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무너진 뒤에도

<전쟁> (1966)

by 말하는 돌

마르크 샤갈에게 전쟁은 단일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삶의 조건으로 주어진 구조였고, 평생에 걸쳐 다른 얼굴로 반복되어 온 위협이었다.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거주 제한 구역에서 태어나, 혁명과 내전, 반유대적 폭력, 나치의 집권과 홀로코스트, 망명과 공동체의 붕괴를 통과한 그의 생애에서 폭력은 예외가 아니라 상수였다. 그러나 샤갈은 전쟁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재현하지도, 고발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전쟁 이후에 남는 세계의 상태를 그렸다.


〈전쟁〉은 바로 이 태도가 가장 늦은 시기에 도달한 형식이다. 이 작품이 제작된 1960년대 중반은,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유럽은 재건의 서사를 말하고 있었고, 홀로코스트는 점차 ‘기억의 문제’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샤갈에게 전쟁은 과거형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그의 삶과 감각을 영구히 변형시킨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944년, 아내 벨라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세계는 다시는 이전의 균형을 회복하지 못했다.


벨라는 샤갈의 회화에서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세계를 정렬하게 만드는 기준이었고, 사랑이 일상이 될 수 있게 해주던 중심이었다. 전쟁과 망명, 공동체의 파괴 속에서도 샤갈의 회화가 끝내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던 이유는, 벨라라는 존재가 그의 세계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4년 9월, 치료 가능한 감염으로 그녀를 잃었을 때, 샤갈은 단순히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가 다시는 정렬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후 그의 회화에서 상실은 사건이 아니라 지속 상태가 된다.


〈전쟁〉은 이 상실 이후의 세계를 그린 그림이다. 화면에는 불타는 집들과 도망치는 인물들, 뒤집힌 몸과 기울어진 공간이 뒤엉켜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특정한 전투도, 군복의 소속도, 승자와 패자의 구분도 없다. 전쟁은 하나의 사건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방향이 무너진 상태로 남아 있다. 이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전쟁이 인간의 인식 구조 자체를 파괴한다는 사실에 대한 응답이다. 샤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전쟁이 인간을 어떤 상태로 만들어버렸는지를 묻는다.


이 작품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흰 말의 형상이다. 말은 화면을 가로지르며 비현실적으로 확대되어 있고, 그 몸 위와 주변에는 피난민들이 매달리듯 얹혀 있다. 이 말은 영웅적 기병도, 승리의 상징도 아니다. 그것은 방향을 잃은 채 떠밀리듯 움직이는 역사 그 자체에 가깝다. 인간은 그 위에 올라탄 주체가 아니라, 간신히 매달린 존재로 나타난다. 전쟁 속에서 인간은 세계를 움직이지 못한다. 다만 세계에 의해 옮겨질 뿐이다.


불길과 붕괴의 장면은 화면의 여러 지점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샤갈은 이를 극적으로 집중시키지 않는다. 폭력은 중심이 아니라 배경이 되고, 고통은 절정 없이 지속된다. 이는 의도적인 거리두기다. 샤갈에게 비극을 직접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고통을 다시 한 번 이미지로 소비 가능하게 만드는 위험을 동반한다. 학살의 장면을 재현하는 순간, 관객은 그것을 ‘보았다’는 감각으로 소유할 수 있고, 그 소유는 언제든 감각의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 샤갈은 이 위험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그는 폭력 이후에 남은 세계—집을 잃은 공간, 중심을 상실한 몸, 방향을 잃은 시간—을 남긴다. 〈전쟁〉 속 인물들은 개별적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 얼굴은 흐릿하고, 몸은 온전하지 않으며, 서사는 중단된 채 흩어져 있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판별할 수 없다는 점은 도덕적 회피가 아니다. 오히려 샤갈은 전쟁이 인간을 역할 이전의 상태, 즉 살아남거나 붕괴되는 몸 그 자체로 환원시킨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태도는 샤갈의 생존자적 위치와 깊이 연결된다. 그는 공동체의 일원이었지만, 수용소를 통과하지는 않았다. 그는 ‘본 사람’이었고, 동시에 ‘남은 사람’이었다. 이 위치는 그에게 말할 책임을 부여하면서도, 말할 수 없음의 한계를 분명히 각인시켰다. 그는 비극을 대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기를 택했다. 〈전쟁〉은 이 침묵이 결핍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임을 보여준다.


1966년이라는 제작 시점은 이 선택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전쟁 직후의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붕괴의 잔존을 다룬다. 기억은 정리되었지만, 상실은 끝나지 않았다. 벨라의 죽음 이후, 샤갈의 세계는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고, 전쟁은 더 이상 외부의 사건이 아니라 그의 내부 구조가 되었다. 〈전쟁〉은 그래서 분노의 그림도, 고발의 그림도 아니다. 그것은 전쟁 이후에도 인간의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지 않도록 붙들어 두는 마지막 시도에 가깝다.


샤갈에게 예술의 역할은 분명했다. 예술은 비극을 재현하는 기록물이 아니라, 비극 이후에도 인간이 세계를 느낄 수 있도록 남겨 두는 공간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그리되, 전쟁처럼 그리지 않았다. 피와 시체 대신, 기울어진 집과 떠도는 몸, 집을 잃은 세계를 남겼다. 〈전쟁〉은 말한다. 비극을 모두 보여주는 것이 윤리가 아니라,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제한하는 태도가 때로는 가장 깊은 증언이 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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