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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망은, 문장이 되어 나를 세상으로 데려왔다.

by Defin

도망만 쳐왔다고 생각했다. 늘 뭔가를 피했고, 도전보다는 회피를 택했다. 버티는 법만 늘었지, 성장한 건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번 10월, 브런치 팝업 전시에서 내 글이 걸렸다.


입구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가자 “작가님, 작품은 여기 있습니다”라며 펜을 건네는 스태프가 있었다. 작가라는 호칭이 낯설었다. 나는 그저 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던 사람일 뿐인데. 내 글이 인쇄된 종이 위엔 수많은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여러 번 읽고, 접고, 또 읽은 흔적. 그 흔적들이 내 지난 시간을 대신 설명하고 있었다.


그 순간 10년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왕따라서 나만 빼고 모두가 하하호호 웃는 것이 무서워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으로 도망쳤던 초등학생, 교실이 무서워 글로 숨었던 중고등학생, 감정을 견디지 못해 SNS에 글을 쏟아내던 20대의 나.


그때의 글은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한 벽이었는데, 지금은 누군가의 눈에 닿을 수 있는 다리가 되어 있었다.

전시장 안에서 사람들은 내 글을 조용히 읽고 있었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 도망이 도전으로 읽힐 수도 있구나. 나는 그저 견디려고 쓴 글들이었는데, 사람들은 거기서 용기를 읽어내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를 가장 작게 여겼던 시간들이, 누군가에게는 의미로 남아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뽕찬다고 해야 할까. 부끄러움과 기쁨이 동시에 올라왔다. 그런데도 웃음이 났다. 그동안 무겁게만 느껴졌던 도망의 서사가, 누군가의 공감으로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괜찮아요, 잘했어요.’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전시장 한쪽에 짧은 글을 남겼다. “도망치며 쓴 글들이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네요.” 그 문장을 쓰는데 눈물이 차올랐다. 10년이 눈앞을 스쳤다. 하지만 아빠가 바로 옆에 서 있어서 꾹 참았다. 아직은 체면을 차리고 싶은 나였다.


삶을 뒤돌아보면, 삽질이라 부르던 일들이 자양분이 되었고, 실패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은 결국 서사가 되었다. 가장 괴로웠던 날은 내 자만의 끝이었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방심의 시작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도망이 부끄럽지 않다. 그건 나의 결이자, 살아남은 흔적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엔 도망치듯이 아니라, 걸어가듯이. 도망이 나를 세상으로 데려왔다는 걸 이제는 안다. 도망은 나의 리듬이었고, 나의 언어였다. 그렇게 쌓인 도망의 결 위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천천히, 조용히, 도망이라는 선택을 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도망이기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걸 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한다. 다만 이제는 그 도망의 방향을 안다. 그리고 그 방향이 내가 걸어갈 새로운 챕터의 길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도망친다.

다만 어떤 이는 그 도망으로 자신을 만든다.

그리고 나의 도망은, 문장이 되어 나를 세상으로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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