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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불공평한 삶의 구조

by 무 한소

가끔은 교실이 너무 조용해서, 아이들의 숨소리를 업고 급히 온 체념이 들린다.


고개를 숙인 아이들, 그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고요는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었다. 이 사회가 만들어 낸 피로의 소리인가. 숨 가쁜 호흡인가.


그건 어쩌면 어른들이 들리지 않게 만든 침묵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침묵의 언어.,.? 보드판 앞에서 개념을 설명하며 아이들과 시선을 마주치려 애썼다.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표정에서 아이들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선생님, 그냥 좀 지쳤어요.”

문제가 안 풀리는지 심각한 표정을 짓던 한 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아이가 뱉어낸 그 한마디는, 교실의 공기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 말을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진심으로 아이를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나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또한 닿지 않았다. 내 자리에서 아이들의 태도는 그들은 노력만큼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으며, 칠판에 수식을 적어 늘어놓았고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수학의 공식보다 더 복잡한 건, 삶의 불공평한 구조였다.


공부는 결국 마음의 온도로 이어지는 일인데,

우리는 언제부터 그 온도를 잃어버렸을까. 적극적인 태도와는 다른 식어버린 온도로 일상을 보냈다. 정답은 있지만 대화는 없는 교실, 아이들은 있지만 에너지가 없는 교실, 경쟁은 있지만 공감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아이들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나는 그들의 무표정을 바라보았다. 그건 냉소가 아니라, 이 사회를 견디는 마지막 방식이었다.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의 무표정을 '무력', ‘무기력’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건 무력감이 아닌 방어의 표정, 방어기제였다. 아이들도 자신을 지키고 살아야 하기에... 그들은 이미 세상의 빠른 속도와 어른들의 기대를 너무 일찍 배워버렸다. 그래서 웃음 대신 침묵을, 반항 대신 무표정을 선택한 것이다.


그 무표정은 외면이 아니라 그들만의 생존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언어를 해독하기 위해, 칠판이 아닌 아이들의 마음 앞에 다시 섰다.


아이들의 침묵 속에는 여전히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건 단순히 교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사회적 침묵의 결과이다. 누구도 먼저 묻지 않고, 누구도 끝까지 들어주지 않으니 아이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살아 있는 불빛이 있다.

그 불빛을 다시 꺼내는 일, 그건 어른인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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