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는 결말을 바꾸지 않는다

뮤지컬 <하데스타운>

by 말하는 돌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막이 오르면 가장 먼저 관객을 맞이하는 인물은 오르페우스도, 에우리디케도 아니다. 무대 중앙에 선 헤르메스는 신화 속 거대한 존재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오래된 재즈 바의 호스트 같기도 하고, 지하철역 야간 경비원 같기도 하며, 도시의 변두리를 홀로 지키는 노련한 사람처럼 보인다. 눈부신 신성 대신, 오래 살아남은 사람에게서만 나는 작은 노련함과 몸의 기억이 그에게 있다. 헤르메스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간자로 존재하면서도, 그 어느 세계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이 세계의 가장 깊은 결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가 무대를 열 때 사용하는 태도는 늘 조용하다. 그는 서사를 장식하거나 영웅적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화려한 프레젠테이션 대신, 관객을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불러낸다. 그는 관객에게 말하는 대신, 속삭이는 쪽을 택한다. “이 이야기는 아마 이전에도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또다시 들려드릴 수밖에 없어요.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으니까요.” 헤르메스는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을 받아들이고, 반복의 안쪽에서 서사를 정리하는 존재다. 이미 실패할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는 이야기의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결말의 변화가 아니라 기억의 지속이다.


하데스타운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상징적 세계를 갖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예술의 순진함을, 에우리디케는 생존의 절박함을, 하데스는 자본과 질서의 완고함을, 페르세포네는 노동과 감정의 피로를 각각 품고 있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이 모두를 오가며, 서로의 언어를 하나의 무대 위로 이끌어내는 사람이다.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고, 누구의 판단자도 아니다. 오르페우스가 노래를 믿는 이유도 알고, 에우리디케가 가난 앞에서 사랑보다 겨울을 택하는 이유도 알고, 하데스가 공장을 세우는 냉혹함 뒤에 두려움과 질서의 의무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페르세포네가 봄을 꿈꾸면서도 가을과 겨울 속에서 자신이 점점 마모되는 자리를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어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오르페우스에게 결말을 미리 말해주지 않고, 에우리디케에게 떠나지 말라고 설득하지 않고, 하데스에게 계약을 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과 신을 넘나드는 메신저가 아니라, 서사의 실험실을 보존하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의 침묵은 무력함이 아니라 윤리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은 경고한다고 해서 실패를 막지 못한다. 삶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으로만 움직인다. 실패는 설명되어도 멈추지 않으며, 사랑은 아무리 경고받아도 동일한 패턴 속에서 다시 흔들린다.


하데스타운의 가장 중요한 장치는 이야기가 매번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서사가 완전한 비극으로 끝나도, 그 비극은 곧 다시 시작된다. 무대가 닫히기 전에 헤르메스는 조용히 말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 볼까?” 이 반복은 절망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노동과 시간의 연속성에 가까운 감각을 가진다. 인간의 삶은 매일 반복되는 노동과 실패 속에서 굴러가고, 각 세대마다 가난과 예술과 사랑은 같은 패배를 겪는다. 하지만 반복이 반드시 절망일 필요는 없다. 반복은 경험을 기억하는 기술이다. 결말을 바꾸지 않아도, 결말을 잊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르메스는 이러한 반복을 슬퍼하지 않는다. 그는 오르페우스의 실패가 비극이지만, 동시에 미래의 노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하나의 흔적이며, 어떤 노래의 원료가 된다.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보고, 에우리디케가 사라지고, 서사가 무너지는 순간, 관객의 심장은 두 사람에게 쏠린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마다 헤르메스가 가장 조용히 아파하고 있을 거라고 느낀다. 그에게 이 비극은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실패를 전에 본 적이 있고, 앞으로도 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실패는 언제나 다른 결을 가진다. 이야기의 본질이 아니라, 이야기의 경험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헤르메스는 비극을 장례 치른다. 무너진 사랑을 정리하고, 사라진 목소리의 공명을 노래로 옮기고, 관객에게 그 잔여물을 건네준다. 그는 실패를 단절로 만들지 않고, 실패를 기억으로 바꾼다. 예술이 현실보다 오래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실패가 잊히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순간들 때문이다. 현실은 실패를 소비하고 잊어버리지만, 예술은 실패를 보관한다. 오르페우스의 노래는 결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지만 노래는 실패한 사랑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비극보다 더 크고, 구원보다 더 오래간다.


헤르메스는 예술의 신이기보다 기억의 신이다. 그는 변화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는 결과를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을 지키는 능력이야말로 예술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랑은 현실에 패배할 수 있고, 생존은 감정을 집어삼킬 수 있고, 두려움은 등을 돌리게 만들 수 있지만, 예술은 그 패배를 또다시 무대 위로 불러온다. 잊히지 않게 만들고, 다시 듣게 하고, 다시 부르게 하고, 다시 실패할 용기를 준다.


오르페우스는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실패를 다시 노래할 것이다. 이 서사는 구원을 약속하지 않지만, 반복을 약속한다. 헤르메스는 이 세계가 무너질 때마다, 서사를 다시 세운다. 그는 현실을 바꾸지 않지만, 현실에게 지워지지 않도록 저항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야말로 가장 성숙한 희망이다. 희망은 결말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헤르메스는 바로 그 능력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