, 나는 멈출 명분을 얻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그럼 대학원이라도 가보는 건 어때?” 그 말이 이상하게 부드럽게 들렸다. 그럴듯했다. 공부하면 도망이 합법이 된다. 누구도 공부하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좋은 선택이야.” “그래도 발전하네.” 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그 말들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내 안의 변명과 너무 닮아 있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유학처럼 큰돈이 들지도 않았고, 낯선 언어를 공부할 필요도 없었다. ‘학벌 세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애써 외면했다. “이번엔 제대로 해보자.”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렇게 나는 유학 대신 대학원을 택했다. 세상은 그걸 “도전”이라 불렀고, 나는 그 말 뒤에 조용히 숨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은 또 하나의 피신이었다. 다만 이번엔 조금 더 정돈된 방식이었다. 겉으로는 도전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두려웠다. 달라지고 싶었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자신은 없었다. 공부는 내게 안전한 이름표였다. 세상과 거리를 두면서도, 실패자로 보이지 않는 방법이었다. 나는 여전히 도망 중이었지만, 이번엔 훨씬 세련된 형태였다.
그렇게 셰프와 푸드 디렉터를 오가던 사이에서, 푸드 디렉터와 대학원생, 조교, 그리고 올리브영 메이트를 오가는 사람이 되었다. 직함은 계속 바뀌었지만, 그 안의 나는 여전히 같은 마음이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고, 매번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을 위장하며 살아가는 사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많은 이름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도망은 여전히 진행형이었지만, 이번엔 조금 더 능숙하게 숨는 법을 배운 것뿐이었다.
그 즈음, 나는 이상하게 공허한 불안에 몸부림쳤다. 몸은 쉴 틈 없이 움직였지만, 마음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대학원에서는 요리를 관두고 새로운 커리어를 위해 도전하는 어리지만 성숙한 후배였고, 조교로서 행사를 준비했고, 주방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 푸드 디렉터 일을 병행했다. 그리고 주말엔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로 자신을 채우면 불안이 덜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채울수록 비어갔다.
그때부터 무언가가 또 꿈틀대기 시작했다.
"주방을 벗어나, 생각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자리 잡고 싶다."그건 성장의 욕망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또 다른 도피였다. 이전까지의 도망이 ‘현실로부터의 거리두기’였다면, 이번엔 ‘현실 위로의 착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도망치고 싶었다. 다만 이번엔 조금 더 근사한 도망의 이유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