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머무는 구조

<삶의 나무> (1976)

by 말하는 돌

오늘의 글은 마르크 샤갈의 말년 회화를 하나의 양식적 완결로 정리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본 에세이집 전체가 반복적으로 다루어 온 핵심 문제―기억, 관계, 신성, 그리고 이미지의 윤리―가 어떤 형식적 태도로 수렴되는지를 검토하기 위한 종결부에 가깝다. 샤갈의 작업은 흔히 색채의 서정성이나 서사적 환상성으로 요약되어 왔지만, 그의 말년 회화는 그러한 특성을 감정적 표현이나 개인적 회상의 차원에서 벗어나, 기억을 다루는 구조적 방식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재고될 필요가 있다.


1976년에 제작된 〈삶의 나무〉는 이 전환이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샤갈은 더 이상 특정 사건이나 신화를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삶의 여러 층위가 하나의 화면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함으로써, 회화가 기억을 조직하는 방식 자체를 질문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는 것은 화면의 중심을 관통하는 나무다. 그러나 이 나무는 고전적 상징체계 속에서 이해되는 ‘생명의 나무’와는 다르다. 뿌리에서 하늘로 질서 정연하게 성장하는 구조도, 시간의 순서를 따르는 서사도 부재한다. 나무는 오히려 화면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수직의 축처럼 작동하며, 자연물이라기보다 기억과 삶의 장면들이 겹겹이 포개진 하나의 장(場)에 가깝다.


나무를 구성하는 색채 역시 단일한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녹색의 생명력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붉은색과 황금빛, 초록과 파랑이 서로 스며들며 혼재한다. 이 색들은 파괴나 불길을 암시하기보다, 샤갈 말년 회화에서 반복되는 축복과 영적 지속성의 색채에 가깝다. 삶은 여기서 순수한 생성의 상태로 제시되지 않는다. 대신 시간과 경험을 통과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상태로, 조용히 발광한다.


나무의 중앙에는 연인의 형상이 떠 있다. 이들은 땅에 발을 딛지 않지만, 불안정하게 매달려 있지도 않다. 연인은 나무의 일부처럼 동일한 리듬 안에서 부유한다. 이 부유는 젊은 날의 탈출이나 도약이 아니라, 중력과 목적에서 해방된 기억의 상태에 가깝다. 사랑은 이 그림에서 결실이나 도착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여러 층위와 함께 나무 안에 머무는 관계의 형상으로 존재한다.


화면의 주변부에는 서로 다른 시간의 장면들이 흩어져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촛대와 의식의 흔적, 마을과 집, 동물과 인간의 모습은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되지 않은 채 공존한다. 이 장면들은 중심과 배경의 위계를 형성하지 않으며,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 그대로 각기 다른 순간들이 같은 화면 안에 머문다. 샤갈은 이 공존을 해석하거나 질서화하지 않는다. 그는 기억이 스스로 배열되는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을 택한다.


특히 나무 아래에서 책을 들고 고개를 숙인 인물은 이 구조를 또 다른 차원에서 지탱한다. 그는 떠오르지 않고 화면의 아래에 남아, 기억을 읽거나 기록하는 존재로 자리한다. 이 인물은 화가 자신일 수도, 기억을 전승하는 자의 형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부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떠오르는 형상들이 가능해지기 위해, 누군가는 여전히 기억의 무게를 감당하며 머무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사실이 이 조용한 자세 속에 암시된다.


색의 구성 또한 이러한 구조를 강화한다. 나무와 연인이 놓인 중앙은 밝고 따뜻한 색조로 구성되지만, 주변부는 깊은 청색과 차분한 톤으로 가라앉아 있다. 이는 빛과 어둠의 도덕적 대비가 아니라, 기억의 서로 다른 밀도와 온도가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하는 방식에 가깝다. 어떤 기억은 여전히 밝고, 어떤 기억은 말없이 침잠하지만, 샤갈은 이 둘을 분리하거나 위계화하지 않는다. 모든 기억은 같은 나무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된다.


이러한 태도는 샤갈의 노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는 두 번의 세계대전, 유대인 공동체의 파괴, 망명과 상실을 모두 통과한 이후에도 기억을 하나의 결론으로 봉합하지 않았다. 노년에 이르러 그의 회화는 더 이상 극적인 서사나 새로운 상징의 발명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억이 어떻게 남는가, 무엇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가를 묻는다. 기억은 보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다시 경험되는 살아 있는 구조가 된다.


따라서 〈삶의 나무〉에서 삶의 나무는 상징적 기호라기보다 기억을 수용하는 구조적 장치에 가깝다. 사랑, 종교, 공동체, 박해와 망명, 기쁨과 상실은 하나의 의미로 통합되지 않은 채 동일한 화면 안에 병렬적으로 공존한다. 이 공존 자체가 이 작품의 형식이며, 샤갈 말년 회화의 핵심적 특징이다.


이 지점에서 샤갈 이후에 남는 것은 특정한 도상이나 화풍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다루는 태도, 다시 말해 기억을 종결하거나 봉합하지 않고 열린 상태로 유지하는 방식이다. 〈삶의 나무〉는 결론이 아니라 조건으로 남는다. 기억은 정리될 때가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채 머물 때 비로소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조용하지만 엄밀하게 증언한다.


이전 19화만개한 채 시들 운명을 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