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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Kang Apr 16. 2020

두 도시 이야기

오우루 쁘레뚜와 리스본

브라질은 1500년 서유럽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소국 포르투갈에 의해 발견되었다. 아프리카 희망봉을 향하던 선박이 길을 잘못들어 신대륙(오늘날 브라질의 북동부)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포르투갈과 거대한 남미대륙국가(훗날 브라질)의 길고 긴 애증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브라질 경제사는 자원 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나라 이름부터 브라질 최초의 수출품인 빠우브라질 나무(염료 원료)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설탕, 금, 커피, 고무, 철강, 최근의 석유까지 500년 역사 동안 새로운 자원이 끊임없이 개발되면서 그때마다 쇠락하는 브라질 경제를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1695년 금광 개발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브라질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천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금이 발견되기 전까지 브라질 정치, 경제 중심지는 식민지 개척자들이 처음 당도하였던 북동부였고 브라질은 북동부의 설탕 경제에 의존했었다. 그러나 설탕 경제 침체기에 맞물려 남동부(오늘날 미나스제라이스 지역)에서 금광이 개발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사람과 돈과 권력이 남동부에 몰리기 시작했다. 당시 미나스제라이스에서 채굴된 황금을 포르투갈 왕실까지 보내는 길을 "왕의 길"이라고 불렀다. 그 길은 오늘날 오우루 쁘레뚜에서 리우데자네이루(포르투갈로 선박을 보내던 최대 항구)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리우데자네이루가 식민지 수도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오우루 쁘레뚜의 금광(아이폰 촬영)
오우루 쁘레뚜에 식민지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또한 황금은 브라질을 수많은 포르투갈 식민지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설탕은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들에서도 재배될 수 있었으나 금은 아니었다. 이때 포르투갈인의 이민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브라질에 대한 포르투갈 왕실의 관심도 같이 높아졌다. 


왕의 길의 시작점에 있는 오우루 쁘레뚜는 이름부터 재밌는 도시다. 포르투갈어로 "검은 금"이라는 뜻인데 당시 노천에 산화되어 검게 변한 철광석에서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빌라 히까(Villa Rica)였다. 영어로 번역하면 "Rich Village", 즉 부촌이라는 뜻이다. 금광 발견으로 브라질의 온갖 돈과 사람들이 몰렸들었던 당시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다. 오우루 쁘레뚜는 당시 브라질내 최대도시였는데 인구수가 뉴욕보다 많았으니 사실상 신대륙 최대도시였던 셈이다. 아마 당시 이곳의 권세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넘어서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오우루 쁘레뚜 전경, 언덕 위로 집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금광개발 붐은 오래가지 못했고 도시는 점점 쇠락하여 이제는 곳곳에 옛 영광만을 간직한 고즈넉한 식민지풍의 작은 마을로 남아있다. 언덕 너머로 끝없이 늘어진 집들이 당시의 마을규모가 어땠을지 짐작하게 해준다. 한때 신대륙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라고 하지만 오늘날 오우루쁘레뚜에 대단한 금은보화가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많던 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 해답은 "왕의 길"의 도착점인 대서양 반대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브라질에 온 첫 해 8월 여름휴가를 포르투갈로 갔다. 남반구니까 이들의 기준에선 겨울휴가였던 셈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브라질리아에서 직항으로 갈 수 있는 외국이 얼마 없었는데 그중 리스본 직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미를 벗어나 유럽 바람을 쐬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포르투갈은 앞서 적은대로 이베리아 반도 끝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이다. 영토는 우리나라보다도 작다. 수도 리스본은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거리지만 도시 자체만 보면 프랑스 파리나 영국 런던에 비해서는 소박한 규모의 도시다. 작지만 한때 세상의 중심이었던 곳, 그래서인지 리스본은 오우루 쁘레뚜와 어딘가 닮아있다. 

인도 항해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를 기리기 위해 지은 호화로운 제로니무스 수도원(우)과 그곳에 잠든 바스코 다 가마(좌)

앞서 말한 브라질에서의 금광 발견은 종주국 포르투갈에 큰 호재였다. 포르투갈 왕실은 당시 브라질에서 채굴되는 모든 금의 20%를 세금으로 거두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양의 금이 포르투갈에 유입되었다고 한다(물론, 금에 대한 세금 외에도 사람에 대한 인두세도 거두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리스본 이곳저곳에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음에도 오늘날 리스본이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이유도 브라질를 포함한 전세계 식민지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도시를 빠르게 복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 대부분의 아름다운 성당들과 궁전들이 브라질의 설탕과 금으로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리스본 곳곳을 구경하면서 브라질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오우루 쁘레뚜와 리스본은 서로 수만킬로미터 떨어져 위치한 대륙도 다르고 지금의 위상도 다르지만 오랜 시간 동안 두 도시는 하나의 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아있는 과거의 유적들 사이에 서로의 궤적을 찾을 수 있다.

리스본 대지진 후 세워진 코르메시우 광장
포르투에 위치한 카페 A Brasileira, 1903년 미나스 제라이스로 커피 유학을 다녀온 포르투갈인이 세운 유서깊은 카페




다시 오우루 쁘레뚜로 돌아와보자. 오우루 쁘레뚜는 브라질 최초의 독립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포르투갈로부터 미나스제라이스의 독립을 주창하였던 찌라덴치스 운동(1789)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곧 식민지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오우루 쁘레뚜의 독립운동을 이정표로 두 도시가 서로 다른 역사의 길을 걷게 된 셈이다. 


당시 독립운동에 사용되었던 깃발은 이제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공식기가 되었는데, 라틴어로 적힌 문구가 의미심장하다. 


"Libertas quæ sera tamen(자유, 비록 늦더라도)" 

미나스제라이스 독립운동 기념관(좌) 및 기념관이 위치한 찌라덴치스 광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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