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까지 그리다

노년의 과잉과 자유

by 말하는 돌

1972년, 아흔을 넘긴 파블로 피카소는 여전히 그린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기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살아 있다. 〈자화상〉은 회고도 정리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총결산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는 행위의 흔적이다. 이미 수많은 양식을 발명하고 해체해본 화가가, 다시 한 장의 얼굴 앞에 선다. 그 얼굴은 역사적 인물의 초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한 노인의 표면이다.


화면 속 얼굴은 불안할 만큼 노골적이다. 눈은 과장되게 커다랗고, 동공은 한 지점에 고정되지 않은 채 떠 있다. 윤곽선은 떨리고, 색은 붉고 초록빛으로 과감하게 대비되며, 선은 정교함 대신 직설성을 택한다. 숙련의 절제나 고전적 균형은 보이지 않는다. 붓질과 선은 거의 통제되지 않은 듯 빠르게 그어지고, 종이나 캔버스의 여백은 숨기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과잉은 쇠퇴의 징후라기보다, 더 이상 다듬을 필요가 없어진 상태에 가깝다. 규칙을 지킬 이유가 사라진 자유.


이 자화상에서 피카소는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처럼 야망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중년기의 성취를 정리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이야기’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그대로 노출한다. 얼굴은 하나의 인격을 대표하는 상징이 아니라, 시간에 노출된 표면이다. 주름은 세밀하게 묘사되지 않지만, 선의 겹침과 색의 충돌 속에서 시간의 압력이 느껴진다. 삶은 고르게 새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찢기듯, 겹치듯, 돌출되듯 남아 있다.


이 얼굴에는 자기 연민이 없다. 죽음을 앞둔 고요나 관조의 분위기도 없다. 오히려 눈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피로해 보이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응시는 약해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자화상은 ‘마지막 초상’이라기보다, ‘계속되는 초상’이다. 그는 과거를 돌아보기보다, 여전히 현재를 본다.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아마도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지금일 것이다.


피카소의 말년 작업은 종종 ‘무절제’나 ‘반복’으로 평가되곤 한다. 그러나 1970년대의 자화상들은 오히려 규칙이 해체된 이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입체주의, 신고전주의, 정치적 대작을 거친 화가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 자화상은 성취의 증거가 아니라, 생존의 증거다. 그는 잘 그리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기 위해 그린다.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된다.


이 시기의 드로잉은 빠르고 직설적이다. 선은 망설임 없이 긋고, 수정의 흔적은 감추지 않는다. 이는 기술의 상실이 아니라, 기술을 넘어선 태도다. 숙련은 이미 그의 몸에 축적되어 있고, 이제 그것을 과시할 필요가 없다. 남는 것은 응시와 행위뿐이다. 회화는 더 이상 세계를 해석하거나 변형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 계속 관계 맺는 방식이 된다.


〈자화상〉은 선언처럼 말한다. 예술은 완성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지는 태도라고. 죽기 전까지 그린다는 것은, 삶을 미화하지 않겠다는 선택이자, 끝까지 세계와 마주하겠다는 고집이다. 이 얼굴은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정직하다. 꾸미지 않고, 숨기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다.


결국 이 자화상은 묻는다. 예술가는 언제 멈추는가. 성공했을 때인가, 지쳤을 때인가, 아니면 죽음이 올 때인가. 피카소의 대답은 명확하다. 멈추지 않는다. 그리는 한, 그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더 이상 양식의 혁신이 아니라, 끝까지 응시하려는 의지로 증명된다.


이 얼굴은 삶의 총결산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행위의 한 장면이다. 아름다움 대신 자유, 완성 대신 지속. 1972년의 피카소는 그렇게 말한다. 예술은 성취가 아니라 태도이며, 태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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