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회화는 누구의 언어인가

<장 미셸 바스키아 :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

by 말하는 돌

0. 바스키아는 어디에 놓이는가 ― 미술사의 중심에서 밀려난 언어들

장 미셸 바스키아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천재 신화’다. 거리에서 등장해 미술 제도를 정복한 요절의 화가라는 서사는 그의 작업을 빠르게 소비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의 회화를 미술사적 질문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미술사의 바깥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예외가 아니라, 서구 미술사가 누적해 온 배제와 침묵 위에 출현한 필연적인 존재에 가깝다. 바스키아의 회화는 새로운 형식을 제안하기보다, 기존 형식들이 무엇을 말하지 못했는지를 드러낸다. 그의 그림을 읽는 일은 하나의 양식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미술사가 누구의 언어로 쓰여 왔는지를 다시 묻는 작업이다.


1. ‘원시성’이라는 이름의 폭력 이후

바스키아의 해골과 인체, 반복되는 얼굴들은 종종 ‘원시적’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원시성은 자연 상태의 순수함이 아니라, 서구 미술이 타자를 대상화해 온 방식이 남긴 흔적에 가깝다. 근대 미술사는 비서구적 형상을 ‘원천’ 혹은 ‘자극’으로 차용하며 스스로를 혁신해 왔다. 피카소에게 아프리카 가면은 형식적 실험의 도구였고, 그것은 미술사 안에서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바스키아에게 ‘원시적 형상’은 차용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신체와 역사에 각인된 조건이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해골과 해부학적 도식은 생명에 대한 원초적 관심이 아니라, 흑인 신체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해체되고 분류되었는지를 상기시키는 표식이다. 바스키아의 원시성은 미학이 아니라 기억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그는 근대주의를 계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계보가 어떤 폭력을 은폐해 왔는지를 드러낸다. 바스키아의 회화는 근대 미술이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삭제한 것들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2. 회화에 침입한 텍스트 ―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화면

바스키아의 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 중 하나는 문자다. 단어, 숫자, 낙서, 삭제된 문장들은 그림을 하나의 시각적 장면이 아니라 읽어야 할 표면으로 만든다. 이 텍스트들은 설명을 돕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를 방해하고, 시선을 멈추게 하며, 해석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바스키아의 문자는 거리의 언어이자 사회적 폭력의 파편이다. 바스키아의 단어들은 문장이 되지 못하고, 자주 지워지거나 반복된다. 이는 단순한 즉흥성의 결과가 아니라, 완결된 언어를 가질 수 없었던 역사적 위치를 반영한다. 그의 회화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명확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바스키아는 회화가 의미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기대 자체를 거부한다. 그의 화면은 말한다. 이 세계는 정리될 수 없으며, 다만 계속해서 말해질 뿐이라고. 이 불완전한 발화가 바로 그의 회화가 지닌 정치성이다.


3. 네오표현주의라는 분류의 한계

바스키아는 흔히 1980년대 네오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가로 분류된다.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이후, 감정과 제스처가 회화로 복귀한 흐름 속에서 그의 작업은 쉽게 위치 지워진다. 그러나 이 분류는 바스키아의 작업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네오표현주의 화가들에게 회화는 선택 가능한 언어였지만, 바스키아에게 회화는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그는 미술 제도 안으로 편입되었지만, 그 제도의 언어를 온전히 소유하지는 못한다. 왕관은 승리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인정받지 못한 주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불안정한 표식이다. 바스키아는 표현주의를 복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으로 끌어내린다. 감정은 내면의 분출이 아니라, 구조적 억압에 대한 반응이 된다. 이때 회화는 다시 개인적 표현이 아니라, 집단적 기억의 표면으로 기능한다.


4. 초상 이후의 얼굴 ― 정체성의 불가능성

바스키아의 인물들은 초상화처럼 보이지만, 결코 특정 인물을 고정하지 않는다. 얼굴은 반복되고, 분해되며, 해부학적 도식으로 환원된다. 이는 르네상스 이후 지속되어 온 ‘개인의 얼굴’이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다. 근대 초상화가 개인의 존엄과 정체성을 시각화했다면, 바스키아의 얼굴은 존엄이 지속적으로 위협받아 온 역사를 담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우리를 응시하지 않는다. 대신, 응시 자체가 폭력이었던 시선의 역사를 되돌려준다. 얼굴은 더 이상 정체성의 완결이 아니라, 상처와 기억이 축적된 장소가 된다. 이 지점에서 바스키아는 현대 회화의 방향을 바꾼다. 회화는 더 이상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어떻게 지워져 왔는가를 묻는다.


