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에도 리허설이 있나요?
그녀가 활짝 웃고 있다.
카메라 셔터 소리와 조명들이 연신 깜박인다. 활짝 웃고 있는 여자와 그 옆에서 그녀와 마주하며 굳어있는 입꼬리와는 상반된 그윽한 눈빛으로 추파를 던지며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턱시도를 입은 한 남자가 있다. 그녀는 백색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소 경쾌하게 느껴지는 밝은 웃음을 하고 남자를 바라본다. 어색한 미소는 지금 그녀의 심정을 대신하고 있다. 미소에서 시작된 그 웃음의 여운은 여러 가지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다소 과장되어 있다. 남자의 키는 크지 않고 체격은 적당해 보인다.
다른 한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같은 호흡으로 걷고 있다. 그 남자의 키는 좀 전의 남자보다 크고 마른 몸을 하고 있다. 걷고 있는 다리와 어깨의 근육은 첫 번째 남자보다 더 경직되어 보인다. 그녀를 잡은 손이 미세한 진동으로 떨리고 있다. 떨림을 옅고 온화한 웃음으로 포장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활짝 펼쳐진 무대 위를 걷다 잠시 멈춰 서서, 남자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 걸어가는 중이다.
세 번째 남자가 음악소리와 함께 무대 위를 뛰어오른다. 빅뱅의 '베베'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는 이곳까지 울려 퍼졌다. 음정 박자 랩 실력까지 엉망이다. 하지만, 밝음이 주는 에너지가 남다르다. 그가 전달하는 의욕만은 일품이었다. 세 번째 남자는 세명의 남자 가운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가장 싱그럽고 엉뚱 발랄한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오늘 결혼식에서 그가 정말 축가를 부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갑자기 무대 조명이 모두 꺼지고 어두워진다. 그 남자는 씩씩하고 경쾌한 걸음으로 무대를 내려갔다. 이후 스텝 두 명이 눈에 띄게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세 남자와의 만남은 리허설이었다.
이제 곧 이나의 결혼식이 시작된다.
이나는 시누이의 첫째 딸로 수애와는 인연이 깊고 매우 특별한 관계이다. 결혼을 하고 처음 이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초등학생이었다. 이후 시간은 수애가 체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흘러갔다. 이나는 곧 중학생이 되었고 그녀들이 나눈 대화도 나눔도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녀 눈에 막내 동생처럼 비친 이나에게 수애는 자꾸만 사랑과 애착이 생겼다. 이나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관계가 전과 같지 않았다.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나는 자신의 삶에 깊이 들어가 앓이를 시작했고 수애는 외숙모로 그녀의 삼촌과 더 깊숙한 삶 속에서 앓고 회복하고를 반복적으로 지독하게 겪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조금씩 멀어졌다. 때론 친구로 가끔 조카와 숙모로 두 사람의 긴 인연의 시간은 공기와 바람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리고 이나는 이제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으로 결혼을 한다. 이나가 느끼는 행복과 축하의 감정이 배경이 되어 몇십 배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깊숙이 자리 잡은 감정들은 고스란히 수애가 겪고 있는 사랑의 아픔쯤으로 덮어두고 이제는 턱시도를 입은 그 짝과의 행진에 박수와 갈채로 진심을 담아 축하해 주려고 한다.
무대와 무대 주변은 신랑 신부가 앞으로 걸어 나갈 앞으로의 길을 보여주듯 여러 종류의 백색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마치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는 들꽃 길을 연상케 했다. 처음부터 신부 곁에서 그녀를 최선을 다해 지키고 있는 부케가 무엇보다 어여쁘고 특별했다. 신부 엄마가 딸의 결혼을 축하하며 깊은 사랑의 맘을 담아서 손수 준비한 특별한 부케였다. 그래서인지 백색의 드레스와 부케 그리고 신부의 만남이 더욱 조화롭다. 그 구성에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함께한다면 환상적인 조합을 이루리라. 그것은 멀리서도 빛이 나고 오래된 사진첩 속에서도 항상 설렘으로 우리를 맞이해 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 설렘의 기록물들을 만들어 내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기록물들의 양과 비례해서 그녀는 카메라를 쳐다보며 연신 미소를 보낸다.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다 보면 한 두건의 빛나는 자태가 포착되기도 한다. 그 순간 의무를 다해낸 듯 잠시 후 카메라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활짝 웃는 모습 속에 자유로움이 녹아 있다.
