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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게슬기롭다 Dec 28. 2021

성장과 희생, 그 오묘한 관계(3)

디즈니 플러스, 스파크 쇼츠 <윈드>를 보고

(성장과 희생, 그 오묘한 관계(2)에서 이어지는 글)



혹시 그 아이의 생각 모델이 나와 닮아있다면, 그 아이는 무엇을 하고자 할까?


그 아이의 생각이 나와 같다면, 그러니까 내가 그 아이라면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할까 생각해본다. ‘행복’을 향한 많은 옵션을 선택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 아이가 할머니와 보냈던 시간이 좋았고, 그때가 그립기 때문에 아마 할머니를 구하러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어떻게 구하러 갈 것인가? 생명력이 깃든 그 땅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다시 찾을 것이다. ‘왜 할머니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생명력이 있는 땅에 나를 보내려고 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바위와 달리 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할 것이다. 뿌리가 깊게 박혀있는 나무를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고, 나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또 다른 인간을 찾으려고 시도해본다. 나처럼 ‘가족을 구덩이에서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사람을 찾아 나서본다. 너무 많은 경우의 수가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에, 그 생각을 정리하는데도 꽤 시간이 흐른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허기를 느끼겠지. 아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도, 나의 배고픔과 생존이 해결되어야 할 수 있는 고민이구나, 를 깨닫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만 하려 할 것이다. 할머니가 전달해준 고구마를 먹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고구마를 다 먹어갈 때쯤, 뒤늦게서야 깨닫는다. ‘아 이 고구마를 다 먹으면서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구나.' 그는 그제야 시간의 한계를 알아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구마를 다 먹기 전에 할머니를 구하려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 고구마를 다 먹어치워 버리면 정말 자기 자신의 생존에 더 집중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게 스스로의 삶을 지배해버리는 순간 ‘할머니 구조’라는 생각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이 급해진 아이는 이도 저도 하지 할 것이다. 어딘가를 향해 가지도, 구하러 내려가지도 못한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가족을 구조했는지 살펴보러 떠나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구덩이 바깥에서 가만히 앉아 생각만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지난번의 그 링크를 통해 감독의 메시지를 다시 들으러 간다. 혹시 감독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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