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다는 것

<나와 마을> (1911)

by 말하는 돌

마르크 샤갈에게 태어난다는 것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 반복해서 다시 살아내야 했던 조건이었다. 그는 세계의 중심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의 변두리, 비테프스크라는 작은 도시. 이곳은 교회와 회당이 함께 보이는 도시였고, 유대인 공동체의 비중이 컸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목조 건물이 많은 이 도시는 이후 전쟁과 점령 속에서 거의 파괴되었고, 그 상실은 훗날 샤갈의 회화에서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고향’이라는 형식으로 되살아난다.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의 탄생은 축복이기보다 먼저 한계로 주어졌다. 국경은 가까웠고, 언어는 늘 어긋났으며, 삶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었다. 샤갈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안정된 세계의 내부에 속하지 않는 존재였다.


샤갈은 1887년 모이셰 샤갈이라는 이름으로 아홉 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노동과 기도의 리듬 속에서 흘러갔다. 새벽마다 생선을 나르던 아버지의 몸, 작은 가게를 지키던 어머니의 손, 축제와 애도가 같은 공간에서 반복되던 공동체의 시간. 삶과 종교는 분리되지 않았고, 인간과 동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도 단단하지 않았다. 샤갈은 예술 이전에, 세계가 하나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먼저 배웠다. 그에게 현실은 언제나 기울어져 있었고, 질서는 늘 임시적인 것이었다.


샤갈의 집안은 늘 생계와 신앙 사이에서 하루를 조직했다. 아버지의 노동은 고되었고, 가족의 식탁에 오르던 버터와 치즈는 사치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였다. 그는 아버지의 일을 ‘노예선의 노 젓는 자와 같은 노동’이라 기억하면서도, 그 노동이 만들어낸 최소한의 안정—버터를 바른 빵—을 어린 시절의 상징으로 붙잡는다. 이 상징은 풍요가 아니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세계에서 잠시 확보된 삶의 감각이다.


이 태어남의 감각은 〈나와 마을〉에서 하나의 화면으로 조직된다. 이 그림은 특정한 기억을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샤갈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 안에 놓여 있었는지를 구조적으로 보여준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초록색 얼굴이, 왼쪽에는 거대한 동물의 얼굴이 서로를 향해 배치되어 있다. 두 시선은 마주치지만 대립하지 않는다. 지배도, 상징화도 없다. 인간은 중심에 있지 않고, 동물 역시 주변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이 대칭은 이야기의 장면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다. 샤갈이 태어나 받아들인 세계는 인간이 주인이 되는 질서가 아니라,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나란히 존재해야 하는 세계였다.


마을은 하나의 풍경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대신 작은 장면들이 삽입되고 중첩된다. 위쪽의 집들, 작은 인물의 행위, 동물 얼굴 안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장면. 이는 고향이 하나의 서사로 정리되지 않고, 파편적인 기억들의 콜라주로 살아남는 방식을 드러낸다. 회화는 재현이 아니라 편집이 되고, 기억은 질서가 아니라 배열이 된다.


이 그림에서 중력은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물들은 땅에 단단히 서 있지 않고, 공간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이는 이후 샤갈 회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떠오르는 몸’의 원형이다. 국경과 언어, 제도의 가장자리에서 태어난 존재에게 땅은 언제나 임시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걷기보다 부유한다. 〈나와 마을〉은 그 부유의 첫 선언이다. 이는 도피가 아니라, 불안정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계를 다시 조직하는 방식이다.


샤갈은 이미 알고 있었다. 태어났다는 것은 중심에 놓였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와 불안정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뜻이라는 것을. 비테프스크의 하늘은 그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하늘은 끝내 그의 그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