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종미술관
제주 서귀포에 위치한 왈종미술관은 한 화가의 작업을 정리해 보여주는 장소라기보다, 화가 이왈종이 오랜 시간에 걸쳐 살아오며 축적해 온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간에 가깝다. 이곳에서 그의 회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을 떠올리게 된다.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체념이나 관용의 표현이 아니라, 이왈종의 회화를 지탱하는 세계관이자 그가 말해온 ‘중도(中道)의 삶’을 가장 평이한 언어로 풀어낸 문장처럼 읽힌다.
이왈종의 회화는 한국화의 채색 전통을 기반으로 하지만, 전통의 형식이나 정신을 엄격히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제주의 산과 바다, 집과 나무, 사람과 동물 같은 익숙한 요소들이 화면 위에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특정 장면을 정확히 묘사하기보다 삶의 단면들을 느슨하게 포개는 방식으로 배치된다. 원근은 고정되지 않고, 화면은 분할되며,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의 그림 속 세계는 정리되지 않은 채 공존한다. 잘된 것과 잘되지 않은 것, 평온함과 불안, 기쁨과 피로가 하나의 화면 안에서 나란히 놓인다. 그리고 그 모든 상태는 ‘그럴 수 있다’는 태도 속에서 동등하게 받아들여진다.
이왈종의 그림에는 삶을 설명하거나 판단하려는 조급함이 없다. 그의 화면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하지 않으며, 어떤 장면도 결론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이는 회화적 미완성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에 가깝다. 그의 회화는 삶을 단정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삶에 가까워진다. 실패한 하루도, 반복되는 일상도, 특별할 것 없는 풍경도 모두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곧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라는 문장이 회화로 번역된 결과처럼 보인다.
색채 역시 이 태도를 강화한다. 이왈종의 색은 자연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 감정의 온도에 가깝게 사용된다. 색은 또렷하게 구분되면서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화면 위에 겹겹이 쌓인다. 그 층위는 작가가 제주에서 살아온 시간, 반복된 생활, 그리고 그 안에서 생겨난 감정의 결을 드러낸다. 색은 설명이 아니라 수용의 방식이며, 삶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의 시각적 흔적이다.
왈종미술관의 전시는 이러한 회화 세계를 과도하게 해석하지 않는다. 공간은 한 발 물러서 있고, 중심에는 언제나 화면 속 장면들이 놓여 있다. 관람자는 특정한 감상 경로나 해석을 강요받지 않으며, 어느 그림 앞에서든 멈추거나 지나칠 수 있다. 이 느슨함은 이왈종 회화의 리듬과 닮아 있다. 삶이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듯, 관람 역시 완주해야 할 서사가 아니라 머무를 수 있는 상태로 제시된다.
이왈종의 ‘중도’는 극단을 피하는 중립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국면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안는 태도에 가깝다. 그의 그림에는 성공도, 실패도, 고요함도, 혼란도 함께 있다. 어느 하나도 과장되거나 삭제되지 않는다. 그 모든 상태가 화면 위에 나란히 놓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회화가 지닌 윤리이자 미학이다.
전시를 보고 난 뒤 남는 것은 특정 작품의 이미지나 구성보다, 하나의 문장에 가까운 감각이다.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 문장은 이왈종의 회화를 설명하는 문장이면서 동시에, 그의 그림을 본 관람자가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문장이기도 하다. 왈종미술관은 이 문장을 벽에 적어두지 않지만, 화면 곳곳에서 그것을 조용히 반복한다. 이곳에서 이왈종의 회화는 예술적 성취의 결과라기보다, 삶을 살아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