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으로의 회귀

파괴 이후의 질서

by 말하는 돌

1922년의 파블로 피카소는 다시 ‘그릴 수 있는 몸’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회귀는 단순한 복고가 아니다. 1907년의 급진적 해체와 입체주의의 분석을 통과한 뒤에야 가능한, 의식적인 선택이다.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은 파괴 이후에 다시 세워진 질서, 해체 이후에 재구성된 규범을 보여준다. 이 그림의 고전성은 과거로의 안온한 복귀가 아니라, 이미 무너뜨린 형식을 다시 구축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화면 속 두 여인은 바닷가를 달린다. 그러나 이 달리기는 가벼운 도약이나 낭만적 해방의 장면이 아니다. 그들의 팔과 다리는 기둥처럼 굵고 단단하다. 허벅지는 대리석 조각처럼 묵직하며, 어깨와 팔은 근육의 덩어리로 강조된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과 머리카락은 움직임을 암시하지만, 속도감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중력이다. 이들은 날아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땅에 깊이 붙어 있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움직임은 가벼움이 아니라 무게 위에서 발생한다.


이 신체는 고전적 비례를 참조한다. 안정된 삼각 구도, 균형 잡힌 팔다리의 배열, 부피감 있는 형태는 고대 조각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피카소가 호출하는 고전은 이상화된 미의 복원이 아니다. 여인들은 우아하거나 섬세하지 않다. 그들의 몸은 거의 과장될 정도로 물질적이며, 육중하다. 얼굴은 세밀한 심리 묘사를 제공하지 않고, 신체의 존재감이 화면을 압도한다. 고전적 질서는 아름다움의 규범이 아니라, 존재를 버티게 하는 구조로 기능한다.


이 시기는 흔히 피카소의 ‘신고전주의적 단계’로 분류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전반에 나타난 질서로의 회귀, 이른바 ‘질서로의 복귀(retour à l’ordre)’라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피카소의 회귀는 시대적 경향에 순응한 결과라기보다, 자신의 조형 언어를 확장한 결과에 가깝다. 그는 이미 형태를 해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므로 다시 형태를 세우는 행위는 무지에서 비롯된 복원이 아니라, 파괴를 경험한 뒤의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이 회귀가 과거의 순수성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907년의 얼굴 파괴와 공간 해체를 거치지 않았다면, 이 단단한 몸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체 이전의 고전이 자연스러운 믿음이었다면, 해체 이후의 고전은 의식적인 결단이다. 형태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그것은 다시 합의된 약속이며, 스스로 세운 규칙이다. 그래서 이 그림의 질서는 무구하지 않다. 이미 부서졌던 기억을 품고 있다.


두 여인의 달리기는 단순한 신체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회화가 다시 균형을 찾는 과정의 은유처럼 보인다. 해체가 극단으로 치달았던 1910년대 초반과 달리, 이 화면은 명확한 윤곽과 부피를 되찾는다. 그러나 그 윤곽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내부에는 이미 분절의 기억이 스며 있다. 단단한 외형 속에는 파열의 경험이 응축되어 있다.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은 말한다. 모든 혁신이 영원한 파괴로 귀결될 필요는 없다고. 예술은 때로 스스로를 부수고, 다시 세운다. 그러나 두 번째로 세워진 형식은 첫 번째와 같지 않다. 그것은 무게를 알고, 균열을 기억하며, 파괴의 가능성을 내포한 채 서 있다.


피카소에게 고전은 출발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충돌과 해체를 통과한 뒤에야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도착지였다. 그래서 이 그림의 고전성은 과거를 모방하는 태도가 아니라, 파괴 이후에도 형태를 다시 믿을 수 있다는 선언에 가깝다. 무너뜨릴 수 있었기에,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질서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지만, 더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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