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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사는 척하면 아무도 묻지 않는다.

바쁨은 최고의 위장술

by Defin

나는 늘 일 잘하는 척으로 버텼다. 책임감으로 위장된 불안, 성실로 포장된 두려움. 그러다 결국 그 모든 완벽주의가 무너졌을 때야 비로소 알았다. 나는 겁이 많았다. 그리고 그 겁이 나를 이끌었다.


코로나가 찾아왔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씩 꺼지고, 사람들의 일상이 멈췄다. 나도 멈췄다. 미슐랭에서 버티던 나날이 끝나고, 내추럴 와인바로 이직했다. 분위기는 조금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여전히 경쟁과 감정의 싸움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직장 내에서 미묘하게 따돌림을 느꼈다. 처음엔 내가 예민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은 은근히 나를 빼고 이야기했고, 내가 한 말을 다른 사람이 한 일처럼 포장했다. 주방에 학을 뗀 건 그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외식업계 사람들에게 학을 뗐다. 요리보다 인간관계가 더 힘들었다. 칼보다 말이, 불보다 시선이 더 뜨겁고 잔인했다. 나는 조용히 회사를 나왔다. 그만두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 ‘또 도망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진짜로 끝내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주방이라는 공간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었다.


요리를 관두고 6개월쯤 되었을까. 그때 나는 갑자기 ‘사업병’에 걸렸다. 코로나로 모두가 멈춰 있을 때, 나는 오히려 과열되어 있었다. 무언가를 만들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만 해도 밀키트 시장은 억대가 아니라 고작 몇 천만 원 규모였다. 하지만 내겐 그게 충분히 커 보였다. 어느 대학교의 스타트업 캠퍼스 프로그램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지원했다. ‘솥밥 밀키트 브랜드를 만들겠다.’ 그렇게 적어냈다. 그 시절엔 솥밥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지금 하면, 내가 1등이 될 거야.’ 갑자기 일러스트 프로그램을 결제하고, 로고를 만들고, 메뉴를 개발했다. 밤새워 자료를 찾고, 시장조사를 흉내 냈다. 브랜드의 이름을 정하고, PPT를 만들고, 심지어 투자자 앞에서 발표까지 했다.


“아, 드디어 도망만 치던 내 삶이 이제 빛을 보는구나.”
그때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나도 대표가 될 수 있어. 이럴려고 그동안 그렇게 힘들었던 거야.”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나는 요리를 할 줄 아는 기술자였을 뿐, 브랜드를 운영할 줄 아는 사업가는 아니었다. 돈도 감도도 없었다. 식재료는 다룰 줄 알았지만, 시장은 다룰 줄 몰랐다. 그렇게 시제품 시연을 마지막으로 투자자들 앞에서 쪽을 쑤었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프리젠테이션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아, 나는 또 실패했구나.”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불 꺼진 방 안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도망칠 곳이 없었다. 요리도 버렸고, 사업도 끝났다. 주방도, 무대도, 계획도 다 사라졌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체 왜 이렇게 도망치듯 살고 있을까.’ 그 질문이 나를 오래 붙잡았다. 그러다 다시 또 하나의 도피처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브랜드를 배우는 대학원이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 대신 브랜드를, 불 대신 이미지를 다루는 일. 그건 내게 훨씬 안전해 보였다. ‘이건 도망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야.’ 그렇게 또 한 번의 합리화를 했다.


미대로 대학원을 오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역시 돌고 돌아 나의 길로 오는구나. 결국 나의 길은 디자이너였네.’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히 ‘석사 뽕’이었다. 디자인과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 들떠 있었다. 낯선 공간에서 처음으로 ‘손이 아닌 머리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게 묘하게 우쭐했다. 그땐 그게 탈출이라고 믿었다. 주방의 욕설과 소음 속을 빠져나와 이제는 세련된 언어와 비주얼을 다루는 세계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마치 한 단계 위로 올라선 듯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 자만에 잠시 취해 있었다. ‘나는 요리 말고도 할 수 있는 게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여전히 주방에 남아 있는 이들을 속으로 연민 섞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건 연민이 아니라 자만이었다. 내가 벗어났다는 사실에 스스로 도취돼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들뜸의 끝에는 항상 불안이 있었다. 나는 학사가 디자인 출신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늘 마음 한구석을 눌렀다. 나는 그들보다 늦게 배웠고, 포토샵도 서툴렀고, 드로잉도 자신 없었다. 머리로는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주방의 리듬에 맞춰 움직였다. 그때부터 이상한 긴장이 시작됐다. ‘나는 디자인을 못하니까, 기획이라도 잘해야겠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려 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써왔기에 그럴듯한 문장은 금방 만들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해서 선배를 모시는 법도, 윗사람에게 예의 바르게 굴며 신뢰를 얻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성숙함을 ‘프로페셔널함’으로 포장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척, 바쁜 척, 대단한 척, 나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데에 집착했다. 그렇게 살면 나를 대단하게 봐줄 거라 믿었다. 사실은 자조감으로 자신을 유지했다. 열등감이 동력이었다. 잘한다는 말은 마취제였고, 인정은 마약 같았다.


대학원생, 조교, 아르바이트생, 프리랜서 푸드 디렉터로 살며 소논문도, 과제도, 시험도, 뭐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게 나의 존재 증명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너 진짜 대단하다.” “그 나이에 이렇게 사는 사람 처음 봐.” 그 말들이 나를 더 바쁘게 만들었다. 불안은 성실로 포장됐고, 피로는 열정으로 변장했다.


그때의 나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또 신입이 되는 일이었다. 요리를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랭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평가받고, 견뎌야 하는 상황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취업 준비를 하지 않았다. 대신 박사 선배의 제안을 받았다. 작은 에이전시의 기획자로 들어가 보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공부를 계속하지 않아도 되고, 또 ‘사무직’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제안이었다. 나는 그 길을 택했다. ‘드디어 내가 원하던 세상으로 들어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그곳도 똑같았다. 경쟁이었고 내가 잘나기 위해서는 타인을 후려쳐야만 하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사람의 감정에 일이 휘둘리고 있었고, 불안한 눈치가 있고, 고인물 권력이 있었다. 회의의 공기는 주방의 열기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불 대신 언어가 사람을 데웠다. 나는 또다시 긴장했고, 또다시 증명하려 했다. ‘이번엔 도망치지 말자.’ 다짐했지만, 이미 나는 또 다른 도망의 초입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나의 ‘비움’을 들키지 않기 위한 싸움이었다. 모자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 많이 알고, 더 빨리 움직이고, 더 완벽해야 했다. 누군가의 시선이 내 빈틈에 닿기 전에, 나는 미리 그것을 채워야 했다. 보고서를 먼저 제출하고, 회의에서 먼저 의견을 내고, 밤늦게까지 남아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야만 ‘일 잘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내 방식의 방어였다. 사실은 불안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걸 책임감이라 불렀다.


그 시절의 나는 ‘프로페셔널’을 가장한 겁쟁이였다. 모자람을 들키지 않으려 더 일찍 도착하고, 더 늦게 퇴근했다. 완벽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모든 완벽은 결국 또 다른 도망이었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 더 바빠졌고, 그 바쁨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괜찮니?” 대신 “넌 진짜 열심히 산다.” 그 말이 위로였고, 그래서 한동안은 정말 괜찮은 사람처럼 살았다.


그 모든 시절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도망쳤지만, 멈추진 않았다. 비켜가며 버텼고, 버티며 자랐다. 도망은 나약함이 아니라 생존의 다른 이름이었다. 불안이 나를 움직였고, 회피가 나를 키웠다. 그 덕에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은 결국 이야기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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