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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게슬기롭다 Dec 26. 2021

성장과 희생, 그 오묘한 관계(2)

디즈니 플러스, 스파크 쇼츠 <윈드>를 보고

(성장과 희생, 그 오묘한 관계(1)에서 이어지는 글)



과연 그 아이는 앞으로 행복할까?           

    

행복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아이는 행복함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는 ‘운명 비슷한 무언가’를 가질 것이다. 마치 행복이라는 이름의 컬러풀한 색종이의 반대편이 검은색의 ‘죄책감’으로 칠해진 것처럼, 아이는 자신이 구덩이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 회상해도 할머니가 떠오른다. 할머니를 두고 왔다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하면 할머니를 구출해 올 수 있을까’라는 생산적인 생각도 하게 될 것이다. 그뿐일까? 구덩이에서 벗어났다고 그 아이의 삶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이제는 그에게 도시락을 챙겨줄 타인은 없다. 자기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그 아이가 스스로 감당할 만한 ‘삶의 문제’가 찾아온다면 또 모르지만, 아이에겐 삶의 챌린지 1개를 해결하자마자 2개가 생긴 것이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혹 떼려다 혹 붙인 격’ 이 된다.  


그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죄책감’ 밀려오는 부분을 해결해야만, 그 아이에게 온전한 ‘행복’ 이 찾아올 것이다. 그 아이는 평생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 죄책감을, 나를 대신하여 희생한 할머니를 구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다. 답을 얻기 위한 고군분투 속에서 삶은 풍족해지고, 그 과정을 겪은 아이는 성장하여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힐 것이다. ‘이럴 것이었으면, 처음부터 2인용 우주선을 만들걸’ ‘왜 할머니는 2인용 우주선을 만들어야만 같이 탈출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을까’ 라는 자조적인 질문을 반복할 것이다. 그 질문을 던져준 할머니의 의견을 들을 수도 없다. 구덩이에 찾아가 크게 외친다고 해도 할머니의 답변이 들릴 리 없다. 할머니의 선택의 이유를 확인할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 그렇게 ‘희생의 이유’에 대해 답을 듣지 못하고 아이는 골머리를 썩어 갈 것이다.


죄책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소하려 행동 할 것이다. 할머니를 구하러 더 좋은 우주선을 개발하여 내려갈 수도 있다. 구덩이 바깥에 자신의 밧줄을 고정하고, 스스로 다시 내려갈 수도 있다. 직접 구출을 할 것이냐, 간접 구출을 할 것이냐, 이 또한 아이의 선택이 필요하다. 그 선택이 죄책감을 ‘건드리기’는 할 수 있으나 감정을 해소할 수 없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선택해서 구덩이 속으로 내려갔지만 할머니가 없다면? 아이는 최악의 상황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아이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할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아이는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자신이 어디에 발을 딛고 서있는지에 확인하고, 그 기준을 중심으로 주변을 다시 관찰해야 한다. 구덩이 속의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은 떠다니는 큰 바위였다. 지금은 하나의 큰 대륙이다. 풀, 나무 등의 ‘생명력’이 보장된 땅이다. 과거의 바위는 그렇지 못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바위가 쪼개져 떠다니다 언젠가 나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는 공간이었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땅은 다르다.


'바위가 아니라 땅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과 불쾌감을 주기적으로 느낄 것이다. 영상 속 아이는 항상 구덩이 바깥으로 나오고 싶은 아이였고, 그걸 할머니와 함께 하고 싶어했다. 삶의 큰 목표를 이룬 만큼 기존에 갖고 있던 행복 요소를 잃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을 합쳐 하나의 점수로 만들면, 0점이 될 것이다. 행복도 불행도 거대하게 느끼고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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