5. 전시 전체를 지탱하는 축으로서의 바스키아

DDP에서 열린 바스키아 전시는 그의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전시는 바스키아를 통해 하나의 질문을 제기한다. 미술사는 누구의 언어로 쓰여 왔는가, 그리고 그 언어는 무엇을 침묵시켜 왔는가. 이 장에서 바스키아는 전시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해석의 기준점이 된다. 그의 회화를 통과한 이후, 우리는 더 이상 회화를 순수한 형식으로 볼 수 없다. 그림은 언제나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으며, 발화의 조건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바스키아의 작업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형이다. 그것은 완성된 의미가 아니라, 계속 발화 중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지금 바스키아

바스키아의 회화 앞에서 우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먼저 꺼낸다. 화면은 복잡하고, 기호는 중첩되며, 단어는 문장이 되지 못한 채 흩어져 있다. 그러나 그 이해 불가능성은 결함이 아니라 전제에 가깝다. 바스키아는 처음부터 회화를 ‘이해되기 위한 언어’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설명을 요청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왜 우리는 언제나 이해 가능한 언어만을 예술로 인정해 왔는가라고.


이 질문은 바스키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회화가 오랫동안 짊어져 온 미술사적 조건과 직결된다. 르네상스 이래 회화는 특정한 언어를 발전시켜 왔다. 원근법, 해부학적 정확성, 균형 잡힌 구도, 그리고 이후에는 자율적 형식과 순수성. 이 언어는 세계를 ‘보편적으로’ 번역하는 도구처럼 여겨졌지만, 동시에 누구의 경험이 보편이 될 수 있는지를 조용히 선별해 왔다.


바스키아는 그 선별의 바깥에서 말하기 시작한 화가다. 그의 회화가 거칠고 불안정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완성될 수 없는 언어의 위치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흑인 신체, 식민의 역사, 거리의 언어, 사회적 폭력은 기존 회화 언어 안에서 정제될 수 없었다. 바스키아는 그 불가능성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화면의 구조로 드러낸다. 지워진 단어, 반복되는 기호, 과잉된 상징은 모두 말하려 했으나 온전히 말해질 수 없었던 언어의 흔적이다. 이 지점에서 바스키아의 회화는 하나의 선언이 된다. 회화는 더 이상 세계를 대표하지 않는다. 회화는 세계 속 특정한 위치에서 발화된 언어가 된다.


DDP의 바스키아 전시는 바로 이 지점을 현재로 불러온다. 전시장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이 그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대신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이 그림은 어디에서 말해지고 있는가. 그리고 누구에게 허용된 언어인가.


오늘날 회화는 하나의 통일된 언어를 갖지 않는다. 회화는 더 이상 보편적 질서나 순수 형식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른 역사, 서로 다른 몸, 서로 다른 기억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발화한다. 이때 회화는 조화로운 합창이 아니라, 서로 어긋나는 목소리들의 병치에 가깝다.


바스키아 이후의 회화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회화를 다시 정치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회화가 언제나 이미 정치적이었다는 사실을 가시화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 이후, 회화는 더 이상 “개인의 표현”이나 “형식의 실험”으로만 읽힐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발화의 조건, 말할 수 있음과 말할 수 없음의 경계, 제도와 역사 속에서의 위치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오늘, 회화는 누구의 언어인가. 그것은 가장 잘 말하는 자의 언어도, 가장 세련된 형식을 가진 자의 언어도 아니다. 오늘의 회화는 말하기가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언어에 더 가깝다. 완결되지 않은 문장, 겹쳐진 이미지, 이해를 방해하는 구조는 실패가 아니라 증거다. 그것은 세계가 여전히 불균등하게 경험되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 불균등함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표시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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