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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e May 23. 2020

바야흐로 복숭아의 계절


내가 사는 작은 컬리지 타운과 애틀랜타의 사이에는 한인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가 있다. 만 한 시간 거리를 오갈 에너지와 시간을 내기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어서, 한 달에 겨우 한 번쯤 이곳의 마트를 찾는 일이 내게는 대단하고 소중하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살 수 없는 단무지와 깻잎 따위의 식재료를 획득하고 돌아오는 길의 편안하고 뿌듯한 기분이란.


엊그제 사서 고생을 할 일이 있어 억지로 모티베이션을 쥐어짜 내고 나니 어제저녁에는 생산적인 무엇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훌쩍 한인마트에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가는 시간 한 시간, 장보는 시간 40분, 오는 시간 한 시간. 큰 시간 낭비 없이 필요한 물건을 쏙쏙 사들고 돌아올 것을 다짐하며 떠난 여정이었다.


장보는 다른 사람들과 6피트 거리를 지키면서, 되도록 물건을 집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이번 주에 끝내야 할 일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면서, 교수님과의 미팅에서 내가 했던 멍청한 코멘트를 후회하면서, 잔고가 얼마나 남았었는지 떠올리면서, 영양 성분을 살피고 갸우뚱하면서, 할인 중인 제품과 아닌 제품을 비교하면서. 그저 피곤하다 생각하면서 계산대에 섰다.


대단히 친한 한국인 친구가 없는 싱글 유학생의 삶에 COVID-19은 한층 더 극심한 고립과 단절을 의미해서, 이웃과의 눈인사나 스몰 톡을 빼면 장보는 시간이 거의 유일한 사회적 교류의 순간이다. Zoom 미팅이나 통화가 없으면 하루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을 떼는 순간이 마트 캐셔와의 의례적인 안부를 주고받는 순간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대개 영혼 없는 하우 아 유 두잉 정도인 대화들을 기대하고, 그 기대는 대체로 맞다.


"복숭아의 계절이네요."


내가 산 백도를 담으시면서 한인 캐셔 아주머니가 뜻밖에 이렇게 말씀하신 순간, 나는 왜 그 말이 그렇게 좋아서 이렇게 글로까지 남겨야겠다고 생각을 한 걸까? 조금 쓸쓸하고 조금은 설레는 말투로 천천히 계절을 이야기하시는 모습.


갑자기 벚꽃이 보고 싶어서 혼자 훌쩍 스쿨버스를 타고 이공계 캠퍼스에 가는 걸 좋아했고, 오로지 비가 내리는 게 슬퍼서 눈물이 나기도 하며, 산책길에 귀여운 고양이와 강아지 혹은 스윗한 이웃을 마주치면 시를 쓰고 싶은 기분이 들던 나는 유학생활을 하면서 많이 달라졌다. 뭔가를 마음을 다해 느끼는 일은 사치이고 손해라는 걸 자주 체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좀 더 전략적 또 효율적으로 성취를 추구해야 겨우 내 꿈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가슴을 앓느라 낭비했던 내 지난 시간이 못 견디게 아깝고 멍청하게 느껴져 후회하기도 했다. 다사다난했던 만 3년의 유학 생활이 지나갔고 그 사이 나는 조금 지독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보고 반가웠지만 그뿐, 복숭아가 익는 계절이 온 것에는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이다. 계절이 오고 가는 일에 감동받고 슬퍼하며, 그 감상을 나누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못 견디게 행복하다. 이런 비효율적 감정 낭비가 나를 나답게 한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무엇에도 젖어들지 않고 일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나는 이 박사 생활의 여정이 더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성장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사랑할 순 없어도 미워하진 않으려고 한다. 복숭아의 계절이라 행복해하는 내가 나는 조금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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