결혼식 예행연습처럼 결혼과 결혼생활에 있어서도 리허설이 있다면 삶은 더 단단해질까? 삶의 구석구석이 리허설로 채워져 완성할 수만 있다면 삶은 좀 덜 힘이 들까. 또한 사랑은 조금 더 많아지고 풍요로워지리라... 문득 내 삶은 과연 몇 번의 리허설을 통하여 지금의 순간까지 이어졌을지 궁금해진다. 그녀의 삶 곳곳에 리허설이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수애의 길 또한 좀 더 여유롭고 단단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결혼 생활은 예행연습이 없다.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축복된 삶 또한 리허설은 없을 것이다. 그 속에 뛰어들어 몸소 겪고 체험하고 긴 세월 동안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직접 감당하며 살아야 하리라. 앞으로 그들의 결혼생활은 결혼식이 거행된 오늘 하루와 같이 항상 웃는 모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결혼식 예행연습이나 결혼식을 진행해 나갈 때의 마음과 같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나와 그 짝이 허락되고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간절한 마음으로 깊이 살아가기를 기대한다.
결혼식 식순 가운데 양가 아버님의 말씀이 있었다. 주례를 대신한 양가 아버님 말씀은 뜻있고 전달에 있어서 진정성이 느껴져서 좋았다. 신랑의 아버님은 신부를 몹시 사랑하고 아끼며 예비부부인 그들의 앞날을 사랑을 담아 진심으로 축하했다. 계속되는 긴장감과 떨림을 가라앉히느라 애씀이 수애 심장까지 전해졌다. 두 사람의 축복된 삶을 응원, 당부하는 말씀으로 마무리했다. 신부 아버님 또한 떨림으로 요동치는 심장을 누르고 달래며 한 글자 한 글자 차분히 읽어 나간다. 딸과 사위에게
당신이 경험, 삶 속에서 직접 겪은 일들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마음속 더 깊은 울림으로 전해졌다. "부부는 가까이는 하되 소유물이 아니므로 절대 소유하려 하지 말아라. 거리 없이 서로 지나치게 집착하려고도 하지 말며,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거리를 반드시 지키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이며 이것은 각자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하니 반드시 먼발치의 적당한 거리를 지킬 것을 명심해라." 등등... 신부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새롭게 출발하는 모든 신랑 신부를 위해서 나름대로 간략하게 정리를 해봤다.
결혼식에서 또 한 가지 새로운 건 신랑 신부의 서약식이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았고 자신들만의 서약 10조를 정했다. 1조부터 10조에 이르기까지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내용을 한 가지씩 하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읽어나간다. 여기서 하객들을 앞에 두고 공개한다는 것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내려는 의지와 더불어 사랑을 지키겠다는 일종의 약속 같은 거라 할 수 있다. 그 약속의 다짐은 앞으로 있을 결혼 생활에서의 책임과 의무를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결의가 아닐까.
과거로 거슬러 가니 단상 위에 있는 수애의 모습이 보인다. 웨딩드레스 안의 마른 몸은 경직되어 있고 신체 일부는 떨고 있으며 눈물이 고여있는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만 같다. 단상 위에서 신랑과 발을 맞추어 걸어가던 순간 그 짧은 시간 속에서 과연 어떤 것들을 떠올리며 펼쳐진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을까? 꽃으로 둘러싸인 단상 위 꽃길을 걸으며 앞으로 펼쳐질 결혼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과연 원했던 것과 비슷한 모양과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그 시간 꽃으로 둘러싸인 길 위에 있는 자신을 떠올리며 수애의 시선과 마음으로 또 다른 세계 안의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 세계 안에서 급진적으로 전환되는 화면에 시선이 집중된다. 영상이 반사되어 수애의 눈에 수많은 신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녀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며 맘 한편이 답답해졌다. 쏟아지는 비가 한바탕 상처를 긋고 지나갔다. 온몸으로 그대로 받아내고 쓰라림 뒤 적당한 치료도 없이 무뎌지는 감각처럼 상처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픔으로 돌아왔다.
결혼은 리허설이 가능할 수 있으나 결혼생활에는 리허설이 없다. 지나온 수애의 결혼생활 또한 돌이켜보면 리허설은 전혀 없었다. 삶은 있는 그대로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감당하고 그때의 감정들을 전달하며 직접적으로 부딪혀 리허설 없이 겪어 나가야 한다. 다소 불완전해 보이고 아슬아슬한 시간들이 삶 곳곳을 지나지만 두려움 뒤엔 설렘이라는 것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가끔 그 설렘과 용기가 만나면 만족스러운 선택에 한 걸음 다가가기도 한다. 그런 설렘이 오늘도 삶 속 깊은 곳으로 수애를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